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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Feb 06. 2022

전설의 팀이 잠든 토리노의 수페르가 언덕

일 그란테 토리노의 수페르가 참사 현장을 찾다

토리노를 찾아온 가장 큰 이유 '일 그란데 토리노(Il Grande Torino)' @풋볼 보헤미안

토리노에 도착했을 때 왠지 모르게 설렜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명문 ‘비안코네리’ 유벤투스의 본거지에 왔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다. 토리노를 방문하는 목적은 다른 팀에 있었다. 바로 토리노 FC다. 아니 뜬금없이 토리노 FC냐라고 되물을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분명 명문 혹은 인기 팀이란 기준에서 볼 때 토리노 FC는 부합하지 않는 팀이긴 하다. 앞서 언급한 유벤투스 혹은 밀라노를 양분하고 있는 AC 밀란이나 인터 밀란과는 감히 비교하기엔 현재 위상이 다소 초라한 게 현실이니까.     


그래도 토리노 FC는 매력적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전제를 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긴 하다. 그래도 그들은 축구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과거를 지닌 클럽이었다. 그 점에 오래전부터 마음이 빼앗겼었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도 역사상 최강 중 하나로 거론되는 전설의 팀, 이른바 ‘일 그란데 토리노’의 흔적을 찾으러 토리노에 왔다.     


한국에서는 1940년대 이탈리아와 유럽 축구를 주름잡던 강팀 그란데 토리노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사실 별로 좋지 못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토리노 FC 선수들이 비극적 항공 사고인 ‘수페르가 참사’를 당하는 바람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정도로만 소개되기 때문이다.      


일단 지구 반대편 축구팬들이 그란데 토리노를 기억하기에는, 그들이 전성기를 보냈던 때가 시기적으로 좋지 못했던 감이 있다. 그란데 토리노의 전성기는 1940년대 초·중반이었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다. 전후에는 더욱 심각했다. 패전국으로 전락한 이탈리아는 심각한 전후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던 때라 축구는 사치라 여겨질 수밖에 없었으니 다른 시대의 ‘지존’들에 비해 조금은 덜 조명받는 듯하다. 그래서 이참에 그란데 토리노에 대해 비중 있게 소개하고자 한다.

1940년대 토리노 FC 베스트 일레븐, 그리고 당시 유벤투스와 토리노 더비 @풋볼 보헤미안

그란데 토리노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팀이다. 발렌티노 마촐라·실비오 피올라·비르질리오 마로소·마리오 리가몬티 등 지금도 이탈리아 내에서 역대 최고 선수로 불리는 전설들이 몸담았던 팀이다. 당대 토리노 FC 선수들의 위상은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살필 수 있는데, 이탈리아의 선발 라인업 전원을 토리노 소속 선수들이 채운 적도 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다. 전술적 측면에서도 그란데 토리노는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1940년대 유럽의 주류 축구 전술은 아스널을 이끌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허버트 채프먼의 일명 WM 포메이션, 혹은 비토리오 포초 감독이 주창했던 메토도였다.      


이때 그란데 토리노가 당시 기준으로는 혁신적 전술을 고안했다. 공격 지향적인 WM 포메이션과 수비 안정에 중점을 둔 메토도의 장점을 결합한 이른바 ‘시스테마’를 창안한 것이다. 시스테마는 당대에는 최적의 공수 밸런스를 유지하게끔 하는 전술로 통했다. 특히 이전까지 포워드에 비해 크게 빛을 보지 못했던 포지션인 미드필더가 ‘경기 운영의 방향타’란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 전술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하다.      


최상의 전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선수들이 뭉쳤으니 성적이 압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란데 토리노는 1940년대에만 리그를 다섯 번 제패했으며, 이 중 1945-1946시즌부터는 4연패를 달성했다. 특히 그 위상이 절정에 달했을 때인 1947-1948시즌에는 더욱 대단했다.     


공식전 40경기를 치러 29승 7무 4패를 기록했다. 125골(경기당 3.13골)을 터뜨렸으며, 실점은 33골(경기당 0.82골)에 불과했다. 승률은 무려 72.50%에 달했을 정도로 엄청난 기세를 자랑했다. 그런데 이 위대한 팀이 1949년 5월 4일 항공기 사고에 휘말려 한순간에 증발하고 말았다. 이 비극적 사고가 바로 후세 사람들이 일컫는 ‘수페르가의 비극’이다.     


수페르가의 비극은 토리노의 전성기를 단숨에 끝내버림은 물론 1950 FIFA 브라질 월드컵 우승을 노리던 이탈리아가 대회를 망치고, 십수 년 동안 심각한 침체기에 들어서는 단초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어쩌다 사고가 났을까?      

수페르가 비극 당시 사고 현장 @풋볼 보헤미안

한국에서는 ‘토리노에서 선수단을 실은 항공기가 안갯속에서 시계(視界) 착륙을 시도하다, 수페르가 언덕 위에 있는 작은 성당 벽에 부닥치는 사고’를 일으켰다고 간단히 설명되고 있다.


현장에서 재구성한 사고는 이렇다. 토리노 상공까지 접근한 항공기는 지금처럼 각종 항공 보조 장치의 도움 없이 악천후 속에서 무리한 착륙을 시도하다, 구름 사이에 순간적으로 가렸던 수페르가 성당과 산을 발견하지 못하고 충돌한 듯하다.     


그간 글로만 당시 사고를 접하다 보니 언덕 위 작은 성당을 항공기가 들이박는 그림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토리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이 사고 현장, 즉 수페르가 언덕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구심을 풀 수 있었다. 한국에서 소개하는 대로 수페르가 언덕 위 성당 벽이 맞긴 하다. 그러나 사고 현장인 수페르가 성당은 결코 작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언덕이 아니라 토리노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산 정상이었다. 이 성당에 가려면 토리노 시 외곽에 자리한 사씨 역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데, 산 정상까지 향하는 강삭철도로 무려 20분 이상 올라가야만 한다.      


수페르가 성당 앞 광장은 도저히 항공기 사고가 일어난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지만, 성당 뒤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통해 약 5분 정도 걸어가면 수페르가 참사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항공기가 충돌했던 성당 벽이 여전히 굳건히 서 있으며, 그 주변에는 희생된 그란데 토리노 선수들을 위한 추모비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많은 토리노 팬이 추모하기 위해 두고 떠난 토리노 FC의 머플러가 가득한데, 이곳은 토리노 FC 팬들은 물론이고 선수단도 매 시즌을 시작하기에 앞서 의무적으로 방문하는 장소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전설적 선배들 앞에서 다가오는 시즌을 멋지게 치르겠다는 다짐을 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문제의 수페르가 성당 @풋볼 보헤미안

즉, 선수든 팬이든 토리노 FC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는 성지 순례하듯 찾아가야만 하는 성역화한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곳은 토리노 FC 팬들만 찾는 곳이 아니다. 토리노 FC를 상대하러 원정 온 적잖은 다른 팀의 팬들도 자신들의 머플러를 걸어두고 갔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당시 사고를 조롱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멀리서 찾아온 조문객으로서 정중하게 추모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추모 대상이 꼭 그란데 토리노가 아니어도 괜찮은 듯하다.      


지난 2018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때문에 세상을 떠났던 전 이탈리아 국가대표 수비수 다비데 아스토리를 추모하는 물건도 놓여 있었다. 피오렌티나의 팀 컬러인 보라색 리본이 아스토리의 얼굴이 새겨진 카드에 묶여 있었는데, 주변에 제법 많은 토리노 팬이 그 추모에 동참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마도 대선배인 그란데 토리노와 함께 하늘나라에서도 축구를 즐기라는 메시지가 아니었겠느냔 생각이 들었다. 수페르가 성당은 토리노 FC 팬만이 아닌 이탈리아 축구 팬 모두의 성지였던 것이다.      

수페르가 언덕 정상에서 바라본 토리노 시내. 저 멀리 알프스 산맥이 보인다 @풋볼 보헤미안
항공기가 충돌한 성당 뒷벽에는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풋볼 보헤미안

외지인들의 그란데 토리노 흔적 찾기는 대부분 여기서 마무리되는 게 보통이다. 토리노 FC는 거대 클럽이 된 유벤투스와 달리 클럽 차원에서 박물관을 운영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 토리노 FC의 홈으로 쓰고 있는 스타디오 올림피코 토리노는 애석하게도 그란데 토리노 시절 활용됐던 곳이 아니라 방문하는 데 별 의미가 없다.      


머잖은 곳에 스타디오 필라델피아라는 4,000석 규모의 작은 경기장이 자리하는데, 바로 이곳이 과거 그란데 토리노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프로팀의 훈련 구장 혹은 유소년 아카데미로서 기능하는 곳이라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다. 그렇다 해도 거기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토리노 FC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분명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리노 중심지에서 버스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외곽 지역에 ‘그라나타의 전설 그란데 토리노 박물관(Museo del Grande Torino e della Leggenda Granata)’이 자리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 전시 중인 물품을 보면 실로 놀랍다. 앞서 언급한 수페르가 참사 당시 잔해로 발견된 항공기의 랜딩 기어가 전시되어 있는가 하면, 옛 홈구장인 스타디오 필라델피아에서 뜯어온 목조 스탠드 등 그란데 토리노가 남긴 거의 모든 흔적을 생생하게 전시하고 있다.      


비단 그란데 토리노뿐만 아니라 사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걸었던 토리노 FC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세리에 A에 복귀했는지, 나아가 과거 그란데 토리노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는 만큼 토리노를 방문하는 축구 팬들에게 강력히 추천하고 싶은 장소다.      


그런데 이 장소에 전시된 물건보다 더 감명을 받은 게 있다. 바로 사람이다. 이곳은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단 직영’ 축구 박물관이 아니다. 그란데 토리노를 잊지 말고 후세에 전하자는 몇몇 뜻있는 토리노 팬들이 모여 운영하는 장소다. 물론 지자체와 구단으로부터 어느 정도 지원을 받긴 하지만, 생업에 종사하는 팬들이 귀중한 시간을 쪼개어 방문객들에게 구단의 역사를 전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      


토리노 FC의 위대한 역사를 알고 싶어 한국에서 찾아왔다고 하니 정말 놀라워하며 그란데 토리노와 관련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물론, 그저 방문객일 뿐인데도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현지인들에게 소개까지 될 정도로 큰 환대를 받았다. 이탈리아가 왜 축구에 미친 나라인지, 까마득한 과거라도 알뜰하게 챙기고 감사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후세의 팬들 역시 그란데 토리노 못잖게 위대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그라나타의 전설 그란데 토리노 박물관(Museo del Grande Torino e della Leggenda Granata)과 내부에 전시된 사고기 잔해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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