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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하리 Oct 23. 2022

3. 30대, 육아와 투쟁!

40대 후반, 나를 돌아보고 진짜 나를 찾는 마지막 기회

30대를 딱 두 단어로 말하라면 육아와 노동조합이다.

육아를 또 두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 시어머님과 불효다.




03년 10월 큰 딸을 낳았다.

03년 11월 말, 친정에서 4주 산후조리를 마치고 집에 오니 시어머님이 와 계셨다.

그때 벌써 우리 시어머님은 칠순이 훨씬 넘은 할머니셨다. (남편은 3남 4녀의 막내)

정말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결정을 남편도 시어머님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 문제의 씨앗이었다.

우리 남편은 “당연히 우리 엄마가 내 애를 봐야지”란 입장이었고,

우리 시어머님은 “막둥이 새끼는 내가 봐야지”하시며 지방에 있는 큰집에서 올라오셨다.

누나들의 희망인 우리 남편의 첫 아이는 모두의 축복이었다.

누나들도 그 축복이를 보러 당연히 우리 집에 자주 오셨으며(여기까지는 좋았다), 어머님이 우리 집에 계시니 우리 집이 갑자기 시누이들의 친정이 되었다.


어느 날도 누나들이 우리 집에 왔던 날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큰아이 젖을 물리는 게 창피해(나는 아직 29살이었다.) 방에 들어가서 수유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둘째 누나가 따라 들어오셔서 그 모습을 지켜보시며

“그냥 거실에서 수유하지 왜 방까지 들어와서 유별나게 수유를 하냐. 가족끼리 왜 그래.” 하며 서운해하셨다.


또 한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나는 그래도 아이가 생긴 첫 해의 크리스마스여서 기념하고 싶었다. 사실 우리 가족끼리 좀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또 넷째 누나가 우리 집에 오셨다, 너무나 당연하게 연락도 없이.

남편은 친구와 당구를 치러 나갔고. 속상했다.

이런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이 미웠고, 우리 집이 내 집 같지 않았다. 그냥 나는 이 집에 애 낳아주러 온 이방인 같았다.

갑자기 참을 수가 없었다. 윗옷만 걸치고 무작정 뛰쳐나왔다. 애도 놔두고 그냥 나와 운전을 해서 친정으로 갔다.

그런데, 정말 그 어린 마음에도 친정집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릴 수가 없었다.

집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집으로 들어가면 엄마, 아빠가 너무나 걱정하실 것 같아 올라갈 수가 없었다.

차 안에서 엉엉 울었다. 2시간을 우니 젖이 불어서 서러움보다는 젖몸살의 아픔이 더 커졌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넷째 고모는 집에 가셨고 남편은 내가 뛰쳐나간 게 괘씸해서 씩씩대고 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셀 수도 없으나 나는 그때의 남편 얼굴을 잊지 못한다.

화나 있는, 미간에 주름이 잡혀 그 큰 눈으로 나를 죽일 듯 째려보는 그 얼굴을. (이런 생활을 10년을 넘게 했다, 지금은 절대 아니다. 사람이 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물리적 폭력만 없었을 뿐이지 정신적 폭력, 언어폭력은 지속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20대, 30대의 내가 안쓰럽고 가엽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표현을 하면서 나 스스로 나를 안쓰러워하는 게 많은 치유가 된다.


나 역시 착한 며느리는 아니었다. 처음에 남편과 어머님과 내가 같이 저녁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 대화는 대부분 어머님의 이야기였다.

“큰집 옆집 아무네 개가 새끼를 낳았다더라.”(정말 이런 이야기였다),

“사돈이 팔촌이 취직을 했다더라.”

나는 모르고 둘만 아는 이야기. 처음에는 맞장구를 쳤었다.

“어머니 그래요? 와 잘됐다!”

그 와중에도 우리 남편은 묵묵부답, 아니면 “아 그래?” 정도였었다만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가끔씩 나와 남편이 대화를 하면 어머님은 말을 끊고 이런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데 몇 주 후부터는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남편 역시 불만을 토로할 정도였으니.

아마 어머님은 가장 귀한 막둥이 아들은 뺏긴 것 같으셨던 것 같다. 나와 나름 남편 쟁취 싸움을 하셨던 것 같다.

그 이후에 나는 저녁을 잘 먹지 않았다. 소화가 안 된다는 핑계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다음부터는 어머님과 대화를 잘 안 하기 시작했고 그게 내가 어머님과 남편에게 할 수 있는 반항이었다.


어머니와는 이런 일이 반복되었고, 남편의 중립 입장으로 결국 남편이 없는 날 어머님과 나는 큰일이 있었다.

아직도 죄송스러우나 만약 그날이 없었다면 나는 이혼을 했거나 미친년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내 성격에 내가 나를 갉아먹었을 것이다. (이 내용은 생각하기 싫어 아직은 쓰기가 싫다)

그렇게 어머님은 큰집으로 돌아가시고 남편과 나는 2년 넘게 각방을 썼다.

어머님이 가시던 그날 어머님 방으로 짐을 옮기더니 나오지 않았다.

이사를 가도 방을 따로 쓰고, 한번 더 이사를 가면서 내가 먼저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니 그때서야 못 이기는 척 다시 합방(?)을 했다.

아이들을 회사 어린이집, 동네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키웠다. 그 와중에 주말부부도 했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 남편은 부산으로 발령받아 2주에 한번씩 올라왔었다. 그렇게 30대의 나는 불효를 했고 회사 어린이집의 은덕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노동조합일은 정말 하고 싶어 한 건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 친한 선배가 다니는 동아리방에 놀러 갔다 너무 친절한 동아리 선배님들에게 반해 그 동아리에 가입을 했고 거기가 노래패였다. 그렇게 민중가요라는 걸 배웠고, 팔뚝질을 배웠고, 제주 4.3 사건을 공부했다.

그렇게 간단히 발만 담근 나의 좌파 성향은 회사를 들어와서 1년도 채 되지 않아 시작된 장기간 파업 때 다시 발현되었다.

그때 나는 신입사원이어서 선배님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선배들은 나에게는 (노래패 경험이 있으니) 노래패, 덩치가 좀 큰 남자 동기들에게는 (팔팔하니) 빨간 모자를 씌워주며 저녁에 이탈하는 선배님들 가이드하는 일을 시켰었다.

그렇게 나의 노동조합 생활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이후 회사가 합병이 되고 두 기업의 문화는 너무 달랐으며 승진의 불공평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치적 문제에 직원들을 이용하기 시작하는 사측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여성국장, 지부장이 되었고, 그 일을 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밝혔던 업무가 없어지는 사태도 겪고 지역본부로 전출되었다.


지역본부에 가서 좋은 점도 있었다. 사실 지역본부 일은 본사 업무에 비하면 시간이 조금 여유로웠다. 그리고 총괄업무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 일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나같이 쫓겨 온 직원에게는 주요 업무를 맡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많았다.

그때 나는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는 나를 추스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목표를 잡아야 했다.

14년을 나름 열심히 일해 왔으나 아직도 나는 내가 뭘 잘하는지 몰랐고, 회사일이 예전처럼 재미있지 않았다. 그리고 더 배우고 싶었다. 다른 일도 해보고 싶었고 좀 더 연구하고도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영어공부였다. 그리고 그 공부 끝에는 ‘해외 석사학위 지원’이란 새로운 목표가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명씩 해외 석사학위를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으나 사실 아이들을 키우느라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일 년에 한 번씩 그 제도로 영국으로 떠나는 후배들이 부러움의 눈으로 보내주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도 생겼겠다, 새로운 목표도 잡아야겠다 생각하니 제일 먼저 떠오른 목표가 바로 이 ‘해외 석사학위 지원’이었다.

퇴근 후 동네 도서관, 커피숍을 돌며 영어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보던 토익 책으로 공부를 하는데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필사를 해가며 공부를 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지원할 수 있는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해 연말, 지원을 했지만 떨어졌다.

1등은 나였지만 3등이 선발이 되었다. 간부의 한마디가 1, 2등을 제치고 3등이 가는 기회를 만들어 줬다.

그 한마디는 “또 여자가 가?”였다.

2009년 이래로 여자, 남자, 남자, 여자가 갔고 다음이 내가 지원한 거였다. 1, 2등이 여자여서 3등 남자후배가 가게 되었다.

참 많이 씁쓸했다. 그 남자후배는 정말 친한 후배였는데 질투가 나서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많이 미웠다. (참 사람은 간사하다.)


이렇게 (타의로) 자숙의 기간을 겪고 다시 본사 언저리인 충청본부로 발령을 받았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때부터 좋은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회사에는 ‘청년중역’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조직(경영평가를 위한)이 있었는데 각 본부에서 한 명씩 착출 해서 청년중역 멤버로 보내야 했다.

충청본부 계획 총괄이었던 나는 아무도 지원을 안 하길래 ‘그래 40세까지 밖에 안 된다니 40세 넘기 전에 한번 해봐야겠다.’ 하고 (셀프) 지원을 했고, 본부에서 착출 당해 온 직원 중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내가 ‘의장’이 되었다.

아무 힘이 없는 윗분들이 보시면 우스운 조직이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내세우기 좋은 조직이었고 나는 사장님과 간부들을 대면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노동조합 간부일 때 보다 더 많이 불려 나갔고 이번에는 사측의 입장에서 대화를 하니 의도하진 않았지만, 정말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의 좌파, 빨간색은 점점 중간, 보라색으로 바뀌어갔다.

그리고 나는 나이 마흔이 되기 바로 직전 큰 기회를 하나 잡았다. 작년에 떨어졌던 해외 석사학위 지원이었다.


두 번째 석사학위에서 5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선출되었다. 청년중역 의장이 사실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사측에서는 전년의 미안함도 있으셨을 것이다. 그래서 얻게 된 기회. 나이 40에 아이들 데리고 남편 데리고 영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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