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로 포장된 판결

우리는 얼굴로 사람을 읽는다

by NaeilRnC

위의 사진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것을 가져왔다. 보통 외모평가는 예의의 형태로 들어오는데 이 사진에서는 노골적으로 한쪽을 폄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실, 정말 잘생긴 사람 앞에서는 아무말도 할 수 없다.


“인상이 좋네요.”, “착하게 생기셨어요.” 이런 말들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첫 문장부터 결론을 써버리는 방식이다. 얼굴을 보고 성격을 상상하고, 성격을 보고 삶을 추정한다. 한 번의 눈길로 한 사람의 요약본을 만든다. 지름길이다. 그리고 지름길은 늘 편리하다. 대신 비용을 숨긴다. 그 비용은 대개 “편견”이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청구된다.


사실 사람들은 외모 평가가 “개인 취향”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취향이면 안전하니까. “그냥 내 취향이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사회적 책임을 피해간다. 하지만 외모 평가는 취향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모 평가는 사람을 분류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분류는 언제나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를 밀어낸다.


외모 평가의 첫 엔진은 손다이크(Edward L. Thorndike, 1920)가 말한 그 유명한 오류 후광효과(halo effect)다. 전반적 인상이 개별 평가를 끌고 다닌다. 얼굴이 좋아 보이면 성격도 좋아 보이고, 성격이 좋아 보이면 능력도 좋아 보인다. 반대로 얼굴이 마음에 안 들면, 그 뒤에 붙는 건 “성격 문제”가 된다.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얼굴에서 먼저 결론을 만든다. 그 다음 대화는 “알아보기”가 아니라 “확인하기”가 된다.


후광효과가 무서운 이유는, 그게 “나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사람은 원래 복잡한 정보를 싫어한다. 평가를 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평가를 빨리 끝내고 싶어서 후광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외모 평가는 악의가 아니라 시간 절약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그 절약된 시간이 결국 누군가의 삶에서 비용이 된다는 점이다.


그 다음은 기준이다. 외모는 애초에 애매하다. “호감형”이라는 말에는 정의가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애매한 건 불안을 낳고, 불안은 기준을 만든다. 셰리프(Muzafer Sherif, 1935)가 보여준 건 바로 그 과정이다. 사람들은 불명확한 상황에서 서로의 반응을 참고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참고가 준거점(reference points)이 된다.


기준은 위에서 내려오는 규칙만이 아니다. 아래에서 서로 눈치를 보다가 만들어지는 합의도 있다. 외모 규범은 그런 방식으로 커진다. 그리고 그 준거점이 반복될수록, 취향은 규범으로 바뀐다.

외모 평가는 자주 이런 모양이다. 처음엔 “그냥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원래 그런 것”이 된다. 기준이 생기면 사람들은 기준을 따라간다. 따라가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 따라가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애쉬(Solomon E. Asch, 1955)가 등장한다. 동조(conformity)는 바보가 하는 게 아니라 눈치 빠른 사람이 하는 것이다. 모두가 예쁘다고 말하는 자리에서 “난 아닌데”라고 말하는 건 관계 비용이 든다. 모두가 별로라고 말할 때 “난 괜찮은데”라고 말하는 건 분위기 비용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심이 아니라 안전한 말을 고른다. 외모 평가는 취향이 아니라 공기다. 공기 속에서는 사실보다 표정이 강하다.


동조는 “악한 집단”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무난한’ 집단에서 더 세게 작동한다. 왜냐하면 무난한 집단일수록 갈등을 싫어하고, 갈등을 싫어할수록 판단은 공통분모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외모 규범이 강해지는 순간은 대개 바로 그 “무난함” 속에서 온다.


외모 평가가 더 잔인해지는 지점은 비교다. 페스팅거(Leon Festinger, 1954)가 말한 사회비교(social comparison)는 사람의 기본 기능에 가깝다. 사람은 자신을 평가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외모에는 객관적 잣대가 없다는 점이다. 잣대가 없으면 사람은 비교로 잣대를 만든다. 비교가 시작되면 얼굴은 얼굴이 아니라 점수가 된다. 점수가 되면 사람은 얼굴을 보지 않는다. 위치를 본다.


외모는 혼자 있을 때는 얼굴이다. 그러나 비교가 시작되는 순간 서열이 된다. 서열이 되는 순간부터 외모 평가는 타인을 평가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실은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행위로 바뀐다. 남의 얼굴을 평하는 말은 종종 내 얼굴을 재채점하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비교와 평가가 결국 어디로 들어오냐면, 쿨리(Charles H. Cooley, 1902)가 말한 거울 속 자아(looking-glass self)로 들어온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상상하고, 그 상상된 판단에 따라 수치심이나 자부심 같은 감정을 만든다. 그 감정이 행동을 바꾼다. 외모 평가는 그래서 남의 말로 끝나지 않는다. 내 안의 규칙이 된다.


“착하게 생겼다”는 말이 서늘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말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역할을 요구한다. “너는 착해야 한다.” 외모 평가는 얼굴을 설명하는 척하면서, 행동의 범위를 좁힌다. 한 번 붙은 역할은 오래 간다. 역할이 오래 가면, 사람은 스스로도 그 역할에 맞춰 산다. 결국 외모 평가는 타인의 평가가 아니라 자기 조정이 된다.


여기서 고프만(Erving Goffman, 1959)은 한 번 더 칼을 넣는다. 사람들은 말보다 단서를 믿는다. 고프만이 말한 주어진 표현(expressions given)새어 나오는 표현(expressions given off)의 차이다. 우리는 상대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걸 듣기보다, 표정·자세·얼굴 같은 ‘새는 것’을 더 진짜로 취급한다.


얼굴은 그 ‘새는 것’의 왕이다. 그래서 외모는 해명보다 빠르다. 빠른 것은 이긴다. 사람을 설명하는 말보다, 사람을 심판하는 얼굴이 먼저 도착한다. 외모 평가는 대화를 여는 방식이 아니라, 대화를 닫는 방식이 된다. 상대가 자기 서사를 꺼내기도 전에 얼굴이 먼저 결론을 낸다. 그 결론이 대화의 천장을 만든다. 우리는 천장 아래에서만 말한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62)가 말하는 몸은 세계를 경험하는 매체다. 그래서 외모 평가는 “보는 문제”가 아니라 “사는 문제”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시선은 생각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선은 몸의 습관이 된다. 습관은 결국 삶의 리듬이 된다. 외모 평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몸을 바꾼다.


그래서 외모 평가를 오래 받은 사람은 얼굴을 고치기 전에 먼저 몸을 조정한다. 웃는 각도를 조정하고, 말의 속도를 조정하고, 시선을 피하는 타이밍을 조정한다. 이렇게 조정된 몸은 다시 성격처럼 보인다. 결국 외모 평가는 얼굴을 평가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의 생활을 수정하는 과정이 된다. 정리하면 외모 평가는 이렇게 확장된다.


정리하면 외모 평가는 이렇게 확장된다. 후광효과로 빠르게 결론을 만들고, 준거점으로 기준을 굳히고, 동조로 사람의 말을 맞추게 만들고, 사회비교로 얼굴을 점수로 만들고, 거울 속 자아로 그 점수가 내면의 규칙이 되고, 주어진 표현과 새어 나오는 표현의 틈에서 얼굴이 먼저 판결을 내리면, 결국 몸은 그 판결에 맞춰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외모 평가를 하지 않겠다” 같은 선언을 믿지 않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본다.

다만 실천 하나는 가능하다고 본다. 내가 누군가를 “인상 좋다/나쁘다”로 끝내려는 순간,

그 판단을 10초만 늦추는 것이다. 10초 동안 이 문장만 떠올린다.

내가 지금 본 건 얼굴이지, 그 사람의 삶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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