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관계를 관리하는 인간
호모 릴레이셔난스는 relation (관계)에서 따온 말로, 사람을 좋아해서 관계를 맺기보다 관계를 “유지·운영”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감정을 관리 업무처럼 처리하는 인간을 뜻한다.
Homo relationans /ˈhoʊmoʊ rɪˈleɪʃənænz/ 는 그 인간형의 이름이다.
외로움이 오래가면, 사람은 두 갈래 중 하나를 택한다. 하나는 기분을 조정하는 것이다. 버튼을 누르고, 결제하고, 공백을 덮는다. 다른 하나는 관계를 붙잡는 것이다. 그런데 붙잡는 방식이 문제다.
호모 릴레이셔난스는 관계를 ‘느끼는 것’으로 붙잡지 않는다. 관계를 관리로 붙잡는다.
따뜻함이 아니라 끊김을 막는 방식으로, 감정이 아니라 일정으로.
관계는 원래 흐른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뜨거워졌다가 식고,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문제는 관계가 흐르는 게 아니라, 관리 항목이 되는 순간이다.
호모 릴레이셔난스에게 사람은 ‘마음’이 아니라 ‘리스트’로 남는다.
연락해야 할 사람, 챙겨야 할 사람, 잊지 말아야 할 사람, 그리고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할 사람.
그는 누군가를 떠올릴 때 먼저 묻는다.
“마지막 연락이 언제였지?”
“이번 주 안에 한 번은 해야 해.”
“이 관계는 유지 비용이 얼마나 들지?”
그에게 관계는 살아 있는 감정이 아니라 ‘관리해야 끊기지 않는 연결’이 된다. 그래서 관계는 점점 체크리스트가 된다.
생일 축하 메시지 보내기.
명절 안부 전화하기.
결혼 소식에 리액션 남기기.
좋아요 눌러서 존재감 확인하기.
가끔 만남으로 ‘정상 작동’ 점검하기.
그는 성실하다. 오히려 성실해서 문제가 된다. 성실함이 관계를 따뜻하게 만들지 않고, 관계를 “운영”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호모 릴레이셔난스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
“연락 못 해서 미안, 너무 바빴어.”
“우리 조만간 한 번 보자.”
“요즘 관계 관리가 제일 어렵다.”
말은 정중하다. 하지만 그 정중함 속에는 어떤 결핍이 숨어 있다. 그는 상대를 보고 싶어서 연락하는 게 아니라, 연락하지 않으면 관계가 ‘불량’이 될 것 같아서 연락한다.
전형적인 장면은 이렇다.
누군가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연락을 한다.
“잘 지내?”
“요즘 어때?”
대화는 시작되지만, 깊어지지 않는다. 깊어지려면 마음이 필요하고, 마음은 시간을 요구한다.
시간이 들면 관계는 관리가 아니라 경험이 된다. 호모 릴레이셔난스는 그 지점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는 대화를 적당히 정리한다. 너무 길면 부담이고, 너무 깊으면 책임이 생긴다.
그는 관계의 온도를 유지하려 하지만, 관계는 온도로 유지되지 않는다. 관계는 함께 겪은 시간과, 함께 남긴 감정으로 유지된다. 관리만 남으면, 관계는 얇아진다. 얇아진 관계는 쉽게 깨진다. 깨지지 않더라도, ‘끊기지 않는 것’만 남는다. 그때의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니라, 연락처와 연락처 사이에 가깝다.
호모 릴레이셔난스는 관계에서 자주 피곤하다. 왜냐하면 그는 감정을 느끼는 대신, 감정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처리할수록 감정은 줄어들고, 줄어들수록 관리가 늘어난다.
나는 이 인간유형을 따로 불러야 했다. 관계를 유지하는 건 미덕일 수 있다.
하지만 관계가 관리만 되기 시작하면,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시스템이 된다.
당신이 요즘 유지하고 있는 관계는 무엇인가. 그 관계는 당신을 따뜻하게 하고 있나. 아니면 당신이 끊기지 않게만 만들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