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보호라는 말은 가끔 가장 단단한 폭력이 된다.
문이 닫혔다. 도윤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지기까지, 어머니는 한동안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마치 누가 나가고 누가 남았는지, 그 순서를 확인하는 사람처럼.
거실에 남은 건 나와 어머니, 그리고 내가 가슴에 끌어안은 파일 뿐이었다.
방금 전 도윤이 내 손에 다시 쥐여준 그 파일을, 나는 놓지 않았다.
종이의 모서리가 내 갈비뼈를 눌렀고, 그 압박이 이상하게 현실 같았다.
내 기억이 아니라 내 몸이 먼저 “이건 진짜다”라고 말하는 느낌.
어머니는 그 파일을 보면서도 당장 뺏지 않았다.
뺏는 순간, 내가 방금 “내 편”이라고 했던 말이 더 커질 테니까.
어머니는 상대의 말을 크게 만드는 방식으로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
어머니는 언제나 상대가 스스로 자기 말을 작게 만들게 한다. 오늘도 그랬다.
어머니 : 그거 읽어.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단정한 목소리는 흔들리는 사람을 눌러버린다.
어머니 : 읽고 나서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해.
후인 : 엄마는 왜 그렇게 자신 있어?
내가 물었다. 말이 튀어나온 뒤에야 알았다.
나는 지금 질문을 던지는 게 아니라, 내 자리를 확인하려고 하고 있었다.
후인 : 이 파일을 다 읽으면 내가 어머니 편이 될까?
어머니는 대답 대신 부엌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따라왔다. 컵을 탁자 위에 탁, 놓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 나는 너를 오래 봤어. 너는 불안하면 결국 ‘안전’으로 돌아와.
그 문장이 나를 화나게 했다. 내가 선택한 걸 ‘불안의 결과’로 번역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싸움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확인을 하지 않으면, 이 모든 건 또 어머니의 언어로 정리될 테니까.
나는 파일을 펼쳤다.
첫 장. 익숙해진 붉은 도장, ‘가족관계’라는 제목. 그리고 내 이름 옆의 도윤.
내 머리가 다시 한번 멈칫했지만, 나는 억지로 다음 장을 넘겼다. 결론이 아니라 증거부터. 도윤이 남긴 규칙.
두 번째, 세 번째를 지나—어느 페이지에서 손이 멈췄다.
각서.
제목이 너무 또렷해서, 오히려 글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각서라는 단어에는 이상한 딱딱함이 있다.
합의나 대화가 아니라 “정리”에 가까운 문서.
정리라는 말이 어머니 입에서 나올 때마다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걸, 나는 이미 배웠다.
그 아래에 이름이 있었다.
도윤.
숨이 목구멍에 걸렸다.
후인 : 어머니 이게 뭐죠?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너무 차분해서 더 무서웠다.
어머니 : 도윤 씨가 쓴 거야.
후인 : 왜.
한 단어만 내뱉었는데도,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머니 : 떠날 수 있게 하려고. 그 애가 원했어.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내 머릿속에서 두 문장이 서로 부딪혔다.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 애가 원했다. 도윤의 ‘순서’가 떠올랐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 어머니가 말하던 ‘안전’.
두 단어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아서 더 불길했다.
후인 : 도윤이가… 먼저 나를 떠나고 싶어 했다고?
내가 묻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대답인 것처럼.
어머니 : 너는 자꾸 잊고, 자꾸 헷갈리고, 자꾸 불안해졌어. 그때 도윤 씨가… 많이 힘들어했지.
어머니는 잠깐 쉬었다가, 아주 얇게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 : 결혼이라는 게 그런 거야. 한쪽이 무너지면, 한쪽도 무너져.
결혼.
어머니가 처음으로 그 단어를 입에 올렸다. 입에 올리는 순간, 그 단어는 내 현실이 됐다.
아니, 내 현실이었던 것이 내 현재로 밀려 들어왔다. 나는 각서 아래에 찍힌 서명 옆의 날짜를 봤다.
숫자는 선명했다. 숫자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 날짜의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날의 내가 어떤 표정으로 도윤에게 서명을 부탁했을까. 혹은—정말로 부탁한 사람이 나였을까.
후인 : 이거… 어머니가 시킨 거 아니고? 도윤이가 직접 쓴 게 맞아요?
나는 다시 물었다. 내 목소리 속에는 이미 의심이 있었다.
어머니는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어머니 : 후인아. 나는 도윤 씨를 협박한 적 없어. 나는 선택지를 준 거야. 도윤 씨가 더 상처받지 않게 떠날 수 있도록.
어머니답게 문장을 정확히 마감했다. 선택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포장지. 선택지를 준다는 말은, 통제를 가장 그럴듯하게 만드는 문장이었다.
나는 각서를 읽었다. 문장들은 정중했고, 단정했고, 너무 정돈돼 있었다.
도윤이 감정을 숨기려고 존댓말로 말할 때의 문장 같았다.
그 문장들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닮아 있다는 건, 진짜일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줄을 따라 내려갔다.
—향후 치료 및 생활에 개입하지 않는다.
—법적·정서적 부담을 최소화한다.
—보호자와 협의하여…
그때 숨이 멎었다.
후인 : 개입…? 나와 결혼한 도윤이 내 생활에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어?
내가 거의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대답했다. 너무 빨라서, 오히려 준비된 대답처럼 들렸다.
어머니 : 그래. 너무 깊이. 너는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했겠지. 근데 기억이 흔들리는 사람한테는, 사랑도 쉽게 ‘의존’이 돼.
의존. 어머니가 감정을 무력화할 때 쓰는 단어. 내가 사랑을 말하면 어머니는 의존으로 번역한다.
번역되는 순간, 내 감정은 약점이 된다. 약점이 되는 순간, 어머니는 더 쉽게 나를 “보호”할 수 있다.
나는 각서를 덮었다. 숨을 쉬고 싶었는데, 숨이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랐다.
후인 : 어머니. 이게… 진짜로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머니 : 응.
그 단정함이 오히려 공포였다.
후인 : 그럼 왜 내게 말 안 했어?
내가 묻자, 어머니는 냉정하게 답했다.
어머니 : 말하면 네가 버티겠니? 너는 진실을 들으면 더 무너져. 무너진 너를… 도윤 씨가 감당해야 해.
어머니는 컵을 내 쪽으로 밀었다.
어머니 : 나는 그걸 막은 거야. 보호 자니까.
보호자라는 말이, 그 순간 내 귀에는 소유자처럼 들렸다. 나는 컵을 잡지 않았다. 대신 파일을 다시 펼쳤다.
각서 뒤에, 더 얇고 더 노골적인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이사 관련 확인서.
도윤의 이름. 도윤의 서명. 주소. 그리고 이사 날짜.
나는 주소를 보는 순간,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1202호.
내가 모르는 주소인데, 내 몸은 그 숫자를 아는 것 같았다.
낯설지 않은데 떠오르지 않는 것. 그게 내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
후인 : 이 주소…
내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 응. 너도 봤지? 관리사무소. 카드.
그 순간 퍼즐이 맞아 들어가는데, 퍼즐이 맞아 들어갈수록 나는 더 무너졌다.
도윤의 집이 아니라, 내가 살았던 집 같았다.
내가 ‘살았던’ 기억은 없는데, 그 숫자만은 피부에 남아 있는 느낌.
어머니가 더 낮게 말했다.
어머니 : 후인아. 그 애는 떠날 준비를 했어. 너는—여기서 안전하게 치료만 하면 돼.
안전하게. 치료만. 그 문장들이 내 삶을 한 칸짜리로 줄이는 소리 같았다.
나는 파일을 덮었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주먹을 쥘 뻔했다. 그런데 이번엔 주먹을 쥐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어머니를 향해 말을 꺼냈다. 말이 곧 증거가 되게.
후인 : 어머니는… 도윤이가 떠나길 원했고. 도윤이는 떠날 수 있게 ‘각서’를 썼고.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살아왔네!
어머니 : 그래. 그게 너한테 가장 덜 아픈 방식이었어.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문장을 듣고,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덜 아픈 방식이라는데, 내 가슴은 지금 너무 아팠다.
덜 아프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내 몸이 증명하고 있었다.
후인 : 어머니. 내가 정말로 잊은 게 있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내가 다시 찾아야 해요.
어머니 : 후인아. 너는 기억을 찾는다고 회복되지 않아.
어머니가 딱 잘랐다. 어머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머니 : 너는 기억을 찾다가 더 망가질 수도 있어.
그 말을 듣고 오히려 확신이 생겼다. 어머니는 회복을 원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원하는 건, 내가 다시 선택할 수 있게 되는 상태가 아니다.
어머니가 원하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없어서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는 상태다.
후인 : 그럼… 내일 1202호로 갈 거야.
내 말에 어머니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 : 거긴— 안 돼.
어머니가 처음으로 단정함을 잃었다. 단정함이 무너지면, 그 아래에 있는 게 나온다.
후인 : 거긴 뭐. 내가 살았던 곳이라서?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떨리지 않는 게 오히려 무서웠다.
이제 나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나는 파일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종이의 모서리가 갈비뼈에 닿았다. 아팠다. 그런데 그 아픔이 현실이었다.
오늘 내가 만든 증거였다. 도윤이 말한 대로, 이제부터는 오늘의 증거를 내가 직접 만들어야 했다.
내가 나를 읽는 증거. 그리고 내가 나를 되찾으러 가는 증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