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는 공허를 낳고, 불안은 분노를 낳는다
사람들은 평화로운 시대를 좋은 시대라고 말한다.
전쟁이 없고, 굶주림이 줄어들고, 사회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며, 내일이 오늘보다 크게 위협적이지 않은 시대. 그런 시대는 분명 역사적으로 보면 축복에 가까운 조건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를 조금만 길게 바라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은 언제나 불안할 때만 이상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평온하고 안정된 시대에 사람은 종종 더 기묘한 것에 끌린다. 합리적인 제도와 평범한 일상보다, 더 강한 세계관과 더 극적인 서사를 향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이 생긴다.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은 바로 그 역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95년 3월 20일 도쿄 지하철에서 발생한 사린가스 테러는 일본 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물론 사실관계를 정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일본 경제는 이미 버블경제 붕괴 이후의 국면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옴진리교가 성장하고 세력을 확장한 토양은 1980년대 후반 일본 사회가 경험한 풍요와 소비문화,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허무와 방향 상실 속에 있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집단의 구성이다. 옴진리교는 단지 사회의 가장 주변부에 있던 사람들만 끌어들인 것이 아니었다. 도쿄대, 와세다대 같은 명문대 출신 청년들, 과학기술을 공부한 엘리트 학생들,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던 이들까지 그 집단에 들어갔다. 이것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인간은 생존의 위협이 줄어든 시대에 오히려 더 강한 사상과 더 극단적인 세계관에 끌리기도 하는가.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인간을 단순히 생존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로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인간은 살아남고 나면 곧바로 다른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존재다.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인간은 이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보다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시작한다.
로널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 1977)는 『The Silent Revolution』(『조용한 혁명』)에서 바로 이 변화를 설명한다. 잉글하트는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의 가치체계가 변화한다고 보았다. 결핍과 불안 속에서 살아온 세대는 경제적 안정과 물리적 안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그러나 성장기부터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살아온 세대는 점차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삶의 의미, 자기표현, 정체성, 참여, 자율성 같은 가치가 점점 더 앞에 나타난다.
문제는 사회가 이 새로운 질문에 충분한 답을 제공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경제는 성장했고 소비는 넘치는데, 정작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빈약할 때가 있다. 회사는 월급을 주지만 삶의 의미를 주지는 않는다. 학교는 자격을 주지만 존재의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소비는 즐거움을 주지만 방향을 주지는 않는다. 바로 그때 어떤 집단은 훨씬 더 강력한 문장으로 인간을 유혹한다. “너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다.” “이 세계는 거짓이며 우리만이 진실을 안다.” “너는 선택된 사람이며 더 큰 사명을 위해 부름받았다.” 옴진리교가 제공한 것은 단순한 종교 교리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총체적인 의미 체계였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 1897)은 『Suicide』(『자살론』)에서 인간이 단지 자유를 많이 가진다고 해서 안정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뒤르켐이 말한 핵심 개념은 아노미(anomie)다. 아노미란 인간의 욕망과 행동을 조절해 주던 사회적 규범이 약해지고 삶의 방향을 잃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전쟁이나 극심한 빈곤의 시대에는 삶의 목표가 비교적 단순하다. 살아남고 가족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에는 외부의 위협이 줄어드는 대신 삶의 기준을 개인이 스스로 세워야 하는 부담이 커진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기준이 약해질수록 인간은 오히려 더 큰 공허를 경험한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느슨한 자유보다 훨씬 더 강한 질서를 가진 세계를 찾기 시작한다. 절대적 진리, 엄격한 수행, 폐쇄적 공동체, 지도자에 대한 복종 같은 것들이 그 공백을 채우는 장치가 된다. 옴진리교가 수행, 종말론, 선택된 공동체 의식, 절대적 지도자 권위를 결합해 하나의 완결된 세계를 만들었다는 점은 바로 이런 구조와 맞닿아 있다.
스티븐 하이네(Steven J. Heine), 트래비스 프룰루(Travis Proulx), 캐슬린 보스(Kathleen D. Vohs, 2006)는 「Meaning Maintenance Model」(「의미 유지 모형」)에서 인간이 세계를 이해 가능한 질서로 유지하려는 욕구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단순히 사건을 경험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사건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싶어 하는 존재다. 그래서 기존의 의미 체계가 흔들리면 사람은 다른 영역에서라도 더 강한 의미 체계를 찾으려 한다.
평화로운 시대는 고통이 적은 시대일 수는 있지만 동시에 서사가 약한 시대이기도 하다. 전쟁과 위기의 시대에는 공동체적 드라마가 존재한다. 위험과 희생, 책임과 연대라는 분명한 이야기들이 삶을 관통한다. 그러나 평온한 시대의 일상은 종종 반복적이고 단조롭다. 출근하고, 성과를 내고, 소비하고, 쉬고, 다시 반복하는 삶 속에서 인간은 문득 묻는다. 이렇게 사는 것이 전부인가. 그 질문 앞에서 종말론, 음모론, 계시, 선택된 공동체 같은 이야기는 단순한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훨씬 강한 의미 구조로 작동한다.
아리 크루글란스키(Arie W. Kruglanski, 2015)는 「Significance Quest Theory」(「중요성 추구 이론」)에서 인간이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단지 편안하게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며 더 큰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평화로운 사회는 많은 사람에게 안정은 제공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쉽게 익명의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그때 “너는 선택된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는 단순한 위로를 넘어 강력한 유혹이 된다. 옴진리교는 신도들에게 단순한 위안을 준 것이 아니라 특별한 존재라는 감각을 제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현상이 일본에서 나타난 방식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는 점이다. 일본은 경제적 풍요의 정점에서 공허를 경험한 사회였다. 반면 한국은 압축 성장 이후에도 안정된 풍요의 시대를 충분히 경험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한국 사회의 정서는 오히려 불안과 경쟁, 그리고 피로에 더 가깝다.
로버트 K. 머턴(Robert K. Merton, 1938)은 「Social Structure and Anomie」(「사회구조와 아노미」)에서 사회가 사람들에게 성공의 목표는 강하게 요구하면서도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을 충분히 제공하지 않을 때 긴장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한국 사회는 이 구조와 상당히 닮아 있다. 사회는 끊임없이 성공을 요구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안정된 삶, 내 집 마련, 자기관리와 성취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여기에 테드 로버트 거(Ted Robert Gurr, 1970)가 『Why Men Rebel』(『인간은 왜 반항하는가』)에서 설명한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이 더해진다. 인간은 단순히 가난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했던 삶과 실제 삶 사이의 간극에서 분노한다. 한국 사회는 빠른 성장 속에서 “노력하면 올라갈 수 있다”는 약속을 너무 강하게 학습한 사회다. 그러나 성장 속도가 둔화되고 자산 격차와 세대 격차가 커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큰 박탈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이 풍요 속에서 공허를 만났다면, 한국은 불안 속에서 분노를 키워온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의 옴진리교는 풍요의 공허 속에서 등장한 의미 과잉의 현상이었다면, 한국 사회의 많은 갈등과 정서는 박탈감과 불안 속에서 축적된 분노의 결과에 가깝다.
결국 인간은 평화만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안전해지면 곧바로 의미를 찾고, 의미가 부족하면 더 강한 의미를 찾으며, 안정이 반복되면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묻게 된다. 평화로운 시대는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인간 내부의 공허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사회가 진짜로 건강한 사회인지 판단하려면 단순히 경제성장이나 치안만을 볼 수는 없다. 그 사회가 사람들에게 건강한 의미와 건강한 소속, 그리고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감각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 통로가 막히면 인간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이상한 것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평화로운 시대의 인간은 단순히 평온한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그는 가장 위험한 질문을 던질 준비가 된 인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