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구와 멧돼지

동정과 배제의 거리

by NaeilRnC

인간에게 맹수는 위협적인 존재다. 얼마 전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도 마찬가지다. 늑대는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로서 충분히 잠재적 위험을 지닌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늑대는 이슈가 되었고, 생포되었고, 끝내 유명해졌다. 왜 그럴까?


나는 언젠가 문명화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동물원은 단순히 동물을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생명을 보호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으며, 관리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공간처럼 보인다고 썼다. 보호는 늘 선한 말처럼 들리지만, 보호를 선언하는 순간 결정권은 보호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인간은 무엇이 위험한지, 누가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지, 어떤 생명이 관리 가능한지를 함께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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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늑구 이야기는 단순한 탈출 소동이 아니다. 이건 인간이 어떤 생명을 살리고, 어떤 생명을 멈추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같은 맹수라도 멧돼지는 실제로 도심에 출몰해 사람을 다치게 하는 현실적 위험이다. 그래서 발견되면 대부분 사살된다. 비슷한 사례로 오월드를 탈출했던 퓨마 ‘뽀롱이’ 역시 사살되었다. 그런데 늑구는 달랐다. 늑구는 살아 돌아왔다. 같은 맹수고, 같은 탈출인데 왜 결과는 달랐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스토리텔링이다.

늑구는 동물원을 탈출했고, 쫓겼고, 살아남았다. 이건 하나의 이야기다. 서사가 있고, 추적이 있고, 결말이 있다. 반면 멧돼지는 출몰하고, 위협하고, 사고를 만든다. 이건 이야기라기보다 사건이다. 사건은 처리의 대상이지만, 이야기는 소비의 대상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늑구에게는 이름이 붙었다는 점이다.


'늑구'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그 맹수는 단순한 늑대가 아니라 캐릭터가 된다. 캐릭터는 감정을 부르고, 감정은 보호 본능을 부른다. 사람들은 맹수를 보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캐릭터가 된 맹수는 보호하려 든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왜 뽀롱이는 사살되어야 했을까.

늑구 이전에도 오월드를 탈출한 동물이 있었다. 퓨마 ‘뽀롱이’다. 늑구는 자발적으로 탈출했고, 뽀롱이는 사육사의 실수로 탈출했다. 뽀롱이는 마취총을 맞았지만 쓰러지지 않았고, 인근 야산으로 도주했다. 관계 당국은 맹수라는 점을 고려해 사살을 결정했다. 반면 늑구는 처음부터 생포를 전제로 추격이 이루어졌다. 같은 탈출인데 결과는 달랐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친근함을 말한다. 늑대는 개와 닮았고, 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익숙한 동물 중 하나다. 그래서 늑구는 낯선 맹수가 아니라 익숙한 존재의 연장선처럼 인식된다. 반면 퓨마는 다르다. 익숙하지 않고, 경험적으로도 접점이 없고, 이미지로도 멀다. 그러니 퓨마는 이야기보다 먼저 위협으로 읽힌다.


하지만 친근함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핵심은 친근함이 아니라 거리다.

멧돼지를 보면 이게 더 분명해진다. 멧돼지는 퓨마처럼 낯선 존재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가깝다. 산이 있는 도시라면 언제든 내려올 수 있고, 실제로 사람을 다치게 하는 사고도 벌어진다. 멧돼지가 도심에 출몰하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을 말살하러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찾아 내려온다. 그러나 멧돼지는 인간에게 즉각적인 위협이 된다. 그래서 멧돼지는 발견되면 사살된다.


여기서 기준이 드러난다. 우리는 동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 동물이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통제 가능하며, 얼마나 위험한지를 판단한다. 그런 관점에서 늑구는 멀리 있었다. 이름이 붙어 있었고, 이야기화되었고, 무엇보다 위험이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뽀롱이는 통제에 실패했다. 행방이 불확실했고, 위험이 예측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제거되었다.

멧돼지는 항상 가깝다. 너무 가까워서 사건이 되고, 너무 가까워서 즉각적인 공포를 부른다. 그래서 사살된다.

결국 차이는 하나다. 생명의 가치가 아니라 위험의 거리다.


이 지점에서 문명화의 문제가 다시 살아난다. 문명화는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세계를 기록하고 분류하고 표준화해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체계에 가깝다. 이름 붙이기, 분류하기, 경계 세우기, 기록하기. 이 모든 과정은 세계를 정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기술이다.


문명화된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잔인함 그 자체가 아니라, 애매하고 예측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문명은 그런 것들을 견디는 대신 분류하고, 교정하고, 격리하고, 필요하면 제거해왔다.


이 기준으로 보면 늑구와 멧돼지의 차이도 더 선명해진다.

늑구는 이름이 붙은 생명이다. 이야기가 있는 생명이고, 전시 가능했던 생명이며, 다시 관리 가능한 생명으로 회수될 수 있다고 믿어진 존재다. 하지만 멧돼지는 다르다. 이름도 없고, 개체성도 없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위험의 범주다. 범주는 보호되지 않는다. 범주는 관리된다. 필요하면 제거된다. 늑구는 캐릭터지만 멧돼지는 문제 개체다. 캐릭터는 동정받고, 문제 개체는 사살된다. 이게 바로 문명화된 인간의 시선이다.


동물원은 흔히 보호의 공간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동물들이 먼저 보호를 요청해서 동물원에 들어왔을 리는 없다. 따라서 그들이 받는 보호는 수동적이며, 그 보호는 종종 통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인간은 “우리는 이 생명을 살릴 수도, 멈출 수도 있다”는 권한을 보호라는 이름으로 행사한다. 보호는 면허가 되고, 통제는 선의로 포장된다. 늑구 사건은 바로 그 통제의 균열이었다. 전시 가능하고 관리 가능했던 생명이 울타리 밖으로 나간 순간, 인간은 다시 선택해야 했다. 이 생명을 살릴 것인가. 멈출 것인가.


그리고 그 선택은 동물의 본질에 따라 내려지지 않았다. 인간이 느끼는 거리, 위험, 통제 가능성, 감정의 배치에 따라 내려졌다. 그래서 늑구와 멧돼지의 차이는 동물의 차이가 아니다. 인간의 차이다.


우리는 같은 생명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위치에서 생명을 보고 있는 것이다.

멀리 있고, 이름이 붙고, 이야기로 소비될 수 있는 생명은 동정한다. 가깝고, 익명이고, 반복적으로 위협이 되는 생명은 배제한다.


그래서 늑구는 동정받고, 멧돼지는 사살된다. 자연의 상테에서 인간은 생명을 존중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문명화된 사회에서 인간은 더더욱 생명을 존중하는 존재라기보다, 위험을 관리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정말 생명을 존중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에게서 멀리 있고, 통제 가능하며, 이야기로 소비 가능한 생명만 존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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