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착하자 마자 1주일 동안 폭설에 묶여 있었다
컴컴했던 도동항 선창이 갑자기 환해졌다. 오징어잡이 배 몇 척이 집어등 불빛을 거의 동시에 밝힌 것이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와 정박한 어선의 찢어질 듯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 그리고 육지에서 오는 선객들을 마중 나온 동네 사람들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사람의 얼굴을 본 적이 언제였던가? 1주일 만에 많은 사람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배에서 내릴 누군가를 기다리는 동네 사람들의 얼굴은 따스한 집어등 불빛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친숙하게 느껴졌다. 딱히 기다릴 사람도 없었던 내가 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창에 나갔던 것은 모닥불을 쬐듯 사람을 쬐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울릉도에 도착한 첫날부터 일주일 동안 폭설이 오거나 눈보라가 쳤다. 뱃길도 막혔다. 여인숙 골방에서 자다 깨다 하는 나날이었다. 한 번씩 선창 근처의 식당에 가서 짬뽕을 먹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중년 사내가 소년 한 명을 데리고 운영하는 허름한 식당인데, 주메뉴가 짬뽕이었다. 다른 음식도 팔았는지는 모르겠다. 하루에 딱 한 끼만 배를 채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집 짬뽕은 맛이 좋았다. 국물이 특별했다. 오징어의 본고장이니 짬뽕 국물을 낼 때 오징어를 듬뿍 썼다. 오징어와 함께 면을 건져 먹고 남은 국물을 쭉 들이켤라치면 소주 생각이 났지만 매번 참았다.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나서도 한참 앉아 있었다. 세찬 바람이 문을 흔들 때마다 문틈에서 눈가루가 날렸다. 주인은 말수가 적고 소년에게도 무뚝뚝했지만, 인정은 있었다.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청년이 가여웠던 걸까? 두 번째 찾아갔을 때부터였지 싶은데, 짬뽕 그릇을 다 비우고 그냥 앉아 있으니, 소년이 국물만 따로 한 사발 더 가져다주었다. 셋째 날에는 짬뽕이 올 때 식은 밥일망정 밥도 한 사발 같이 왔다.
1972년 1월, 혼자 무전여행을 나선 길이었다. 남쪽을 돌다가 강릉 가는 길에 포항에 들렀는데 울릉도 가는 배가 곧 떠난다기에 무작정 승선했다. 뱃길이 사납고 멀어서 무척 고생했다. 울릉도에 도착하니 눈보라가 치다가 폭설이 쏟아졌다. 눈보라와 폭설은 날마다 계속되었다. 길이 눈에 파묻혀 행인이 드물었다. 눈보라가 심할 때는 밤인지 낮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하루 한 번씩은 눈길을 뚫고 그 허름한 식당을 찾아갔다. 짬뽕도 좋았지만, 사람이 더 그리웠다. 세찬 눈보라가 식당 문 유리창에 달라붙는 춥고 우중충한 날들을 그들 덕분에 견딜 수 있었다.
도동항에 배가 들어온 그날 밤에도 눈보라가 드세서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파도도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멀찍이 정박한 여객선에 가서 승객들을 수십 명씩 싣고 오는 도선도 위태롭게 흔들렸다. 파도를 헤치며 넘실넘실 다가오는 도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그새 눈보라를 뒤집어써서 눈사람 같았다. 그들을 마중 나온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발이 젖어 발이 시렸지만,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기는 서운했다. 도선에서 선창으로 내려서는 선객들, 손을 흔들며 다가가 큰 가방을 받아 드는 사람들…. 선창에 상륙하는 선객들의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바라보는 사람 중에 나 같은 여행자도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집요한 형사처럼 맨 마지막 선객이 도선에서 선창으로 내려선 후에야 발길을 식당으로 돌렸다. 짬뽕을 주문했다. 그리고 소주도 한 병 청했다.
육지에서 배가 들어온 다음 날 아침은 새파랗게 갠 하늘을 보여 주었다. 구름은 하얀 강아지들처럼 몽실몽실하고 귀여웠다. 바다도 언제 그렇게 사나웠냐는 듯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무려 1주일 동안 섬의 악천후와 무료함에 질려 있던 나는 더 이상 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미소 짓는 바다에 홀려 며칠 더 머물다가는 다시 악천후를 만나 갇힐 것이 두려웠다. 선창에 내려가서 다음날 떠나는 배표를 끊었다. 출항할 시각까지 남은 시간은 22시간. 하얀 강아지 같은 구름들은 이제 저동항 쪽 능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도동항이라도 잠시 다녀오기로 작정하고 눈이 쌓여서 하얗게 보이는 언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동항 가는 비탈길은 허리까지 쌓인 눈 사이로 도랑처럼 좁게 나 있었다. 눈 녹은 물이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비탈길이었다. 그늘에 들어서면 길바닥이 아직 안 녹아서 미끄러웠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며 내려온 저동항 포구에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어부들이 배를 대고 상륙해서 길 하나 건너면 문을 열고 들어설 수 있는 대폿집들도 여럿 보였다.
그중 한 대폿집 앞 해안 도로에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그만 어선의 뱃전에서 벌어지는 작업을 주시하고 있었다. 작업 인원은 세 사람, 한 사람은 위아래가 붙은 검은 잠수복을 입고 앉아서 하얀 냉면 사발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고, 그 사람 옆에 서 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손에 든 됫병 소주를 잠수복 입은 사람의 사발에 조심조심 기울이고 있었다.
잠수부는 사발을 들어 단숨에 쭈욱 마셔버린 후 뱃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잠수 헬멧을 들어 잠수부의 머리 위에 씌우고 시소(seesaw)처럼 생긴 공기 주입기 양쪽에 서서 손잡이를 눌렀다 올렸다 하면서 고무호스로 연결된 잠수복 안에 공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잠수부는 뱃전에 걸터앉아 있다가 손을 한 번 들어 보인 후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물속에서 잠수부가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한참 기다린 끝에 잠수부의 헬멧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는 한 손으로 뱃전에 늘어뜨린 밧줄을 거머쥐고서 다른 한 손으로 굵은 낚싯줄이 연결된 오징어 낚싯바늘 뭉치를(수십 개의 낚싯바늘이 촘촘히 박힌) 조수로부터 받아 들고 다시 잠수했다.
첫 번째 잠수에서 뭔가를 찾았고, 이제 그 뭔가를 건지기 위해 오징어 낚싯바늘을 들고 다시 잠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을 건지려는지 궁금했다. 현장 분위기로 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이 올라올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잠수한 바다 가까이 더 다가섰다. 발치 앞에 바다의 파도가 물결치고 있었다. 길 건너에 있던 다른 구경꾼들도 건너와 내 옆에 섰다.
헬멧이 물 위로 쑥 올라왔다. 조수 둘이 잠수부를 도와서 뱃전에 걸터앉게 한 후 잠수 헬멧을 몇 번 돌려서 벗겼다. 검은 잠수복 위에 덥수룩한 중년 사내의 핼쑥한 얼굴이 나왔다. 조수들은 좀 전의 그 큰 사발을 잠수부에게 건네고 됫병 소주를 콸콸 따랐다. 잠수부는 대접의 소주를 단숨에 마신 후에 사발을 내려놓고 조수가 들고 있다가 건네준 굵은 낚시 줄을 받아 들고 조심조심 서서히 당겼다.
잠수부가 조심조심 당기는 낚시 줄을 따라 수면에 올라온 물체는 시신이었다. 머리와 함께 오른손이 먼저 올라왔는데 그 손은 끊어진 새끼줄을 움켜쥐고 있었다. 왼손이 올라왔을 때는 손목에 찬 시계가 햇살에 번쩍였다. 이어서 엉덩이가 올라왔는데 바지는 무릎 밑 발목에 둘둘 말려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손에 쥐고 놓지 않았던 새끼줄은 오징어 상자들을 묶은 새끼줄이었다. 귀동냥한 바에 의하면, 죽은 사람은 눈보라가 심했던 며칠 전 밤에 선술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소주 두어 병을 마신 그가 다시 한 병을 더 주문했고 선술집 주인이 소주를 가지러 간 사이에 그가 사라졌다. 잠시 소변을 보러 밖에 나갔으려니 했는데 안 왔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오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도 없었다. 필경 사고를 당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사고 장소는 선술집 바로 앞 선착장. 그곳에는 새끼줄로 묶은 오징어 상자들이 바다를 향해 쌓여있어서 급할 때 용변 보기 적당한 자리였다고….
참혹한 모습의 사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이후에는 더 이상 그 선창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 녹는 길을 따라 걸었다. 바닷가로 쭉 이어지다가 산 쪽으로 굽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길가에 세워진 팻말들을 보았다. 한 팻말에는 '일몰 이후 해안에 접근하면 발포함'이라고 적혀 있었고 또 다른 팻말에는 '간첩이나 간첩선을 신고하면 받을 수 있는 포상금이 최고 ****원'이라는 내용이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귀로에는 일몰 전에 해안을 통과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산 쪽으로 이어진 길 끝의 마을이 궁금하여 더 걸어 보기로 했다. 얼마 후 마을이 나왔고 마을 안 골목들이 삼거리를 이룬 곳 오른쪽에 가게가 있었다. 가게 유리창에 붙어 있는 '라면 소주 탁주'라고 쓴 종이를 보자 배가 고파졌다. 그때까지 한 끼도 안 먹었기 때문에, 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시켰다.
동작이 굼뜬 아주머니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라면 냄비를 내 앞에 갖다 놨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 라면이 좀 식기를 기다리며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오다가 보니 일몰 후에 해안에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되어 있던데 정말 총을 쏩니까?”
아주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잊었지만, 라면값이 짬뽕값보다 훨씬 비쌌다는 건 기억한다. 달걀을 넣어 주기는 했지만 분명 바가지요금이었다. 라면값을 미리 물어보지 않은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면서 군소리 없이 돈을 내고 나왔다.
마을을 좀 더 돌아다녀 보고 싶은 생각은 바가지요금으로 인해 사라졌으므로 오던 길을 되짚어 한참 내려갔는데 한 아이가 뒤에서 소리쳐 부르며 나를 쫓아왔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 아이는 '가겟집 아주머니가 잠깐 와 보라고 한다'라고 말했다.
두고 나온 물건이 없었으므로 바가지를 씌운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얼마간 환급해 주려나 보다 생각하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문 옆에서 '손들엇' 하는 벽력 같은 고함과 함께 총구가 나타나 가슴팍을 쿡 찔렀다. 얼결에 손을 번쩍 들고서 재빨리 훑어보니 탄창이 꽂힌 M1 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는 서너 명의 사내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예비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사내에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마침 가게 뒷방에 모여서 술추렴 하다가 가겟집 아주머니의 얘기를 듣고는 즉각 검거 작전에 돌입한 아주 훌륭한 이 예비군들이 몸수색에서 발견한 것은 대나무로 만든 짤막한 피리, 즉 단소 하나였다. 그때 나는 잘 불지도 못하는 단소에 끈을 달아서 왼쪽 어깨에 걸고 그 위에 펑퍼짐한 겉옷을 입고 다녔다.
그들은 몸수색을 위해 내 옆구리에 손을 댔을 때 느껴진 단소가 무슨 기관단총의 총열쯤으로 알고서 아연 긴장했었다. 그들은 그것이 단순한 피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총구를 겨눈 채 신분증을 요구했다. 애당초 멀리 나오려고 작정한 게 아니었으므로 신분증은 여인숙에 두고 나왔다고 대답했다. 대장인 듯한 사내가 여인숙 이름을 물어보더니 다른 예비군에게 지서에 전화하라고 말했고 그는 가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라면 한 냄비 먹고 나서 바로 간첩 용의자로 몰린 원인은 '라면값도 모르는 자'였기 때문이다. 당시는 ‘이웃에 온 마음 좋은 저 아저씨 간첩 아닌지 다시 보자'라는 표어가 전국 방방곡곡에 붙어 있던 때였다. 라면값도 모르는 간첩 용의자가 두 손을 깍지 낀 채 머리 뒤에 대고 앞서서 걷고, 예비군들은 총부리를 겨눈 채 바짝 따라붙었다. 동네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진기한 구경거리인가? 개구쟁이들이 신났다. 아이들 몇은 눈을 뭉쳐서 간첩 용의자에게 던지기도 했다. 짓궂은 놈 몇은 눈 위에서 개똥을 주워 던지기도 했다.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고 눈을 부라린 젊은 예비군이 있어서 더 이상 침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따라오는 구경꾼들은 저동항에서 더 늘었다. 간첩 용의자를 앞세운 예비군들과 숙덕거리는 구경꾼들이 이룬 이 기묘한 대열은 도동항으로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서야 해산했다. 지서 순경 한 명이 여인숙에 가서 내 주민등록을 찾아들고 고개를 넘어왔다. 그들과 헤어질 때 그들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예비군이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말했다. 육지에 가거든 우리 울릉도 주민들의 반공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널리 홍보해 달라고. 어이없는 일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들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일종의 약속이었다면 나는 이제야 제대로 약속을 지키고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2년 후인 1974년에 울릉도에서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 그게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보면 나온다. 그 사건 또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으니 울릉도 주민들이 얼마나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육지로 돌아가는 배가 도동항을 출항한 시각에 대해서는 잊었다.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가 탄 여객선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봉착했는지도 잊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탄 여객선의 객실들은 모조리 봉쇄되어 있었고, 그 이유는 폭풍으로 인한 드높은 파도였다. 롤링, 피칭. 파도에 의해 배가 전후좌우로 부대끼는 통에 혹시 갑판에 나온 선객이 바다로 떨어질 수도 있어서 객실 문을 밖에서 잠갔다. 오줌 마려운 선객 중에 남자들은 선실 구석으로 기어가서 오줌 눌 자리를 찾아 요의를 해결할 수도 있었지만, 여성들은 자리를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개중에는 신을 벗어서 사타구니 사이에 놓고 요강 삼아 오줌을 누고 난 후에 신에 고인 오줌을 통로에 연한 입구에 쏟아붓기도 했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승객을 선실 안에 가두었음에도 누군가가 봉쇄를 뚫고 갑판으로 나가 변 보는 일을 감행했다. 여성이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시가에 인사드리러 다녀오던 길이었다는 그 젊은 여성은 차마 중인환시 속에서 고무신을 깔고 소변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객실에 드나드는 선원이 객실의 철문을 미처 잠그지 못한 틈을 타서 갑판에 나가 갑판의 난간을 붙잡고 변을 보다가 그만 바다에 떨어졌다. 다행히 갑판에 나왔던 선원 한 명이 성난 파도가 울부짖는 바다에 떨어진 여성을 보았고, 구명 튜브가 달린 밧줄을 던졌다. 요행히 그녀는 그것을 붙들었다.
객실 바닥 가운데쯤에는 배의 맨 밑바닥에 설치된 기관실을 보여 주는 일종의 창문이 있었는데, 마침 내가 차지한 자리가 바로 그 창문 옆이어서 방금 구조된 새댁이 군용 담요를 덮어쓰고서 뜨끈뜨끈 열이 오르고 있을 굵은 파이프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기관실 풍경은 그렇더라도 바다는 여전히 사나웠다. 천둥번개가 쉴 새 없이 치고, 배는 전후좌우로 뒤집힐 듯 요동을 쳤다. 선객들 대부분은 자기 토사물을 베개 베듯 머리에 베고 있거나 허리나 등에 깔고서 드러누운 채 곧 죽을 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내 생애 첫 울릉도 여행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그다음은 전혀 모르겠다.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