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례한 환자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유

1년짜리 사장 수업

by 태섭

1. 나의 첫 번째 고객은 '경증 환자'


상급종합병원 간호사 7년 차. 냉정하게 돌아보니 나는 '시스템이 부여한 권위'에 길들여져 있었다. 일반인 입장에서 응급실은 엄청나게 특수한 공간이다. 살면서 한 두 번이나 올 수 있는 곳일까? (스스로의 안정을 찾기 위해 한 달에 20번을 방문하는 환자도 있다. 어쩌면 나보다 출근을 더 자주 하신다)


긴박한 응급실에서 의료진의 지시는 곧 생명줄이다. '지금 내 말을 안 들으면 당신의 상태가 나빠질 수 있다' 암묵적인 경고는, 전쟁터 같은 환경에서도 환자를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경증 환자님. 저에게는 초응급 중환자가 최우선이고, 당신은 아직 좀 더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이런 논리로 경증 환자들을 제압했다. 그것이 숙련된 간호사의 단호함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건 병원 시스템의 그늘 뒤에 숨어 부린 감정적 방어였을 뿐이다.


병원 밖 야생의 현실은 차갑다. 내가 방문 간호 센터를 차리는 순간 환자는 '살려야 할 대상'인 동시에 서비스를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고객'이 된다. 방문 간호 현장에서도 "손가락 좀 긁혔는데 왜 안 오냐"라고 따지는 고객은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그때 응급실에서처럼 "경증이니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순간, 내 사업체는 별점 테러와 매출 급감이라는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은 이미 병원 밖으로 떴지만, 이 상황을 역이용해 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이곳을 나의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하는 공간으로 삼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1. '불안'이라는 상품을 다루는 법

큰 사탕을 삼켜 목이 아프다며 오거나, 손가락이 살짝 긁혀 온 경증 환자들. '왜 이런 걸로 응급실에 와?'라는 차가운 시선 대신, '내가 당신의 불안을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해 봐야겠다. 그들은 질병이 아니라 '불안'이라는 무거운 짐을 들고 온 고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가가면 미소 짓는 게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시뮬레이션 2. '차가운' 의학 언어를 '따뜻한' 생활 언어로 '번역'하기

"검사 결과 이상 없으니 귀가하시면 되세요"라는 통보 대신, 왜 배가 아픈지, 집에서 어떤 증상을 관찰해야 하는지 환자의 눈높이에서 설명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의사보다 의학적 지식은 깊지 않지만, 환자의 눈높이로 설명하는 건 간호사인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실제로 응급실의 교수님들은 숨이 넘어가는 CPR 환자와 강아지에게 물린 경증 환자 사이에서 사투를 벌인다. 교수님이 CPR 환자를 우선 처치하고, 30분 동안 손가락을 봉합하는 사이 밖에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119 구급차가 들이닥치고 경증 대기 환자들의 불만은 폭발한다.


바로 이 지점이 나의 '블루오션'이다. 의사가 여러 가지 처치에 매몰되어 있을 때, 나는 환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거다.


"환자분 지금 이런 상황으로 지연되고 있어요. 중증 순서에 따라 치료를 받기 때문에 정확한 시점을 알려드리지 못해요. 혹시 기다리시는 동안 증상에 대해 궁금하신 점 있으실까요?"


환자는 의사 앞에서는 위축되어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나에게 쏟아낸다. 나는 그들에게 '만만한 전문가'나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하는'사람이 되어준다.


야생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새겨봐야겠다. 사업가에게 '까다로운 고객'은 있어도 '불필요한 고객'은 없다. 병원에서는 그들을 빨리 내보내는 것이 성과였지만, 야생에서는 그들의 마음을 돌려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실력일 테니까.


2. 지갑이 열리는 순간을 시뮬레이션하다


위중한 환자든, 가벼운 환자든 본질은 같다. 그들은 나처럼 자신의 몸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지금까지 중환자의 생체 징후(Vital Sign)를 살피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았다면, 이제는 경증 환자의 '눈빛'도 함께 집중해야겠다.


며칠 전 나를 의심하던 환자에게 다가가 차분히 설명을 했다.


"환자분, 검사 결과는 교수님에게 들으셨죠?"

"뭐 괜찮다고는 하는데 뭔 말 인지도 모르겠고. 나는 아직 아프다니까요!"


또다시 내 목에 걸린 사원증을 훑어보는 환자의 눈길을 느꼈다.


"맞아요 그게 엄청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쉽게 말하자면 환자분의 췌장, 담낭이라는 장기에 찌꺼기가 쌓여서 그래요. 그게 돌처럼 딱딱해지면 엄청나게 아프신 거고요."

"간호사예요? 당신이 내가 괜찮은지 어떻게 알아요."

"아네ㅎㅎ 저는 응급실 전담 간호사입니다. 다행히 돌이 크지는 않다고 하시네요. 그래서 일단 귀가하셔서 지켜보다가 외래로 오시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혹시 최근에 소화가 잘 안 되거나, 물을 잘 안 드셨나요?"


그 순간 환자의 경계하는 눈빛이 조금 풀리는 걸 알 수 있었다.


"네 뭐 언제 물을 또 챙겨 먹고 있어요. 바빠 죽겠는데. 속도 좀 더부룩할 때가 많긴 했지."

"(환자의 우상복부를 가리켰다) 여기에 췌장, 담낭이라는 장기가 있어요. 이곳에 돌이 생기면 어떤 고통보다도 지독하게 아프다 하더라고요. 저는 여기서 많은 환자들 봐왔잖아요. 다들 엄청 고통스러워하세요. “

"그럼 어떻게 하면 좀 괜찮아져요?"

"집에서 약이랑 물 자주 복용하시고요. 혹시나 이런 증상이 보이시면 한 번 이렇게 검색해 보시고(환자 휴대폰으로 검색해 줬다), 그래도 이상하시면 다시 한번 오셔도 좋을 것 같아요(미소장착)"


드디어 환자의 찌푸려진 미간이 시원하게 반짝거렸다. 나를 훑어보던 눈도 둥글게 풀렸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은 완만해지고,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찾았다. 의심이 신뢰로 바뀌는 순간! 비즈니스로 치면 고객이 내 서비스의 가치를 인정하고 '결제 버튼'을 누르는 찰나였다. 내 머릿속에는 이미 기분 좋은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그래. 이런 식으로 설명과 케어를 한다면... 환자들은 나에게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겠구나.'


응급실 속 지루했던 8시간의 근무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음은 이미 야생에 있었지만, 그 야생에서 살아남을 '사냥 기술'을 익히느라 멈췄던 시곗바늘이 다시 무서운 속도로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3. 결론 : 오히려 돈을 받으면서 1년짜리 사장 강의를 듣는다는 마음으로


드디어 병원과 나 그리고 환자들, 모두가 승리하는 '윈윈(Win-win) 전략'을 찾았다.


내가 경증 환자에게 정성을 다할 때마다 병원은 '친절 간호사'라는 자산을 얻고, 나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비즈니스 경험치'를 얻는다. 병원은 똑같은 월급을 주며 숙련된 친절을 사고, 나는 월급을 받아 가며 1년짜리 실전 사장 강의를 듣는 셈이다. 환자들도 친절한 간호사 덕분에 기분 좋게 치료를 받게 된다.


물론 1년 뒤 병원은 가장 친절한 간호사 한 명을 잃게 된다. 반대로 지역 사회는 가장 전문적이고 따뜻한 미소를 갖고 있는 [방문 간호 센터 대표 김태섭]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나에게 화를 내는 경증 환자나 보호자는 더 이상 ‘진상(JS)이 아니다. 내 사업의 운명을 결정지을, 반드시 클리어해야 하는 '고난도의 비즈니스 퀘스트'처럼 느껴진다. 이 퀘스트를 하나씩 깰 때마다 1년 후 나의 센터는 더 단단해질 것이고 결국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오늘도 데이 근무 시작 전 마음을 다잡고 응급실 스테이션에 섰다. 배가 고파서 시계를 봤다.


"어?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에요? “


출근해서 처음으로 시계를 봤다. 내 말을 들은 동료는 지친 표정으로 이제야 점심을 먹는구나라며 한숨 쉬었다. 집에는 또 언제 가냐며 불평을 하는데,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 사실 며칠 전 내 모습과 같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간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언제나 내가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나만 보더라도 늪에 빠진 듯 끈적였던 시곗바늘이 다시 경쾌하게 돌기 시작했으니까. 아니, 이제는 내가 시계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나의 창업은 1년 뒤 사무실을 얻는 날이 아니라, 오늘 응급실 스테이션에 선 지금 이미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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