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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Sep 22. 2022

고시원 3~5일차

1. 대충 루틴이 잡혔다. 아침 10시쯤 일어나 11시쯤 청년지원센터에 간다. 아침은 굶고 점심은 사 먹는다. 19~20시쯤 나온다. 21시. 헬스장에 간다. 22시 30분까지 하고, 고시원에 돌아가서 라면을 먹는다. 잠은 새벽 2시쯤 잔다. 그리고 반복.


2. 고칠 게 너무 많다. 일단 기상시간이 너무 늦다. 늦어도 8시 30분, 9시에 기상하고 싶은데 먹을 걸 아끼려고 고시원에서 먹다 보니 늦게 먹고 늦게 자게 된다. 게다가 이불이랑 베개가 없어서 목이 불편하고 아침에는 추워서 떨면서 깬다.


3. 오늘 이불과 베개를 사려고 한다. 음식은 운이 좋게도 유통기한 임박 음식을 검색하다가 닭가슴살이 싸게 올라와서 바로 구매했다. 공용 냉장고에서 누가 훔쳐먹을까 걱정이지만 그래도 감안할 정도로 저렴했다. 방안에 냉장고를 가동하면 가동되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공용 냉장고를 이용하고 있다. 아침, 저녁 닭가슴살 점심 외식을 하면서 식사 루틴도 굉장히 안정화됐다. 더 건강히 먹기 위해 견과류를 살까 고민 중이다.

4. 와이파이와 신발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첫날에 고시원장을 만나지 못해 와이파이와 신발장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있는 건 아니라고 해서 언제 만나나 했는데 2일 차에 바로 만나서 물어볼 걸 다 물어봤다.


5. 청년지원센터는 아주 편리하다. 콘센트가 있고, 에어컨과 공기청정기가 있으며, 청년들이 옆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 오랜만에 지원서를 냈고, 아르바이트도 구하고 있다. 음식물 반입 금지라고 해서 물만 먹으면서 버텼는데, 다들 커피 하나씩 들고 있다. 나도 3일 차부터는 커피를 마시면서 하고 있다.


6. 예전에 학원에서 일했는데, 서울의 같은 프랜차이즈의 학원이 또 비슷한 업무를 구하길래 지원했다. 운명일까.


7. 따릉이는 너무 편하다. 킥고X, 지쿠X 등 이것저것 많이 이용해봤는데 다들 10분만 타도 2000원씩 나온다. 그에 비해 따릉이는 1시간 이용권을 끊어도 1000원이다. 킥보드보다 안전하기까지 하다.


8. 서울은 역시 서울이다. 유니클로도 앞에 있고, 교보문고도 앞에 있고, 옷가게들도 지하철 타고 10분이면 다 갈 수 있다. 2일차에는 오랜만에 교보문고에 갔다. 유니클로에 가서 세일하는 5000원짜리 옷도 샀다. 아르바이트도 슬쩍 봤는데 꽤 많다. 대학생 때 이렇게 살았으면 재밌었겠다 싶다.

9. 헬스장에서 씻고 운동하는 것도 익숙해졌다. 오랜만에 인바디를 했더니 체지방률이 16%까지 올라갔다. 잠을 잘 못 자는 건 오랜만에 운동하는데 운동 강도도 엄청 늘려서 그런 거 같다.  

10. 저번에 라면 먹기가 애매하다고 했는데, 이제 좀 알 거 같다. 방에 가져가서 먹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부엌에서 서서 먹는 사람도 있다. 해보니 나쁘지 않다. 방에 가져가서 자리 잡고 먹느니 그냥 서서 먹는 게 훨씬 빠르다.


11. 수면이 애매한 이유 또 하나는, 소음 때문이다. 왜 밤 10시 11시가 되도록 다들 이어폰을 안 끼고 무언가 들으시는 건지, 다들 출근은 안 하는지 밖에서 술 먹는 소리가 들린다. 늘 이어폰을 끼고 자게 된다.


12. 나쁘지 않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없어 습하지 않다. 세탁비를 따로 받지 않는다. 옥상에서 담배도 필 수 있다. 업무중심지와도 가깝다. 잘만 풀리면 좋겠다. 어제는 유현준 교수님의 유튜브를 봤는데, 누군가의 30년 커리어를 나열하면 좋아 보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들 사이사이에 고난과 역경을 가지고 사나 보다.


5일차


1. 아침 기상이 힘든 이유를 알겠다. 외창이 없으니 태양빛으로 기분 좋게 일어나는 경험을 할 수가 없다. 기분 탓인지 허리도 아픈 거 같은데, 매일 운동을 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2.  운동을 하면서 관련 영상을 계속 듣고 있다. 머슬 메모리라고 하나, 운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그 경험이 근육에 새겨져 오랫동안 안 하더라도 금방 운동량을 되찾는다는 개념이 있다. 확실히 첫날이랑, 지금이랑 드는 무게가 많이 다르다. 다음 주쯤 되면 한창 열심히 하던 정도로 돌아갈 수 있지 있을 거 같다.


3. 예전에 PT를 받을 때 엑셀로 세트수, 횟수, 부위 등을 나눠 정리한 게 있었다. 60kg 12회 3세트 이러면, 60*12*3=2160. 이런 전체적인 볼륨이 나오는데, 어제 생각이 나서 다시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기록과 데이터가 중요하다는 게 체감이 된다.


4. 4일 차에 모기를 발견했다. 첫날에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친 게 떠올라서 잡고 자려고 했는데 2번이나 놓쳤다. 괜히 새벽에 깨면 찝찝할 거 같아 핸드폰을 보고, 책을 보면서 기다렸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조그만 방에 흰색 벽이면 보일 법도 한데. 결국 새벽 5시쯤 잠에 들었는데 신기하게 물리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약국에 가서 살충제를 샀다.


5. 오랜만에 빨래를 했다. 옥상에 빨래를 널고, 아침에 걷으려 했는데 하필 비가 왔다. 그리고 하필 그날 모기를 찾느라 늦게 일어나서 일찍 걷지 못했다. 물이 넘칠 거 같이 쏟아지던 비도, 한 시간쯤 지나자 물이 빠졌다. 기껏 새벽까지 돌리고 널었던 빨래를 힘없이 줍고, 다시 세탁기에 넣고, 다시 건조기에 넣었다. 이 정도로 기죽어서는 안 된다.

6. 돈을 쓰면 기분이 좋다. 모기, 소나기로 기분이 안 좋아서 점심부터 짬뽕을 먹으러 갔다. 원래라면 닭가슴살을 먹어야 했다. 이후에는 카페에 가서 커피도 먹었고, 저녁에는 맘스터치 세트도 먹었다. 먹을 때는 좋았고, 돈을 쓸 때는 좋았지만 쓴 돈을 보니 좋지 않았다. 돈을 쓰면 기분이 좋지만, 돈이 없을 때 돈을 쓰면 금방 안 좋아질 수 있다.


7. 이불과 베개를 샀다. 확실히 잠이 나아졌다. 원래 당근 마켓으로 구매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무인양품에서의 가격이 나쁘지 않아서 바로 구매했다.


8. 서울을 지나가다 보니 시위가 자주 보인다. 예전 의경 때는 마음이 복잡했지만, 이제는 복잡할 틈도 없다. 맘스터치 세트를 늦지 않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


9. 안정됐다. 먹을 것도 구비해뒀고, 먹을 곳도 정리해뒀고, 시간을 보낼 공간도 알아뒀다. 그리고 이제는 좀 외롭다. 알아보러 다닐 때는 외로울 틈도 없었는데, 이제 하나둘씩 안정되니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밤 11시 헬스장에서 나올 때, 젊은 여자들이 와인을 마시러 가고, 회사원들이 회식을 하는 모습은 혼자인 내 모습과 대비된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어떠한 금전적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다. 친한 친구들은 회사원, 대학원생이고 본업뿐 아니라 하고 있는 게 많아 연락하기도 민망하다. 애꿎은 인스타그램만 보고 있다.


10. 당근 마켓으로 옷을 구매했다. 2~3년 전에 괜찮게 봤던 브랜드인데 가격이 너무 좋았다. 자기 집으로 와도 된다길래 갔는데,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30평 아파트, 따로 둔 드레스룸,  한두 가지 브랜드로 가득 채운 옷장. 거실 가운데 켜 둔 에센셜 채널. 싱글남이 꿈꾸던 그런 곳이었다. 나이는 40대쯤 되셨을까.


옷만 해도 몇 억 원은 되어 보였다. 옷 구경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에는 명함까지 받았다. 지루하던 차에 오랜만에 새로운 자극을 받았다. 다시 한번 멋있게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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