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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타하리 Oct 23. 2022

5. 40대, 내 마음대로 일해도 인정받는 회사

  우리 회사의 모든 업무는 절차서에 따른다. 누가 더 절차서에 맞춰 빨리 일하나 가 평가의 척도이고 성공의 지름길이다, 절차서에 맞게 조금 유연하게 대처하면 금상첨화다. 그런 일을 15년을 하니 재미가 없었고 나의 생각이 전달되지 않는 일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해외사업은 그렇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고, 마케팅이라는 것도 재무분석이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하나의 시스템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재무, 법률, 현지 상황, 수원국 정부의 의지, 한국의 지원규모 및 의지 등이 복합적으로 진행되는 유기체였다. 그때부터 난 해외사업 업무를 진정 즐기게 되었다.


  우선 네트워킹을 쌓는 일이 즐거웠다. 우선 한국을 보여주고 한국 철도를 경험해서 그들의 나라에도 이런 세상 편하고 안전한 시스템이 그들의 삶 속에 침투되길 바랐다. 인도네시아 정부 공무원들을 철도 및 인프라 관련 콘퍼런스, 개통행사, 공무원 초청연수 등 한국의 모든 지원 시스템 및 행사를 총동원하여 초청했다. 새벽 7시 반에 도착하는 분들을 마중 나가기 위해 5시 반 세종에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45살 평생 한 번도 안 가본 ‘남이 Island’를 수십 번 갔다. 2001년 결혼할 때 웨딩 촬영하고 한 번도 안 가본 경복궁은 그 이후 공무원들을 모시고 수시로 들락거렸다. 소공동 롯데호텔, 종각 the Plaza 호텔에 그분들을 안내하면서도 나는 공단 규정 출장 숙소비 7만 원을 맞추기 위해 종로 게스트 하우스나 서부역 허름한 모텔에서 잤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철도와 문화를 홍보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철도시스템, 운영에 관한 자료를 만들고 설명하고, 한국에서 지원 가능한 타당성 조사 등을 시행하며 철도에 대한 지식과 인도네시아에 대한 문화, 법률 등을 더 잘 알 수 있었다. 회사 업무로는 감히 만나지도 못할 주인니 한국대사님, 주한 인니 대사님, 인니 교통부 장관, 그리고 전기 분야 업무를 할 때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대기업 해외분야, 수출입은행, WB 등 다국적 은행 분들을 만나며 ‘내가 우물 안 개구리 생활을 했구나’ 하고 느꼈었다. 그야말로 넓은 물에서 노는 물고기 새끼가 된 것 같아 기뻤다.

  두 번째, 나를 인정해주는 상사들과 허심탄회하게 토론을 하며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뭔 일이든 칭찬을 하면 기대에 부응하고, 칭찬하신 상사에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고 한 번 더 자료를 찾고 검토하는 사람이다. 다른 본부와 달리 본부장실 문턱이 낮았으며 수시로 찾으셔서 나의 의견을 물어보셨다.

  처장님(내게 인도네시아 사업을 권유한 P부장님이 승진하셔서 처장님이 되셨다)은 계속 나의 의견에 반박하는 척하며 나의 의견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도와주시고, 나의 성과를 칭찬해 주셨다. 부장님은 내 말을 무조건 믿으셨고 격려해 주셨다. 말 그대로 일할 맛이 났다. 최고의 조합이었다.   

  그렇게 2년 일을 했더니 큰 프로젝트를 리딩 할 수 있는 권한을 내게 주셨다. 00 2단계 사업의 PMC를 수주하는 일이었다. 이 사업은 3년째 우리의 숙원사업이었다. 1단계 건설의 참여로 후속사업을 3년째 공들이고 있던 그런 사업이었다. 지금까지 쌓은 네트워킹으로 남보다 먼저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 정보를 토대로 인도네시아에 먼저 진출해 있던 Aecom, MMI 등 세계적인 엔지니어링 회사에 직접 찾아가 우리 회사의 조건을 말하며 파트너사를 찾았다. 그렇게 찾은 파트너사와 조금이라도 지분을 더 가지고 오려고 협상을 진행하며 우리 회사가 가져올 수 있는 최선의 지분을 가지고 왔고, 제안서 작성팀에 합류된 똑똑한 후배 두 명을 지원하여 결국 0.4점 차이로 우리 컨소시엄이 수주를 했다, 그때가 ‘19년 11월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큰 사업은 아니지만 우리 회사의 아이디어로 2년 만에 시작된 코이카 무상지원 사업 수주를 위해 오전에 사무실 업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매일 서울로 가서 제안서를 쓰고, 세종으로 내려오는 생활을 2주 동안 했었다.


그 사업 역시 12월 초 수주를 하며 3년 동안의 노력으로 사업 2개를 수주 성공하는 다시없을 연말을 보냈다. 나는 그 공으로 모든 인도네시아 사업 개발업무를 들고 ’ 19년 12월 18일 우리 회사 인도네시아 지사장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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