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리갈란스(Homo legalans)

13. 규정으로 사는 인간

by NaeilRnC

호모 리갈란스는 라틴어 lex(법, 규정) 및 legalis /lɪˈɡælɪs/(합법의, 법적인)에서 따온 말로,

판단과 책임을 스스로 지기보다 규정의 문장 뒤로 숨는 방식으로 살아남는 인간을 뜻한다.

Homo legalans /ˈhoʊmoʊ ˈliːɡəlænz/ 는 그 인간형의 이름이다.


규정은 필요하다. 규정이 없으면 약한 사람이 먼저 다친다.

문제는 규정이 도구가 아니라 방패가 되는 순간이다.

호모 리갈란스는 규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규정으로 ‘피하는’ 사람이다.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은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결정을 하지 않으면서도 결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때 필요한 건 생각이 아니라 문장이다. 규정은 문장으로 되어 있고, 문장은 사람을 이긴다.

이 인간유형의 대표 문장은 대개 이렇게 생겼다.


“규정상 안 됩니다.”
“원칙대로 하겠습니다.”
“저희는 절차를 따릅니다.”
“예외를 두면 형평성 문제가 생깁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더 강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결함이 있다.
규정이 말하는 건 ‘가능/불가능’이지, ‘옳음/적절함’이 아니다. 그런데 호모 리갈란스는 그 둘을 섞는다.
불가능을 옳음으로, 절차를 정의로 바꾼다. 그러면 자신은 안전해진다. 판단의 부담이 사라지니까.


전형적인 장면은 이렇다.

어떤 사람이 급하다. 사정이 있다. 설명이 길다. 원래 규정대로라면 안 된다.

여기서 조직은 ‘판단’을 해야 한다.

규정의 목적과 맥락을 해석하고, 예외의 기준을 만들고, 책임을 질 사람을 정해야 한다.

호모 리갈란스는 그 부담을 싫어한다. 그래서 가장 편한 길로 간다.


“규정상 안 됩니다.”


이 한 문장은 대화를 끝낸다.

사람의 사정을 ‘사정’이 아니라 ‘민원’으로 바꾸고,
대응을 ‘판단’이 아니라 ‘통보’로 바꾼다. 상대는 더 설명할수록 더 초라해진다.
규정은 논리가 아니라 벽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모 리갈란스의 진짜 기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규정을 방패로 들면서도, 필요할 땐 규정을 유연하게 쓴다.
다만 그 유연함은 원칙이 아니라 권력에 반응한다.

강한 사람에게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약한 사람에게는 “규정상 안 됩니다.”


이 선택적 엄격함이, 규정 인간을 비열하게 만든다.

규정이 공정의 도구가 아니라 서열의 도구가 되는 순간이다.

조직 내부에서도 비슷하다.

호모 리갈란스는 문제가 생기면 해결보다 ‘규정 준수’를 먼저 확인한다.
왜냐하면 규정 준수는 책임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보험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그는 말한다.


“규정대로 했습니다.”


여기서 규정은 윤리가 아니라 면책이다. 그는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다. 과정만 책임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과로 다친다. 절차가 완벽해도 피해가 발생한다면, 그 절차는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호모 리갈란스는 그 질문을 싫어한다. 질문은 책임을 부르니까.


나는 이 인간형을 따로 불러야 했다.
규정은 사회를 지키는 장치이지만, 규정만으로는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다.
규정은 최소한이고, 판단은 그 위에 쌓이는 것이다. 판단 없는 규정은 공정이 아니라 냉담이 된다.

당신이 오늘 만난 “규정”은 누구를 지켰나. 약자를 지켰나, 아니면 규정 뒤에 숨은 사람을 지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