18. 생활은 사건보다 더 정확한 증거다.
문이 열렸다.
도윤이 먼저 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열쇠만 돌려 문을 열고, 한 번 멈췄다. 내가 결정할 시간을 주는 멈춤. 도윤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오늘은… 결론 만들지 말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지, 흔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내 발이 문턱 앞에서 멈췄다는 것. 멈춘다는 건 아직 도망가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멈췄다. 집의 냄새가 났다. 낯선데도 익숙한 냄새였다.
세탁세제의 잔향, 오래된 나무장 속에 갇혀 있던 공기,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는 커피 향.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내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속도로, 내 몸이 먼저 “여기야”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도윤이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도윤 : 들어와.
후인 : 여기가…
도윤 : 응. 우리 집이었어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우리’라는 단어는 지금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컸다.
나는 결론을 원하지 않기로 했다. 증거만. 확인 가능한 것만.
현관 오른쪽에 우산꽂이가 있었다. 우산이 두 개 꽂혀 있었다. 하나는 검정색, 하나는 투명.
투명 우산 손잡이에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별 모양. 귀엽게도, 너무 생활적인 귀여움이었다.
별 스티커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하나 번쩍 떠올랐다.
“너는 우산도 잃어버리니까. 표시해둬야 해.”
도윤의 목소리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도윤이 내 표정을 보고, 거의 소리 없이 물었다.
도윤 : 뭐가 생각났어?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후인 : 아무것도.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 좋아. 아무것도 아니어도 돼. 그냥—몸이 먼저 기억해도 돼.
현관 벽에는 작은 자석이 붙어 있었다. 자석 아래 종이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냉장고에 붙여놓는 메모 같은 종이. 글씨는 도윤의 글씨였다. 단정한데 서두르지 않은 글씨.
후인 - 약 8시, 물 먼저.
도윤 - 9시 회의.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후인’이라는 두 글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묘하게 단단해졌다.
누군가가 내 삶을 ‘관리’하는 문장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이 서로를 맞추는 방식의 문장.
사소해서 더 확실한 증거.
후인 : 이거…
내가 종이를 가리키자 도윤이 말했다.
도윤 : 네가 아침에 약 먹는 걸 자주 놓쳐서.
도윤이 웃었다.
도윤 : 그리고 네가 놓치면, 네가 제일 먼저 화내잖아.
말문이 막혔다. 내가 화내는 순간의 얼굴을 도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가까운 사람의 지식이었다.
친구가 아는 정보가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만 아는 밀도. 그 밀도가 갑자기 목을 조였다.
거실로 들어가자 소파가 있었다. 소파 옆 테이블 위에는 충전 케이블이 두 개, 컵 받침이 두 개.
두 개. 두 개. 두 개.
누가 일부러 맞춘 ‘두 개’가 아니라,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두 개’였다.
생활은 그런 식으로 흔적을 남긴다. 사건처럼 폭발하지 않고, 대신 끝까지 남는다.
나는 벽 쪽을 봤다.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글자 없는 사진. 회색빛 바다였다.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 생긴 흰 거품이, 한 장의 정지 화면처럼 박혀 있었다.
그 바다였다. 회색인데 우울하지 않았던 바다.
도윤이 “과장해야 남는다”라고 했던 날의 바다.
후인 : 저 사진…
내가 겨우 말하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 네가 찍었어.
후인 : 내가?
도윤 : 응.
도윤은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도윤 : 그리고 네가 집에 와서 액자 사서 걸었어. 네가 잊을까 봐.
잊을까 봐. 내가 나를 위해 만든 증거. 그 사실이 목 안쪽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무너지는 걸 싫어한다.
무너지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환자’로 만들고, 누군가가 내 삶을 ‘정리’하려고 할 테니까.
그런데 이 집에서는 이상하게 울어도 될 것 같았다. 여기는 ‘내가 있었던 곳’이니까.
내가 모르는 내가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내가 남아 있는 곳이니까.
도윤이 내 옆에 섰다.
도윤 : 후인아.
후인 : 응.
도윤 : 너, 지금 뭘 느껴?
도윤이 물었다.
도윤 : 결론 말고.
나는 액자를 보며 말했다.
후인 : 집… 같아.
목소리가 떨렸다.
후인 : 근데 내가 집을 모르겠어.
도윤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도윤 : 집을 잊은 게 아니라…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은 거야.
도윤은 내 손끝을 아주 조심스럽게 잡았다. 잡는다는 말보다, 자리를 확인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도윤 : 집은 아직 네 몸에 남아 있어.
나는 손을 빼지 않았다. 불안해서가 아니라, 이 손잡음이 이상하게 ‘맞는 자리’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맞는 자리라는 감각이, 기억보다 더 빨리 왔다. 그때 도윤이 아주 낮게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이 집은 곧… 비어.
후인 : 무슨 뜻이야.
도윤이 말을 고르다 멈췄다.
도윤 : 어머니가…
도윤은 한 번 숨을 삼키고, 문장을 바꿔 붙였다.
도윤 : 어머니가 이제 이 곳을 정리하려 하실거야.
나는 숨을 삼켰다. 어머니는 내 인생을 정리하려 했고, 나는 내 인생을 찾으러 왔다.
방향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순간이 가까웠다.
후인 : 그럼 나 뭐부터 봐야 해?
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도윤 : 침실.
그리고 한 박자 뒤 덧붙였다.
도윤 : 침실은… 사건이 아니라 생활이 남아 있는 곳이니까.
나는 거실을 지나 복도로 걸었다. 발이 떨렸다. 문 하나 앞에서 멈췄다. 도윤이 내 뒤에 섰다.
도윤의 숨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가까운데도, 재촉하지는 않았다.
도윤이 말했다.
도윤 : 문 열기 전에 약속 하나 더.
후인 : 또?
내가 말하자 도윤이 아주 작게 웃었다.
도윤 : 응.
도윤은 내 손이 주먹 쥐려는 걸 보더니, 손가락을 살짝 펴주며 말했다.
도윤 : 네가 오늘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도, 너는 실패한 게 아니야. 오늘은 ‘증거를 본 날’이면 충분해.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 손잡이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