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암 진단과 유럽 여행

by 구도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집과 병원을 오가는 울적한 일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곳으로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유럽여행 가면 나중에 커서 기억이나 하려나?"

"애들은 휴양지 가서 수영하고 하루 종일 쉬는 게 최고야, 괜히 유럽 가서 사서 고생하지 마"


아이를 출산하기 전 나는 남편과 여행을 자주 다녔다.


오래 축적된 시간에서 주는 무게감과 고즈넉함이 좋아

나는 유럽의 고도시들을 찾았었다.


2018년 아이를 출산하고 이후 코로나까지 이어지는 이벤트들에

유럽여행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고 스멀스멀 유럽여행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피어났다.


주변 친구, 동료들은 만류하는 쪽이 더 많았다.


나 역시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망설이고 있었다.


올해 6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다니던 직장을 휴직하고 2주에 한 번씩 대학병원에서 항암제를 정맥주사로 투여받기 시작했다.


담당교수는 나에게 기수는 4 기지만 다른 곳에 전이가 없어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니라 했다.


어쩌면 '아직은'이라는 부사를 제외하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당장 몇 달 뒤에 죽는다는 시한부 인생 통보는 없었지만,

4기라는 기수는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내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거 그냥 할까.'


남편에게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남편 역시 나의 암진단에 꽤나 무서웠던 탓인지, 내 말에 순순히 응했다.


그리고 10월에 추석 연휴가 긴 것을 발견하고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프라하 In, Out 직항에 저렴한 항공료.


동유럽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역이었고,

렌터카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10월까지 한 달 남짓 남은 날, 동유럽 여행 항공권을 결제했다.


예전 같았으면 파워 J인 내가 절대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이었다.

출산 전 유럽 여행을 갈 때만 해도 엑셀에 표를 그리고 분 단위로 계획을 짰던 나다.


암 진단 이후 '인생 될 대로 되라지.'라는 마음 가짐으로 살다 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유럽여행 항공권을 결제하는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계획형 인간의 태생이 태생인지라,

이제 현실적인 부분들에 대한 우려가 조금씩 피어난다.


'매일 항암약도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하고,

부작용 때문에 먹어야 하는 간수치 조절 약이랑 갑상선 약도 시간 맞춰 챙겨 먹어야 하는데.'

'항암 부작용 때문에 많이 걸으면 발바닥에 수포가 생길 텐데, 유럽 가서 안 걸을 수도 없고, 어떡하지.'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집과 병원을 오가는 울적한 일상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곳으로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즐거움과 신남인가.'


그렇게 항암 투병 중인 엄마와

마음은 앞서지만 세심함은 좀 부족한 남편,

그리고 아직은 세상에 때 묻지 않은 어린 초등학생 두 명이

동유럽 여행 준비에 착수했다.




제 삶의 한 순간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구도


[사진 출처]

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