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유통기한이 끝난 간호사의 미소

마음이 떠난 자

by 태섭

1. 마음이 떠난 자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김승호 회장님의 [이런 사람은 결국 사장이 답이다]에 대한 12가지 답변을 마쳤다. 내 안을 투과해 본 결과 나는 사업을 하지 않으면 병이 날 사람이었다. 그래, 이제 나가자. 아내의 든든한 지지까지 얻었겠다. 이제 망설임의 시간은 끝났다.


그런데 당장 사표를 던지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사장을 하고 싶은 이유(Why)에 대해서는 알겠지만, 어떻게(How)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그릇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릇 안을 채울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데드라인'을 만들기로 했다. 물론 퇴사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진짜 '데드(Dead)'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의 주도권을 되찾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죽음만큼이나 지독한 패배감을 줄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내가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최근 결혼 문화는 보통 1년 전부터 시작된다. 날짜가 박힌 청첩장은 일종의 계약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상견례, 촬영, 드레스, 메이크업, 집, 가전과 가구, 신혼여행, 답례품, 버스 대절, 마음가짐까지 어떻게든 완성해 나간다. 수많은 선택과 노동을 기어코 해내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날'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했는데, 안 하면 어떻게 할 건데?'라는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아무리 바쁜 일상 속에서도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결혼처럼 퇴사도 '그날'안에 나를 집어넣으면 어떻게든 움직이게 하지 않을까?


단순히 3교대가 싫어서, 사람이 미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나만의 사업이라는 비행기를 띄우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주로가 필요했다. 하나씩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결국 개인적으로 퇴사 날짜를 정했다.


2027년 4월 1일.


정식 간호사가 된 지 만 7년이 되는 날. 나는 임상의 마침표를 찍고, 내 인생의 창업식을 열기로 했다. 7년이라는 시간은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당당히 야생으로 나갈 '그릇'이 충분히 빚어지는 시간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멋진 활주로의 끝을 상상하는 순간 시곗바늘은 끈적한 늪에 빠진 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내 마음은 이미 병원 밖에 있었다. 출근을 하면 숙련된 업무는 지루한 반복이었다. 나를 지켜주던 응급실의 벽은 나를 가두는 차가운 감옥처럼 느껴졌다.


'아직도 시간이 이것밖에 안 됐어? 오늘따라 이렇게 안 가지?'


지난 6년, 시곗바늘은 늘 나보다 빠르게 달렸다. 파란색 유니폼이 어색하고 설레었던 신규 시절에도, 선배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 연차에도, 후배의 손을 잡고 이끌었던 여유로운 날들에도 시간은 늘 부족했다.


어느 순간 내 시계는 멈춰 섰다. 마음이 떠난 자의 시계는 한없이 느리게만 흘렀으니까. 1분 1초가 끈적하다. 늪처럼 발목을 잡는다. 설렘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열정과 배려마저 말라붙어 버렸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데, 나도 비행하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는 게 맞지 않을까.'


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토록 메마른 마음으로 계속 버텨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엄습했다.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은 욕망과 준비되지 않은 현실 사이에서, 나는 과연 이 멈춘 시계를 다시 돌릴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끝에서 거울을 쳐다봤다. 내 얼굴에 남은 마지막 미소마저 유통기한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2. 유통기한이 끝난 간호사의 미소


나는 상급종합병원 응급실 전담 간호사다. 내 업무는 교수님의 진료를 보조하는 것이지만, 현장에서 내 역할은 환자와 병원 시스템 사이의 '완충지대'에 가깝다.


응급실의 공기는 색깔로 나뉜다. 하얀색 의사 가운을 입은 교수님이 폭풍처럼 환자를 보고 사라지면,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나만 덩그러니 남겨진다. 나는 남은 질문들을 하며 환자의 신체 사정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때부터 환자의 의심 가득한 시선이 내 목에 걸린 사원증에 머문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간호사가 왜 이런 걸 물어봐?"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몇 분이 계신다. 그들에게 내 전문성은 사원증에 적힌 작은 글자보다 가벼웠다. 나는 익숙한 소개를 한다. 전담 간호사이며, 정확한 치료를 위해 초진을 작성하는 중이다. 이 정보는 교수님께 전달될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가 미소 짓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니까짓 게 뭘 아냐"는 식의 무례함이 선을 넘을 때, 나도 사람인지라 미소가 급격히 메말라갔다.


결국 미소 대신 '효율'이라는 차가운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나를 불신하는 행위가 당신의 지갑(검사 비용)과 시간(대기 시간)을 갉아먹을 것이라는 서늘한 경고.


"환자분, 저에게 정확히 말씀 안 하시면 원인을 찾기 위해 온갖 검사를 다 할 겁니다.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릴 텐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생존 방식이자, 병원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굴리기 위한 방법이었다.


물론 내 미소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생사가 오가는 위중한 환자들에게는 "환자분 저희가 최선을 다할게요"라는 따뜻한 말과 1초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처치를 쏟아붓는다. 긴장하고 있을 그들의 보호자에게도 따뜻한 미소를 장착하고 누구보다 친절하게 상세한 설명을 건넨다. 그들은 이곳에 '진짜' 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급종합병원까지 올 필요가 없는 '경증 환자'들을 마주할 때다. 술에 취한 행패, 긁힌 손가락으로 119를 타고 온 사람, 이미 멈춘 코피, 무례한 요구를 하는 환자...


가장 비참한 순간은 따로 있다. 옆 침대에서 심폐소생술(CPR)이 진행되며 타인의 흉부가 부서져라 눌리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나부터 빨리 봐달라, 나도 저 사람처럼 죽을 것 같다"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볼 때다. 그 순간 내 안의 인류애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신뢰 자체가 박살이 나고 있었다.


연차가 쌓여 갈수록 그랬다. 억지 미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경증 환자가 오면 색안경을 끼고 다가가는 순간이 많아졌다. 처음엔 갓 구운 빵처럼 따뜻했던 것 같은데, 무례와 이기심이라는 공기에 노출되어 서서히 수분을 잃었다.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할수록 내 얼굴엔 유통기한이 지나 먹을 수 없는, 딱딱하고 서늘한 표정만 남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몰랐다. 나를 이토록 지치게 만든, 인류애를 저버리게 한 이 '경증 환자들'이야말로 내가 앞으로 맞이해야 할 진짜 '시장'이었다는 것을. 병원 밖 야생에서 내 사업이라는 비행기를 띄워줄 가장 강력한 사람들이자, 나의 '첫 번째 고객'이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다음 편 예고]

#9 무례한 환자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유


나는 멈춰버린 시간을 어떻게 다시 흐르도록 바꿀 수 있었나?

인류애를 생각하게 만든 'JS 경증 환자'가 어떻게 내 사업의 'VIP 고객'으로 변했나?

다음화에서 이어집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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