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위생의 결함으로 번역하는 무례한 사회
“저소득일수록 몸이 청결하지 못하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무례하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이건 무례한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위험하다. 가난을 청결의 결함으로 낙인찍고,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수준 문제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이다.
수영장 물이 자꾸 더러워졌다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시설 관리를 더 정교하게 하고, 위생 안내를 더 정확하게 하고, 이용 규칙을 더 분명히 고지하면 된다. 그런데 그걸 넘어 갑자기 “저소득층”이라는 집단을 호출하는 순간, 문제는 위생이 아니라 차별이 된다. 물이 더러워졌다는 현상을 설명하면서 왜 특정 소득집단 전체를 불결함의 원인처럼 묶어버리지?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문장을 쓴 사람의 머릿속에는 처음부터 “청결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상이 있었고, 거기에 “저소득층”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다고 보는 편이 맞다. 저 문장은 사실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편견을 번역한 문장에 가깝다.
더구나 그 문장에는 기묘한 자기면죄부까지 숨어 있다. 수영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저소득”과 “불결”의 낙인을 붙이는 순간, 그들을 가르치는 강사나 시설 운영자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위치의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고매함이 아니라 수준이다.
위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소득계층을 끌어다 붙이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무지한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말이 완전히 근거 없는 망상만은 아니라는 데 있다. 실제 연구에서는 소득 수준과 위생 관련 행동 사이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보고된 바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박종배 외(2016)의 연구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칫솔질 빈도와 치실·치간칫솔 같은 보조 구강위생용품 사용이 더 높다고 보고했다. Wang 외(2024)의 연구 역시 가구소득이 높을수록 치실 사용 비율이 유의하게 높다고 보고했다. 즉 “소득과 위생행동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선을 그어야 한다.
연구가 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은 더럽다”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조건이 위생행동과 위생 유지 능력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앞의 문장은 낙인이고, 뒤의 문장은 분석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깨끗함을 유지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샤워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주거환경, 세탁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위생용품을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 건강정보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 수준, 그리고 몸을 관리할 만큼 덜 지친 상태.
이런 것들은 모두 청결을 유지하는 조건들이다. 즉 깨끗함은 단순히 비누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 돈과 지식, 피로와 환경의 문제이기도 하다.
건강 불평등 연구의 대표 학자인 마이클 마못(Michael Marmot, 2005)은 「Social Determinants of Health Inequalities」(건강 불평등의 사회적 결정요인)에서 건강 격차가 사회 전체의 계층 구조를 따라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의 핵심은 분명하다. 건강의 차이는 개인의 선택 이전에 사회적 조건에서 먼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위생 역시 개인의 도덕성보다 사회적 위치와 자원의 차이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Distinction』(구별짓기)에서 더 날카로운 말을 남겼다. 그는 몸을 계급 취향이 가장 분명하게 물질화된 장소라고 보았다. 이 말은 단지 멋진 표현이 아니다. 몸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무엇을 먹는가, 어떻게 입는가, 어떤 냄새를 풍기는가, 어떤 자세로 사는가가 모두 사회적 자원과 교육, 환경의 차이를 반영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계급은 몸에도 새겨진다.
그렇다면 어떤 몸을 보고 “저 사람은 성실하다”, “저 사람은 지저분하다”고 판단하는 일은, 사실상 그 사람의 도덕을 읽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놓인 사회적 조건을 보고도 그것을 도덕으로 오해하는 행위일 수 있다.
이건 통찰이 아니라 오판이다. 역사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19세기 산업혁명 시기 상류층은 노동자들을 향해 “게으르고 더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공중보건의 발전이 보여준 것은 전혀 다른 사실이었다. 문제는 노동자의 성격이 아니라 도시의 하수도, 상수도, 주거환경, 공중위생 시스템이었다. 하수도가 놓이고 상수도가 공급되자 도시 위생 수준은 달라졌다. 사람의 도덕이 갑자기 개선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바뀐 것이었다. 그러니 “저소득층일수록 청결하지 못하다”는 말은 현상을 거칠게 오독한 편견이다.
저소득층일수록 청결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에 놓이기 쉽다. 그리고 그 차이는 개인의 성실성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위생이 아니라 질문의 문제다.
“왜 어떤 사람들은 몸을 깨끗하게 관리하지 않을까.”
"왜 어떤 사람들은 깨끗하게 살 조건이 더 쉽게 주어지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조건조차 비용이 되는가"
청결은 종종 개인의 습관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사회가 자원을 어떻게 나누고, 어떤 삶에는 여유를 주고, 어떤 삶에는 피로만 남기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청결을 도덕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구조를 보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수영장 물이 더러워졌을 때 필요한 것은 저소득층에 대한 모욕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정확한 관리와 정직한 언어다. 가난을 불결함으로 번역하는 사회는 결국 청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견의 수준을 드러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