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은 왜 누군가의 죄가 되는가

욕망이 아니라 심판의 문제

by NaeilRnC

간통죄가 사라진 뒤 세상이 더 타락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그 전까지는 다들 점잖게 살았고, 법이 없어지자마자 욕망이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늘 우습다.

세상이 갑자기 타락한 게 아니다. 원래 더러웠는데, 이제 덜 숨겨질 뿐이다. 불륜은 새로 생긴 문제가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만 봐도 그렇다. 제우스는 수없이 외도했지만, 정작 분노와 처벌은 늘 상대 여성에게 향했다. 욕망은 둘이 함께 만들었는데, 수치는 늘 한쪽의 몫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을 중심에 놓고 싶다.


불륜은 남녀의 상열지사였지만, 처벌은 항상 여성에게 집중되어 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84)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일부일처제가 사랑의 제도라기보다 재산과 혈통을 안정적으로 상속하기 위한 장치라고 보았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유재산이 발생하면서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확실히 ‘자기 혈통’에게 물려주길 원했고, 그때부터 여성의 성적 자유를 강하게 통제할 필요가 생겼다. 일부일처제는 낭만의 산물이 아니라 상속 질서를 위한 제도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서 이미 이중 잣대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일부일처제 아래에서도 남성의 외도는 일정하게 용인되거나 묵인되었지만, 여성의 외도는 훨씬 더 엄격한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고 보았다. 욕망은 둘의 것이었지만, 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규정된 쪽은 대체로 여성 쪽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신라와 고려를 봐도, 관계 자체가 지금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신라는 골품제와 왕실 혼맥 유지라는 특수한 구조 속에서 오늘날 기준으로는 금기처럼 보이는 혼인 양상도 존재했고, 고려는 첩 제도와 재혼, 여성의 재산 상속 등에서 조선보다 훨씬 유연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기준으로 과거를 곧바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 가지 흐름은 분명하다. 유교적 정숙 규범이 강화될수록, 관계의 도덕적 책임과 수치의 부담은 점점 더 여성에게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간통죄 역시 겉으로는 남녀를 함께 처벌하는 제도였지만, 실제 사회적 낙인과 삶의 파괴는 여성에게 훨씬 더 가혹하게 작동해 왔다. 법은 양쪽을 같이 적어 놓았지만, 사회는 결코 양쪽을 같은 무게로 심판하지 않았다.


이게 핵심이다. 남자는 바람을 피우면 "원래 좀 그런 인간"이 되고, 여자는 바람을 피우면 "원래 그런 여자"가 된다. 남성의 외도는 행위로 끝나지만, 여성의 외도는 인격이 된다. 여기에는 언제나 남성 중심사회의 위선이 숨어 있다. 욕망 자체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욕망을 가진 여성을 더 미워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76)는 『성의 역사 1: 지식의 의지』에서 성이 단순히 억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학, 법, 교육, 종교를 통해 끊임없이 말해지고 분류되고 관리되어 왔다고 보았다. 즉 성은 침묵의 대상이 아니라 통제의 대상이었다. 누가 정상인지, 누가 비정상인지, 어떤 관계가 용인되고 어떤 관계가 처벌받는지를 결정하는 기준 자체가 곧 권력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륜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 문제가 아니다. 그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욕망을 어떻게 다르게 심판하는가의 문제다. 여기서 사람들은 또 하나의 착각을 한다. 간통죄가 사라졌기 때문에 세상이 더 문란해졌다고.


하지만 2015년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해서 그전에는 외도가 없었고 그 후에 갑자기 늘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다. 과거에도 외도는 이미 널리 존재했지만, 형사처벌이 가능했던 탓에 더 깊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고, 지금은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이나 이른바 상간 소송, 디지털 기록, 메신저와 커뮤니티를 통해 훨씬 자주 가시화되고 있을 뿐이다.


즉 달라진 것은 욕망의 총량이 아니라 노출의 방식이다. 과거에는 잘 안 걸렸고, 걸려도 더 자주 덮였다.

동네가 좁았고, 집안의 체면이 중요했고, 수치는 수치대로 안에서 묻는 것이 질서처럼 여겨졌다.


지금은 다르다. 휴대폰이 있고, 메신저가 있고, CCTV가 있고, 커뮤니티가 있다. 숨기기 어려워졌고, 한 번 드러나면 금세 퍼진다. 예전 같으면 마을 안에서만 돌다 사라졌을 이야기가, 이제는 전국 단위의 구경거리가 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착각한다. 요즘 들어 불륜이 갑자기 많아진 것 같다고.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예전에도 심했다. 지금은 다만 더 자주 들키고, 더 이상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뿐이다.

아침부터 글감을 찾으려고 커뮤니티를 보다가, 믿기 어려운 ‘레전드 불륜설’을 보게 됐다. 아내가 남동생과, 시아버지와 얽혀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내가 살던 고향마을에서는 저 정도의 뒤틀린 관계가 아주 낯선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동네에는 시동생과의 관계를 빌미로 며느리를 협박해 자신과의 관계를 강요했던 시아버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더 이상 상열지사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건 불륜을 넘어, 욕망이 권력과 결합한 구조다. 더 정확히는 위계와 침묵, 가족 내부의 권력관계가 한 사람을 압박하는 구조다. 그래서 더 무섭다.


불륜은 흔히 사랑의 일탈처럼 소비되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생각보다 자주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욕망이 있고, 체면이 있고, 침묵이 있고, 권력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잘 숨겨진다.

영화 속 불륜은 대개 두 사람의 감정으로 정리된다. 현실의 불륜은 그렇지 않다.


가족이 얽히고, 돈이 얽히고, 체면이 얽히고, 권력이 얽힌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배신보다 침묵이 더 오래가고, 욕망보다 공모가 더 깊다. 나는 그래서 불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자체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먼저 보게 된다.


왜 아무도 막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오래 숨길 수 있었을까. 왜 어떤 관계는 너무 쉽게 무너지고, 어떤 공동체는 그 무너짐을 이상할 정도로 오래 방치할까.


결국 불륜은 개인의 도덕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건 한 사회가 욕망을 어떻게 숨기고, 체면을 어떻게 관리하고, 권력을 어떻게 눈감아 주는지를 보여주는 창에 더 가깝다. 그래서 “요즘 세상이 문제다”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세상이 타락해서 불륜이 많아진 게 아니다. 우리가 더 이상 덜 숨기고, 덜 덮고, 덜 참게 된 것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나아졌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다. 이제는 더 잘 보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전보다 더 분명하게 알게 된 것뿐이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심각하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불륜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욕망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꿔야 할 것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욕망을 심판하는 방식이다. 똑같이 둘이 만든 관계를 언제까지 여자만 더 깊게 망가지는 방식으로 끝낼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여전히 머뭇거린다면, 간통죄가 사라진 뒤 문란해진 게 아니라 우리가 아직도 너무 오래된 방식으로 욕망을 재판하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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