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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안 Sep 30. 2022

고시원 11일차

배가 고파 잠 못 들다

1. 일은 내 시간과 자유를 어느 정도 내주는 거지만 이건 심하다. 어제오늘은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들이 날짜를 헷갈렸으면서 오후 12시 아르바이트를 2시간 전에 취소했다.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는 컴퓨터 중이라 30분 정도 전화를 못 받았다고, 다른 사람이 하게 됐다고 취소됐다. 코로나가 심해졌다고 행사가 갑자기 취소됐다. 3개의 아르바이트가 하루 이틀 만에 다 취소됐다. 말이 하루 이틀이지, 나름 일정을 짜려고 며칠 전부터 연락했던 게 갑자기 다 초기화됐다. 특히 코로나 변명은 심하다. 일 년 전 십만 명씩 나오던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그 정도도 아닌데.


게다가 이 사람은 며칠 전부터 3일인 거죠? 2주 할 수 있나요? 3일 하시나요? 코로나 때문에 취소됐어요. 괜찮다면 3일 할래요? 밤 10시 11시마다 연락을 한다. 아마 2주 할 사람을 구하다가 펑크 나서 여기저기 연락하고, 구해서 나를 코로나 핑계로 뺐다가, 다시 펑크 나서 또 연락하는 거 같다. 혹하다가도 또 일정 장난칠 거 같아 무시했다. 당근마켓에서 중고거래 약속 파투를 비매너로 신고할 수 있는 것처럼, 아르바이트에서도 신고 기능을 도입했으면 좋겠다.


2. 한 스타트업에서 면접 메일을 받았다. 면접 일정을 회신했더니 내부 이슈로 인해 면접이 갑자기 연기됐단다. 9시에 메일했는데 갑자기 10시에 급한 일이 터졌다라. 이해가 안 된다. 인턴부터라도 시작해서 개처럼 일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다. 아르바이트도 다 취소돼서 그냥 오늘은 안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막말로 내가 해당 기업이 하려는 분야에 대해 1일 1 포스팅하고, 주말에는 인턴 1일 차부터 주제로 브런치랑 블로그에 올리면  조회수도 꽤 나올 텐데, 이 정도면 그냥 최소비용으로라도 데려가서 한 번 써보는 게 낫지 않나? 어렵다.

3. 배가 고파 잠 못 드는 경험을 오랜만에 했다. 바디 프로필을 준비할 때 빼면 처음인 거 같다. 어제는 아침을 곤약젤리로, 저녁때까지는 컴퓨터를 하면서 커피로 허기를 달랬다. 저녁에는 고시원에서 작성할 서류가 있다고 해서 20시에 돌아갔다. 도착했는데 고시원장이 없어 전화했더니, 방에 있으면 노크하겠단다. 일단 배가 고파 닭가슴살을 데워 먹고 20시 30분까지 기다렸다. 그래도 노크가 없어 졸다 일어났는데 22시였다.


뭔가 하기도 애매하고 밥 먹기도 애매한 시간이라 헬스장에 가서 두 번째 운동을 했다. 돌아와 컴퓨터를 하는데 미친 듯이 배가 고팠다. 운동은 볼륨 꽉꽉 채워했는데, 먹은 건 대충 계산해도 600kcal가 안 됐다. 닭가슴살 2개, 셰이크 하나, 커피 하나, 곤약 젤리 4개. 성인 남성 1일 권장량이 2500kcal다. 급하게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이라도 먹으려 했는데 남은 게 없었고, 근처 국밥집도 다 문을 닫았었다.


고시원에서 라면을 끓이면 시끄러운 것도 시끄러운 거지만 내일이 걱정됐고, 닭가슴살과 셰이크는 하루에 2번씩 먹다 보니 아무리 배고파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자볼까 했는데 너무 정신이 또렷해서 새벽까지 잠을 못 잤다. 결국 유통기한 임박 볶음밥이랑, 아몬드, 냉동 블루베리를 사고 새벽 네시에 잠을 잘 수 있었다. 누가 좀 훔쳐먹어도 이게 낫겠지.

4. 결과적으론 안 먹기를 잘했다. 새벽 늦게 잤지만 10시에 기상했고, 피곤은 했지만 먹지 않아 정신은 또렷했다. 바로 컴퓨터 하러 청춘지원센터로 출발했다.


5. 방에서 뭐가 하기 싫은 이유는 텁텁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를 오래 하다 보면 아무리 창을 열어도 내 열기와 내 숨, 노트북의 열기가 방에 가득 찬다. 그 방에서 누워서 자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늦게까지 차라리 두 번 운동을 하고 밤늦게 와 피곤한 채로 바로 자려고 한다. 방 안에서 내가 살아서 배출하는 것만으로 내가 불쾌해지는 걸 느끼면서, 신영복 작가가 감옥에서 여름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만으로 불쾌하다고 한 게 떠올랐다. 서글프다. 그래도 오늘도 늦게까지 글을 쓴다.

 

6. 오늘은 영화를 봤다. 아르바이트, 면접 취소 등으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컴퓨터를 하긴 했지만 집중도 되질 않았다. 마침 세일할 때 쟁여둔 영화티켓 유효기간도 이번 달까지라 기분전환을 하러 갔다.

7. 영화는 재밌었다. 해외 영화는 자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짱구는 옛날부터 더빙으로 봐서 그런지 더빙도 꽤 괜찮았다. 메시지도 좋았는데, 일본에서는 역작 <어른 제국의 역습>과 비교될 정도라고 한다. 보면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8. 애인도 잠깐 보러 갔다. 내가 고시원에 들어가고, 애인은 개강하면서 자취를 해 거리가 많이 가까워졌다. 그녀는 최근 취업준비를 시작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시작했는데, 오늘 처음 정식으로 입사지원을 했단다. 고생한 거 같아 디저트를 하나 사갔다.


부모님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좋은 날이 아닌, 힘든 날 맛있는 걸 사가는 것. 내가 힘들 때 상대방이 기뻐하는 걸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게 있다. 나는 그녀가 정말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해서 좋아한다. 쉽게 미디어에 빠져들고, 쉽게 울고 웃고 화내며, 기름지고 몸에 안 좋은 것들만 좋아한다. 보기 드문 평범한 여자다.


9. 부모 이야기가 나와서 적는데, 요즘 "자란다"라는 앱을 보고 있다. 유아부터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를 대학생 나이대의 청년이 봐주는 서비스인데, 아르바이트 대신 이런 걸 할까 고민 중이다. 대학생 때 교육도 들어놨고, 독서봉사도 초등학생 대상으로 해서 하려면 당장 하겠지만 취업준비생이라 몇 달, 아니 몇 주도 못할 수 있다는 것,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교육시키지' 나름의 실험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게 조금 걸린다.


최근 애인이 적성검사를 준비해서 같이 풀어봤는데, 표정 맞추는 검사에서 "음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이 처졌군. 슬픔이야" "눈을 부릅뜨고 입을 다물고 있군. 분노야" 혼잣말하면서 풀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애인은 슥슥 쉽게 풀었는데, 나만 그 파트에서 많이 틀렸다. 이렇게 고시원에 살면서 책만 읽고 글만 쓰다 정말 사회성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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