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인간,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관념,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영아기부터 내속에서 싹트고 지금까지 나에게 붙어있는 병인 것이다/홀로 걸어온길>
<또 연극이나 음악회도 입석에서 보는 것이
유행이며...미술관도 무료일만 택해서 가고 점심은 원칙적으로 생략하고 있다. 복장도 그에 준해서 형편없다..물질 경멸과 극단적 빈곤을 감수하면서 '정신'만을 찾고..살고 있는 것이 그들인 것 같았다
/나에게 옮겨준 반항적 낙인>
이 구절은 그의 스토아적 관념을 뮌헨 대학생들에게 대입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음식이란 굶어 죽지 않을 정도만 먹으면 된다는 (결혼 후에도) 생각, 밥대신 커피만 꿀떡 꿀떡 마시면서 산 바그너와 샹송의 축음기판,며칠을 굶으며 모은 돈 73마르크로 산 니체 전집 <여기에 나의 영혼이 들어있다>라고 하는 그의 생각이 어느 정도 속되고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전혜린의 정신 숭배, 물질 경시의 외적인 표현은 박경리를 칭송하며,자신의 관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경멸한다.
<멋 있는사람은 박경리씨. 안 빗고 안 지진 머리 신경만이 살아있는 듯한 피부... /64.2.28>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천박하고 실속이 없는 사람,...간단히 말해서 정신의 품격이 없는 사람이다
/ 59.2.19>
<개성이 뚜렷한 자아의 길이 없는 인간은 무엇에 있어서 뛰어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시골에서 학교를 나오고 서울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는 일생 소시민 근성이 따라 다닌다. 도덕,개성,발음,행동 전부가 어중간하다.
선에도 악에도 불철저하고 다만 얼치기,얼절이, 엉터리다. 무섭게 강한 것은 칭찬과 명예욕뿐/ 62.8.29>
감수성의 절정기인 20살의 나이였지만,
동생 채린에게 쓴 편지는 그가 얼마나 순수한 관념의 이상 속에 살기를 원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우선 너는 오락을 책과 자연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보들레르를, 하이네를, 괴테를, 바이런을 그리고 이방인을 읽어야 돼.공일날에는 눈동자가 독서로 인하여 깊어져 있는 마음 맞는 벗과 남산에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함께 읽은 책 한 권을 에워싸고 끝없는 논쟁에 들어갈 것이다...
목이 마르면 샘물을 마시고, 그리고 피곤하면 잔디 위에 누워서 별을 싫을 때까지 세다가 돌아갈 것이다.
진한 커피를 끓여놓고 기다리고 있는 나의 방으로......
서너 시간의 수면 후, 나의 커피 끓이는 냄새에 깬 너는 방을 쓸 것이다.
한 잔의 커피와 사과 한 개, 귤 한 개의 우리의 조반은 극히 짧고도 간단한 것이다.../부산에서>
이런 그는 일상의 권태와 염원이 정체된 현실 속에서 고독했고 방랑을 갈망했고 다른 탈출구를 찾아 헤멘다.
<아무 곳에도 안주 못하는 내 마음이 개탄스럽다. 아무 직업에도 질긴 욕망을 못 느낀다/61.11.2>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다. 얼마나 삭막한지,
권태가 나를 죽인다>
<기대서 위로받을 한 사람이 갖고 싶어진다.나는 생후 한번도 위안자를 갖지 못했다>
<나도 집시처럼 춤과 노래,사랑과 점치는일로 생활하며 온 세계를 방랑했으면/ 집시처럼>
<포장마차를 타고 인생을 전전하고 사는 집시의 생활이 나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내 혈관속에는 어쩌면 집시의 피가 한방울 섞여 있는지.../'64,먼곳에의 그리움>
<조금이라도 돈이 생기고 모인다면 장사를 시작하겠다. 그리고 나의 존재를 생각하며 살겠다/61.1.31>
<가을이면 앓는 병>에는 죽음에 저항하는 박명의 날들이 우울하게 녹아있다.
<생의 의지가 거의 마비되어 버리는 몇 주일을 꼭 겪어야하는 것이 나의 가을이다.
....매일 커튼을 검게 방 둘레에 치고 어스름한 박명(薄明)속에 누워 있었다..열흘쯤 이렇게 앓고나니 다시 일어나서 사물을 예전과 같은 각도에서 볼 힘이 어디선지 솟아낫고 가을은 깊어져 있었다/가을이면 앓는병>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녀의 삶은 매일 매일 죽음의 유혹으로부터의 도피,자살하지 않기 위하여 사는 역설적 노력이었다.
그리하여 순간 순간 치열하고 충만한 삶을 갈구한다.
<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을 사랑한다.집착한다
/64.4.10>
<서른 이라는 한계선을 경계로...보다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목마른계절 >
<그는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나는 생을 사랑해' 라고...자신이 생의 권태에 걸려 넘어질까 봐 겁내는 것처럼
/이덕희>
페시미즘,선민 의식의 폐해,비현실적인 스토아적 관념,고립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위해 열심히 살았다.
독일 문학을 번역했고,강단에 섰으며,50여편의 수필을 남겼다.
죽음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한 투쟁,역설적인 삶에 대한 애착과 치열한 노력이 <불꽃 같이 살다간....> 이란 훈장을 남겼을 것이다.
서른에 접어들면서 그는 어느정도 현실을 받아들이며 체념과 관조의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산다는 일, 호흡하고 말하고 미소할 수 있다는 일, 귀중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지금 나는 '서야 한다'는...존재케 해야 한다는 나이에 들어섰다....
이상과 꿈이 우리를 만든다...
인식에 모든 것을 바쳤던 10대와 20대... 상처에 뒤덮인 20대 후반기...
지금 회상해 보면 한마디로 내가 '어렸었다'는 느낌뿐이다.
꿈이 너무 컸었다.
요구가 너무 지나쳤었다....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권의 책이 맘에 들때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생각해 보면 나를 기쁘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루 하루가 마치 보너스처럼 고맙게 느껴진다.
또 하루 무사히 살아 넘겼구나 하고 잠들기 전에 생각할 때 몹시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난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느낀다/긴 방황>
그러나 이도 잠시
그리고 이혼
196X년,남편이 귀국했지만 개성의 충돌로 8년간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64년 31세에 합의 이혼한다.
<이혼이란 어디까지나 카인의 이마의 흔적이다 지워질 수 없는 상처다. 한 사람과, 그의 아이와 그의 온 집안을 해치는...아이가 있는 사람은 적어도 무슨일이 있어도 이혼해서는 안된다 /62.8.29>
<그는 나에게 신이었고 니체였고 랭보,발레리 였다/59.3.22>라고 회상한 대학시절,X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전혜린은 몇번 <초월*의 순간>을 체험한다.
<*서로의 의식이 완전히 융합되어 하나가되는 상태,사랑/전혜린의 표현/61.1.3>
<유학에서 막 돌아와 모교의 강단에 선 전혜린과 스무살의 제자는 독일어 강의가 있는 매주 수요일에 만났다.
청년은 시를 써서 바치고 전혜린은 편지를 써서 건네주며 서로를 찬미했다.
어느 날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의 어머니는
전혜린을 만나 무릎을 꿇고 헤어져 줄 것을 호소했다.
마침내 청년은 결별을 선언했고
전혜린은 '네가 날아올 땐 독수린줄 알았는데,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참새에 지나지 않았어!'라며 시니컬한 응대로 결별했다/한국 문단 비사,요약/장석주>
<초월의 순간>에서 만큼은 늘 그녀를 괴롭히던 악마도 잠잠했다.
내면의 갈등과 투쟁을 잠 재우는 그녀의 삶에 베풀어지는 드문 은총이었다.하여 전혜린은 늘 이를 갈구한다.
<illusion환상이라도 좋으니까, 아니 거짓이라도 좋으니까 순수한 고뇌를 바칠 수 있는 절대의 대상이 나에게도 있었으면.../62.2.5/이덕희에게 보낸 편지 >
그러나 그러한 은총의 상태는오래 가지 못한다.
죽기 사흘 전 전혜린은 <장 아제베도>라 명명된 남자에게 간절한 구애와 생명을 간구하는2통의 편지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