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

6. 읽지 못한 칸이, 나를 대신 결정한다.

by NaeilRnC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초록 노트를 펼쳤다.

도윤이 샤워하는 동안, 나는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사람처럼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런데 이건 일기장이 아니라 설명서라고 했다. 설명서라면 읽어도 되는 걸까.

읽는다고 해서 내가 덜 비겁해지는 걸까.

근데 지금 내게는, 비겁해지지 않는 방법보다 무너지지 않는 방법이 더 급했다.


노트는 날짜로 정리돼 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날들조차 도윤의 글씨로는 살아 있었다.

어떤 날은 한 줄로 끝났고, 어떤 날은 유난히 길었다. 유난히 긴 날은 대체로 같은 단어를 품고 있었다.


어머니.


나는 그 패턴이 싫었다. 내 기억이 아니라 내 삶의 구조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설계돼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잊어버리는 건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선택할 권리인 것 같았다.


샤워실에서 물소리가 멈추는 순간, 나는 노트를 덮었다. 덮는 손끝이 어색했다.

마치 증거를 다시 숨기는 사람처럼.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오늘은 더 이상 받지 않으려 했는데 손이 먼저 움직였다. 습관은 기억보다 빠르다.


어머니 : 후인아.


어머니는 목소리를 낮추지도, 높이지도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이 이미 정리되어 있다는 말투였다.


어머니 : 아까 그 종이, 네가 제대로 봐야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나는 곧장 떠올렸다. 어머니 집 탁자 위에 놓였던 흰 종이, 정갈한 글자들, 그리고 내가 끝내 읽지 못한 제목.


후인 : 내가 뭘 후회해.


내가 말하자 어머니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단정하게 덧붙였다.


어머니 : 그 애가 끼어들어서 네 인생이 복잡해지는 걸.


그 애. 도윤. 어머니는 도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건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다.


후인 : 어머니는 왜 도윤을 그렇게 말해요?


내가 묻자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장을 바꿔 던졌다. 질문을 피하는 대신 결론을 던지는 방식으로.


어머니 : 내일 병원 갈 때, 서류 다시 작성할 수도 있어.


전화가 끊기고 나서야 나는 숨을 쉬었다. 오늘 어머니 집에서 보았던 흰 종이, 그 위의 정갈한 글자들.

읽지 못한 제목. 읽지 못했는데도 이미 나를 움직이는 단어.


샤워실 문이 열리고 도윤이 거실로 나왔다. 머리끝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다.

나는 그 물방울이 왜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기억은 자꾸 흐려지는데, 이런 사소한 것들은 과하게 또렷했다.

마치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을 일부러 틀리게 배치하는 것처럼.


도윤 : 어머니?

후인 : 응, 서류에 대해 얘기했어.


내가 말하자 도윤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물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 자연스러움이 이상했다. 그 단어가 낯설지 않은 사람처럼. 나는 물병을 받으며 물었다.


후인 : 그 서류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도윤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도윤 : 중요할 수 있어. 네가 흔들릴 때, 누가 네 옆에 설 수 있는지 정해지는 거니까.

후인 : 그럼 결정은 어머니가 하면 되잖아.


내가 말했다. 말하고도 그 문장이 내 뜻이 아닌 것처럼 들렸다. 어머니가 하면 ‘안전’하니까.

어머니가 하면 ‘복잡하지’ 않으니까. 그게 내가 자라온 방식이니까.

도윤이 아주 얇게 웃었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얇았다. 빛이 아니라 막 같은 표정.


도윤 : 후인아. 안전하다는 말은, 늘 누군가의 손이 닿아 있다는 뜻이기도 해.


도윤이 말했다. 그 말이 내 속을 찔렀다. 나는 물병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을 숨기려면 또 주먹을 쥐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손을 ‘놓는’ 연습. 내가 무너질 때마다 자동으로 쥐던 것들을, 오늘은 억지로라도 펴보는 연습.


후인 : 근데 너는 왜… 이렇게 다 알고 있어? 서류의 내용도 어머니의 생각도 너는 너무 자연스러워


내가 물었다. 도윤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나를 봤다.

그 눈에는 ‘이미 본 적 있는 것들’이 있었다. 내게는 없는 기억의 결이.


도윤 : 나는 준비하는 편이야. 준비해 두면… 덜 무너져.

후인 : 누가?

도윤 : 너도. 나도.


도윤은 지금 나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숨기는 이유가 배신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숨김이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이번엔 더 단단하게.


후인 : 도윤아. 너는 왜 나 대신 그렇게 준비해?

도윤 : 너 대신 무서워해주는 사람도 필요하잖아.


도윤은 내 손을 봤다. 펴놓은 손가락들. 놓으려는 사람의 손.

'대신'이라는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누군가가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점점 내 삶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이상하게도 나를 작게 만들었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병원 복도였다. 복도는 길고 하얗고 차가웠다.

나는 종이를 들고 있었는데, 보호자 칸에는 관계를 고르는 항목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종이에 적힌 글자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글자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잉크처럼 번져서 읽을 수 없게 됐다.

마지막에 남은 칸 하나. 그 칸 옆에 찍힌 단어는 단 하나였다.


배우자.

나는 그 단어를 읽는 순간 깼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떤 꿈은 꿈이 아니라 예고처럼 느껴진다.

나는 숨을 고르고 물을 마시려다, 물이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아 다시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도윤이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자고 있었다. 손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나는 그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내 손바닥을 그 위에 얹었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아이스크림이 차가운데 손이 따뜻했던 것처럼. 나를 버티게 하던 그 대비가 또렷하게 돌아왔다.

그 따뜻함이 무서웠다. 따뜻함은 남는다는 뜻이고, 남는다는 건 책임이 된다는 뜻이니까.


그때 문득 생각했다. 읽지 못한 글자도 내 삶을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글자를 끝까지 읽어야 하지?

그리고 더 정확히는 누가 내 대신 그 글자를 읽게 둘 건지, 내가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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