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의 뒷면

13. 분실물은 늘 되돌아오는 방식이 있다.

by NaeilRnC

밤이 깊어지자 어머니 집이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일찍 잤고,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늘 같은 패턴이 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긴장한다.

손끝이 뜨겁고, 목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생각은 그 다음에야 따라온다. 이미 늦게.


나는 방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어머니 집의 공기는 낮보다 밤에 더 단단해진다.

정리된 것들이 잠들면, 숨길 것들이 더 또렷해지는 집.

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 누우면 잠이 오는 게 아니라 결론이 와서 눌러앉을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현관을 나설 때 도어락의 ‘삑’ 소리가 작게 났다.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하게 컸다.

이곳은 늘 불편했다. 그래서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불은 켜지 않았다. 어둠이 더 편했다. 어둠은 적어도 나를 단정하게 만들려 하지 않으니까. 나는 거실 불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도윤이 준 카드를 꺼냈다.

앞면의 작은 로고, 의미를 모르는 숫자들. 낮에는 그냥 출입카드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분실하면 연락해.”

그 문장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내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것처럼. 카드를 뒤집었다.

뒷면에 작은 글자가 있었다. 너무 작아서 처음엔 의미가 없는 점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 번 인식되자 그 점은 갑자기 문장이 됐다.


응급연락 1. 그리고 그 아래, 번호.


내 번호가 아니었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응급연락 1’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서류가 하는 말이다.

병원, 경찰, 행정, 그런 곳에서만 등장하는 단어. 내 삶이 또 서류로 정리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모르는 칸들이 내 대신 결정하고 있다는 느낌.


카드 모서리에는 작은 긁힌 자국도 있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뭔가를 지운 흔적처럼.

빛을 비스듬히 받으면, 지워진 자리의 결이 미세하게 반짝였다. 나는 손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손끝이 떨리니까 글자도 함께 흔들렸다. 지워진 자리의 형태가… 단어의 길이 같았다.


배우자.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봤던 단어. 진료실에서 어긋난 듯했던 단어.

서랍 속 봉투에서 보였던 ‘가족’의 일부. 조각들이 갑자기 한 줄로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바로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하는 순간 질문들이 쏟아질 테니까.


도윤이와 내가 결혼을 했다고? 언제? 그런데 왜 나는 모르고 있지?


나는 카드에 적힌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두 번 울리고,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관리사무소입니다.”


병원이 아니라…관리사무소.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 손에 쥔 이 얇은 플라스틱이, 내가 생각하던 세계보다 더 현실 쪽에 붙어 있다는 게 갑자기 무서웠다.


후인 : 저… 죄송한데요. 이 카드가 어떤 카드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밤이라서가 아니라, 내 말이 내 삶을 깨울까 봐.

상대방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도 서류 소리였다. 화면 속 칸을 열고 닫는 소리.


관리사무소 : 카드 번호 불러주시겠어요?


나는 번호를 불렀다. 상대는 잠깐 더 두드리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관리사무소 : 네, 확인됐습니다. 세대 등록 카드네요. 1202호로 되어 있고요.


1202호.

그 숫자가 낯설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낯설지 않은지 모르겠다는 게 더 무서웠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 ‘1202’가 이미 저장돼 있는데, 그 위치를 찾지 못하는 느낌.

지도는 있는데 길이 없는 느낌.


후인 : 1202호…요?

관리사무소 : 네. 입주자 등록으로 되어 있고요. 응급연락은…


상대가 잠깐 멈췄다. 정리된 말투가 아주 작은 틈을 냈다.

그 틈이, 내가 감히 들여다보면 안 되는 칸처럼 느껴졌다.


관리사무소 : …등록자 본인 외에, 1순위가 도윤 님으로 되어 있네요.


도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숨이 막혔다. 내 가슴 안쪽 어딘가에 걸려 있던 것이 확 잡아당겨졌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다음 말이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관리사무소 : 관계는… 음… 입주자 관계 코드도 같이 떠서요.


키보드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관리사무소 : 배…


나는 말을 끊었다.


후인 :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손바닥을 펼치려고 했는데, 이미 주먹이 쥐어져 있었다.

손톱이 살을 눌렀다. 아픈데도 풀지 못했다. 아픔이 오히려 현실감이어서.

아프면 적어도 지금이 ‘여기’라는 건 확실해지니까.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도윤.

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받았다.


도윤 : 후인아.


도윤의 목소리는 평소랑 같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내 세계가 흔들리고 있는데, 도윤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그 평온이 위로가 아니라 증거처럼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거.


후인 : 너… 이 카드 뭐야? 응급연락 1이 왜 너야?


도윤이 잠깐 숨을 멈췄다가 말했다.


도윤 : 봤구나.

후인 : 그게 무슨 카드야. 1202호가 뭔데. 그리고… 거기 관계란에 뭐라고 적혀 있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떨고 있다는 게 싫어서 더 세게 말했다.

도윤은 한참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머릿속에서 단어가 먼저 완성된다.

배우자. 가족. 정리.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도윤이 낮게 말했다.


도윤 : 후인아.

후인 : 응.

도윤 : 지금은… 네가 감당할 속도로 듣는 게 아니라, 네가 부서지는 속도로 들을 거야.

후인 : 또 순서 타령이야?


내가 날카롭게 말했다.


후인 : 내 삶인데, 왜 네가 속도를 정해?


도윤은 아주 조용히 대답했다.


도윤 : 네가 무너질까 봐.


그리고 한 박자 뒤, 덧붙였다.


도윤 : 그리고 네 어머니가 원하잖아. 네가 무너진 상태로만 남아 있길.


그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어머니를 그렇게 말하는 도윤이 낯설었고, 그 낯섦이 오히려 진짜 같았다.

도윤이 늘 농담으로만 나를 붙잡던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했다.


후인 : 그럼 와. 지금 와. 여기로.


도윤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윤 : 좋아. 근데 후인아, 약속해.

후인 : 뭘.

도윤 : 오늘 밤 네가 듣는 건… 결론이 아니라 증거야.


전화를 끊고 나는 소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문득, 서랍 속 봉투의 도장 자국이 떠올랐다.

가족. 그 단어가, 이제는 단어가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쪽으로 가리키는 방향표처럼 느껴졌다.

현관 쪽에서 도어락 소리가 났다.


집으로 들어오는 도윤의 손에는 손에는 파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얇은 파일. 얇아서 더 무거워 보이는 것.

도윤은 신발을 벗고도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한 걸음 들어오는 게, 한 문장을 말하는 일처럼 어려운 사람의 자세로.

그리고 파일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탁,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조심스럽게.

도윤이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이제… 네가 네 삶을 읽어야 해.


나는 파일을 바라봤다. 봉투처럼, 서류처럼, 얇은 종이들의 묶음.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분실물은 늘 되돌아오는 방식이 있다. 찾는 사람이 있을 때. 그리고, 숨기던 사람이 흔들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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