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리스트는 악마인가?
<카밀라 샴지 – 홈 파이어를 읽고>
직업적 특성으로 인해, 매일 울산 시내를 배회하며 다양한 분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경찰, 소방관, 각 지자체의 공무원은 일상, 한번쯤 말 섞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못해도 한 달에 수십여 가지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만나는 이들은 단연, 빨간 띠를 머리에 두른 노조원들이다. 온갖 종류의 공장이 밀집한 울산의 특성상, 타지에서 일하는 동종업계 종사자들보다 노조원들을 만날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올해 정도를 제외하면, 일 년 중 가장 바쁜 시기는 단연 대기업 노조의 파업 시즌일 거다.
파업 현장의 가장 큰 특징은 눈에 잘 띈다는 거다. 몇 차선을 잡아먹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빨간 띠를 두르고, 빨간 조끼를 입고(색깔은 각 노조마다 다르지만,,,) “재벌 독재 타도” 같은 문구를 궁서체로 프린팅 해 놓은 깃발을 흔든다. 승합차에 확성기를 달고, 엄청나게 큰 소리로 노동가를 틀어놓음으로써 시선을 강탈한다. 지나가던 이들은 이로 인해 (관심이 있어서 건, 불편을 겪어서 건 간에) 집회 현장을 한 번이라도 더 쳐다본다. 그래서 노동 운동가들은 아직도 집회를 기획하고, 현장에서 소리쳐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라는 메시지를 부르짖는다. 모든 노조원이 이 같은 소위 빨간 머리띠 전략에 동의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런 전통적인 노동 운동 방법론은 2020년에도 이어지고 있다.
‘홈 파이어’를 읽는 내내 파업 현장이 떠올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책을 관통하는 주제인 ‘서구사회 무슬림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서 오늘날에도 인권을 보호받지 못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교집합의 첫 번째 지점은, 이들이 사회적 소수자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 두 번째는 그들이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방법론에 폭력이 내포되어있다는 거다. 노동 운동의 경우 과거 집회에서 폭력을 사용한 경우가 잦았다는 사례가 있다면, 무슬림 이민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에 합류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폭력적 방법론에 동조하는 구성원들의 논리 구조다. 온건한 방법론으로는 다수 헤게모니를 전복시킬 수 없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마지막은, 이 폭력적 방법론에 대해서 정체성을 공유하는 내부 집단이 모두 동의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지역에 따라 차등은 있지만) 다수의 무슬림 이민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 노동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집회 현장에 나오는 건 아니지 않던가.
그중에서도 주목할 지점은 두 번째다.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체제 전복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 폭력이라는 믿음에 기인한다. 모스크를 건설하려고만 해도 집단적 반발이 일어나는 서구 사회에서, 무슬림 정당을 창설하고, 무슬림 정치인을 찍어서 무슬림 인권을 보호할 법안을 만들겠다는 기획은 빈곤한 무슬림 이민자들에겐 너무 먼 얘기다.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내세워 기초의원에 당선되었다가, 중앙 정치로 진출하자 노선을 180도 뒤집는 ‘카라마트 론’ 같은 인물이 현실에도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슬람 극단주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이유는, 1차적으로는 이런 정치적 원인에 기인하는 것이며, 한 차원 거슬러 올라가면 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여전히 상존하는 기울어진 권력 구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수가 겪는 차별’을 해결하는 것보다 ‘폭력의 비윤리성’을 조명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기여한 만큼 죗값을 치르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노동자들의 파업은 내가 잘못한 게 없음에도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으로 존재한다. 종교 근본주의의 경우라면 어떨까, 아무리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겠다는 인간은 거의 없겠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서구 중심적인 사회의 폭력에 내가 가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무슬림에게 직접적인 차별을 행해본 인간이 아니라면 말이다.
즉, 사람들이 폭력의 비윤리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소수자가 받는 차별이 나의 잘못으로 생긴 게 아니라는 공고한 믿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왜 그런 걸까? 불평등의 재생산에 개인이 개입하는 방식은 온전히 개인이 선택한 행위로 구성되어 있진 않다. 대게 구조적인 원인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자신이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한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다수다. 그 결과 “나는 불평등한 구조를 만드는 데에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선량한 시민인 나를 가해자로 만드는 거지?”라는 결과가 도출되는 거다. 자연스레 소수자들의 저항은 방향을 잘못 잡은 폭력으로 자리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고 싶다면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학살을 저지르는 테러리스트일 뿐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무슬림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이 존재하는 한 극단주의 투쟁 노선을 선택하는 무슬림들은 지속적으로 등장할 거란 점이다. 소수의 입장에서, 그들이 차별받는 상황은 이미 그 자체로 부정의하고, 비윤리적인 상황이다. 그런 그들에게 “권리를 주장할 거면, 윤리적인 방식으로 주장해라”라고 말하는 논리 구조는, 다수가 소수를 억압할 때 사용하는 논리와 동일하다는 점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은가? 현존하는 차별에 대한 반성과 해결을 위한 고민 없이, 테러에 가담하는 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차별받는 이들을 오히려 확대 재생산하는 데 기여할 것이며, 나아가 세계 전체에 존재하는 초주체적 폭력의 밀도를 점점 높이는 결과로 수렴할 뿐이다.
어린 파베이즈가 IS로 건너간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 불가능한 악인이어서가 아니다. 꿈을 실현할 수 있을 정도로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딜 가든 테러리스트의 자식이라고 낙인찍혔기 때문에, 아버지가 목숨을 바쳤던 종교, 그것과 관련된 모든 전통에 대해 부정당하고 차별받았기 때문이다. 영국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형태로 투쟁하지 않았다고 파베이즈를 비난하고 혐오한다면, 그것은 차별에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어린아이에게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