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04]_술이나 들게

"제군들, 오늘이 내 생일인 줄 어떻게 알았는가? "

by 김홍성

강릉의 관동대학교 국어교육과 1학년 재학 중인 1974년에 대학신문 현상 문예 시 부문에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백일장에 낸 작문이 뽑혀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 단상에 올라가 낭독을 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대학신문 1면에는 내 시 두어 편과 함께 미당 선생의 심사평이 실렸다. 평범한 시였으나 선생의 눈에는 좋게 보였던 것 같다. 나중에 선생의 그 무렵 시집들을 읽다 보니 ‘손톱 밑 반달’이라는 이미지가 자주 나왔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응모한 시에도 ‘손톱 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바로 그 점이 선생의 마음에 들지 않았나 싶다.

‘하짓날’이라는 제목을 달았던 그 시는 1972년 하짓날에 여우 고개 마루턱에서 바라본 노을을 읊은 시였다. 1 년 중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짓날에 지장산 너머로 펼쳐진 노을은 난생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노을빛이 어찌나 곱고 진한지 길바닥의 콩고물 같은 먼지는 물론 내 살갗과 손톱 밑까지 붉게 물들였다. 산역을 마치고 빈 상여를 메고 내려오는 상두꾼들은 모조리 취해 서 비틀거렸다. 대충 그런 얘기를 시에 담았었다. 관동대학에는 어쩌면 그 신문이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74년 당시 강릉 주변은 풍광이 아름다워서 걸으면 걸을수록 신명이 나는 고장이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하숙집에서 싸주는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서 산촌으로 어촌으로 내키는 대로 쏘다녔다. 술도 많이 마셨다. 친동생이 같이 입학하여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나는 학생들과 어울리는 데 있어서 말이나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형이 된 체면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1972년, 1973년 대학 입학 예비고사에 불합격하고 1974년 예비고사에서 간신히 제2지망에 합격하여 강릉 관동대학까지 가게 되었던 내가 문예창작과 편입 시험에 합격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당시 문창과 편입 시험에 응시한 수험생이 단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강릉에서는 혼자 산책이나 소풍을 즐겼다면 흑석동에서는 거의 매일 ‘할머니 집’에 다니며 동문들과 어울렸다. 할머니 집은 한강 쪽 큰길에서 중앙대학교 쪽 비탈로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난 골목 어귀에 있는 콧구멍만 한 선술집이었다. 가운데 연탄을 피우고 그 위에 냄비를 놓을 수 있는 둥그런 양철 탁자가 몇 개 있고, 골목 쪽으로 낸 작은 유리창 앞에 조리대가 놓여 있었다. 말이 조리대지, 할머니가 거기서 하는 일은 동태나 두부나 김치나 파를 써는 일 정도가 고작이었다.

할머니 집 손님은 주로 건너편 건재상에 모이는 일용직 근로자들과 문창과를 비롯한 예술대학 학생들이었지만 나중에는 타교 학생들도 문학 서클을 만들자며 찾아오기도 했다. 우리는 대체로 시 연습이나 소설 연습 같은 세미나 형식의 수업을 마치고는 할머니 집에 모여 두부 한 모에 탁주 한 주전자, 또는 닭발에 소주로 시작하는 뒤풀이를 했다.

할머니는 참 어질고 푸근한 분이셨다. 어찌 보면 악당 같고, 광인 같고, 폐인 같은 우리를 늘 관세음보살 같은 마음으로 받아 주셨다고 기억된다. 할머니 집은 서라벌 예술대학 시절의 선배들이 이따금 출몰하는 곳이기도 했다. 미아리에 있었던 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로 입학한 선배들이 군대에 갔다가 흑석동 중앙대학교로 복학했기 때문이다.

일찍이 고인이 된 이경록 시인, 몇 해 전에 타계한 신현정 시인, 소설가 표성흠, 그리고 서라벌 68학번 삼총사라 일컬어지던 송기원, 이시영, 이진행 시인. 그리고 역시 68학번인 승려 최영해 시인. 이분들은 친형제 못지않은 우애로 후배들을 격려했다. 술값도 대신 내주고, 꼭 읽어야 할 책을 알려 주고, 술만 많이 마시지 말고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열심히 쓰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이렇게 문창과 소굴이 된 할머니 집은 서라벌 시대와 흑석동 시대를 이어주는 역사적 공간이기도 했다. 서라벌 시대에 군대에 갔다가 중앙대로 복학한 선배 중에는 중앙대학교 배지가 아니라 서라벌 배지를 달고 다니기도 했는데 우리 동기 중에는 그 배지를 물려받아 자랑스레 달고 다닌 동기들도 있었다.

내 경우는 선배 중에서 이경록, 최영해 시인과 각별히 친했다. 이경록 시인과의 만남은 그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하다. 그러나 「이 식물원을 위하여」 연작을 쓰던 시기였던 1976년 그때 버스를 같이 타고 어딘가로 가면서 옆자리의 나에게 말해 준 한문 문장의 뜻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삶이란 구름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문장이었다.


승려였던 적음 최영해 시인과의 인연은 몇 년 전에 그가 입적할 때까지 끈질기게 이어졌다. 할머니 집 시절에 그는 내 연습장에 자작시를 써주곤 했다. 꼬불꼬불한 터럭이 규칙적인 집합을 이룬 듯한 필체로 쓰는 그의 시들에서는 옛 선사들의 게송에서나 풍기는 소쇄한 맛이 났다. 훗날 흑석동에 방을 얻어 살던 시절의 그는 ‘내 어디엔들 머물 곳 없으랴’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내기도 했는데 그는 소주를 마셔가며 한 줄씩 읊고(때로는 소주병에 소변을 보면서) 나는 그의 육성 원고를 즉석에서 타자기로 기록했었다.

송기원 이시영 두 선배는 문창과 재학생들이 기성 문인들과 접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합동 야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1975년 봄 서울 수유리 언저리에서 여러 기성 문인을 먼발치에서 접했다. 그날 모인 기성 문인 중에서 고은, 황석영 선생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특히 황석영 선생은 청바지 차림으로 대중 앞에 나와서 혁대를 뽑아 쥐고 장바닥 뱀 장수 사설을 풀어서 대중을 웃겼다. 앙코르가 터져 나오자 이어진 레퍼토리는 걸쭉한 욕설이 버무리 된 국회의원 연설이었다. 이른바 교수로서 강단에 선 점잖은 문인들의 수업을 듣고 있던 나로서는 그런 파격적인 자리가 신선하고 즐거웠다.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의 전공인 시 소설 창작에 관한 수업은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시를 예로 들자면, 학생들 몇이 자작시를 칠판에 옮기고 나면 다른 학생들이 그 시에 대해 평론을 전개한 다음 교수가 총평을 하고서 마쳤다. 그런데 우리 74학번 동기들은 도무지 칠판에 시를 발표하기를 망설이는 통에 내가 제일 먼저 나서곤 했다. 동기들 눈에는 편입생인 내가 너무 설치는 꼴이었다.

칠판에 옮긴 나의 시들은 그들에 의해 형편없이 깎이곤 했다. 그런 날의 할머니 집의 뒤풀이는 난폭한 양상을 보였다. 자칫 주먹질이 오갈 수도 있었지만, 누구도 판을 깨고 싶지는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무마되었다. 개들이 싸우면서 크듯이 우리도 싸우면서 컸다.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폭도 넓어졌다고 생각된다.

다형 김현승 선생도 그 수업을 진행한 교수 중 한 분이셨다. 1975년 그해 봄, 그러니까 내가 문창과에 갓 편입했을 때 시 연습 세미나에서 칠판에 쓴 내 시에 대하여 ‘강렬하고 기발하다’고 평하고는 ‘시는 결국 인격이다’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그리고 곧 타계하셨다.

미당 선생의 시 연습 수업에는 다른 과나 다른 학교의 학생들도 슬며시 들어와 도강을 했다.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 해인 1976년 2학기 말에 미당 선생은 나를 따로 불러서 그동안 내가 쓴 시들 중에서 30 편만 골라가지고 집으로 오라고 했다. 선생은 내가 급히 추려간 30 편의 시들 중에서 5 편을 뺀 나머지 25 편을 5편씩 다섯 종류로 나눈 다음에 그것을 다섯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응모하라고 하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 신문사에서 해마다 나에게 신춘문예 심사를 의뢰하고 있는데 올해는 어느 신문사에서 의뢰가 올지 모르겠네. 오해하지 말게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듯이, 잘 모르는 사람을 당선시키기보다 내 제자 중에서 실력이 인정된 사람을 뽑는 게 낫지 않겠는가?”

나는 그게 일종의 부정 심사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선생의 논리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미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처럼 들떠서 당선 소감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당선 통지가 안 왔다. 그해에는 어떤 신문사에서도 미당 선생에게 심사를 의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내가 2년이나 연기하고 있던 군 입대를 위해 우선 징집 원을 낸 계기가 되었으리라.

1977년 3월에 군에 갔다가 1980년에 4학년으로 복학했을 때는 할머니집 외에 아줌마집이라는 문창과 소굴이 하나 더 생겨 있었다. 할머니집이 한강변 큰길에서 내려와서 오른쪽이었다면 아줌마집은 왼쪽이었다. 허름하기로 보나, 소박하기로 보나, 정답기로 보나, 편하기로 보나 두 집은 일맥상통하는 집이었다.

할머니집이나 아줌마집이나 더 이상 문창과만의 소굴이 아니었다. 회화과, 사진과, 건축미술학과 학생들도 저희들 소굴이기나 한 듯 스스럼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회화과 학생들이 이미 아줌마집의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으면 할머니집을 찾아가고, 할머니집에 자리가 없으면 아줌마집에 가는 식이었다. 물론 1차는 할머니집, 2차는 아줌마집 하는 식으로 두 군데 다 들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그때에도 할머니집이나 아줌마집의 단골 학생들은 술을 마셨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싸우고 울었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12 시 통행금지 전에 어디론가 숨어들어야 하는데 미처 은신처를 찾지 못하면 쓰레기 수레 속에라도 들어가야 했다. 때로는 시청 쓰레기 운반차에 합승하여 난지도에 가서 쓰레기 태우는 불길 옆에서 새벽을 맞기도 했다. (난지도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해 둘 만한 얘기다.)

80년 그 해 봄에 서라벌 고등학교에 교생 실습을 나갔다. 67학번 신현정 선배가 담임인 반에 68학번 송기원 선배와 함께 부담임이 되었는데 어느 날 교실 복도에 합수부 수사관 둘이 기다렸다가 송기원 선배의 행방을 물었다. 며칠 전에 있었던 교생들의 회식자리 이후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즈음에 중앙대학교 강당에서 시국강연을 하여 학생들의 인기를 끌던 고은 선생은 어떤 지면에 ‘마흔다섯’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이는 미당 선생이 기왕에 발표한 시 ‘마흔다섯’에 시비를 거는 시라고 할 수 있었다. 미당 선생은 마흔다섯의 첫 줄에 ‘마흔다섯은/귀신이 와 서는 것이/보이는 나이’라고 썼는데 고은 선생은 ‘마흔다섯은/역사가 보이는 나이’라고 썼던 것이다.

군 복무 중에 우연히 얻어 읽은 ‘친일문학론’으로 인하여 미당 선생에 대한 깊은 존경심 대신 반항심이 커진 나는 미당 선생 앞에서 고은 선생의 ‘마흔다섯’을 거론하면 미당 선생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오후에 미당 선생의 시연습 세미나가 있었던 그날은 마침 미당 선생의 월급날이기도 했다. 우리는 과대표를 미당 선생에게 보내 강의실 대신 안동장이라는 학교 근처 중국집에서 회식 자리를 갖도록 도모하여 성공했다. 스무 명쯤 되었다고 기억되는 우리 학생들은 안동장 큰 방에 상을 여러 개 붙여 놓고 죽 둘러앉아서 미당 선생을 기다렸다.

잠시 후 과대표가 모시고 온 미당 선생은 흐뭇하고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군들 오늘이 내 봉급날인 줄 어떻게 알았는가?”하면서 좌정했다. 미당 선생이 탕수육 등 몇 가지 안주와 함께 주문한 술은 맥주였다. 모두의 잔에서 금방 부은 맥주의 거품이 부글거릴 때, 그러니까 건배를 해야 할 순간에, 27세의 복학생이었던 내가 65세의 시인에게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던졌다. 기억을 더듬어 재구성한 그 질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는 마흔다섯이라는 시에서 마흔다섯은 귀신이 보이는 나이라고 쓰셨는데요, 고은 선생은 역사가 보이는 나이라고 썼더군요. 이에 대해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미당 선생은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김 군. 귀신이나 역사나 눈에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술이나 들게.”

그리고는 흐흐흐 웃으며 술잔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학생들도 모두 술잔을 치켜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으며 결국 술잔을 들고 말았다. 하지만 분했다. 얼마나 분했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았겠는가. 이제 와서 곱씹어 보니 미당 선생의 그 말은 고은 선생에게 돌려준 한칼이었다고 생각된다.

미당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는 이미 십여 년이 되었고, 나는 63세가 되었다.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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