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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도군 May 22. 2017

진짜로, 이 분 말도 일리가 있다.

'용감한 소녀'와 '돌진하는 황소'를 둘러싼 복잡한 뒷이야기

역자 노트: 이 글은 사진작가인 Greg Fallis의 seriously, this guy has a point를 번역했다. 나도 당시 ‘용감한 소녀’ 상에 대한 논란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 글은 내가 가지고 있는 관점을 많이 바꿔놓았다. 원문은 매우 오래전(4월)에 쓰였으나, 지금에라도 번역해본다.


며칠 전 나는 비유적으로 말하면 한 방 먹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은 한 5주 전쯤 맨해튼의 금융 지구에 ‘용감한 소녀’ 상이 만들어진 이후로 계속 토론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러한 토론에 한두 개 정도의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최근 대부분의 ‘용감한 소녀’ 상과 관련된 댓글은 ‘돌진하는 황소’ 상을 만든 조각가 아트투로 디 모디카 Arturo Di Modica가 한 말과 관련이 있다. 그는 ‘용감한 소녀’ 상이 없어지길 바란다고 말했고, 그로 인해 평생 먹을 욕은 다 먹고 있다. 내가 한 방 먹었던 건 거기에 내가 단 댓글 때문이었다.


“이 분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 일은 한 세 가지의 다른 토론에서 일어났고, 각각의 상황에서 나는 왜 이 모디카의 말이 일리가 있는지 설명하고 (아래에 설명하겠다) 대부분 상대방은 내 말에 동의하거나 (인터넷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답게) 무시했다. 하지만 하나의 토론에서는 내 댓글에 이런 대댓글이 달렸다.


“여자가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싫어하는 남자들이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용감한 소녀' 상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솔직히 말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완벽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다. 그리고 나도 동의하는 바다. 그리고, 뉴욕시의 시장인 빌 디 블라시오도 동의할 거다. 그가 제일 먼저 말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마 그의 홍보실 직원 중 하나가 제일 먼저 말했을 거다)


하지만, 진상은 이렇다. 내 댓글에 대댓글을 단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아르투로 디 모디카가 하는 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두 의견이 완전히 상극되는 의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역사를 설명해야 하는 점에 대해 미리 사과하겠다. 나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역사를 끔찍이도 싫어하거든. 하지만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니 시작해보자. 1987년에, 전 세계적인 증시 시장 공황이 찾아왔다. 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최소한 이 토론과 관련해서는 그렇다) 모든 곳 − 정말 모든 곳 − 의 증시 시장이 무너졌다. 시칠리아에서 이민을 와 막 미국 시민이 된 아르투로 디 모디카는 ‘돌진하는 황소’ 상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돌진하는 황소를 형상화한 동상이었다. 그는 이걸 만드는데 2년을 썼다. 동상은 7000파운드(약 3,175kg - 역주)가 넘었고, 디 모디카는 사비 35만 달러(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약 76만 5,000달러, 즉 8억 5,440만 원 - 역주)를 털어서 만들었다. 그는 황소가 “미국인의 힘과 능력”을 표현하길 바랐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지구에 상을 트럭으로 몰래 운송한 다음, 어떠한 허락도 없이 동상을 설치했다. 아마 지금까지 행해진 게릴라 자본주의 예술작품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중요한 작품일 거다.


사람들은 동상을 좋아했다. 뉴욕 증권거래소를 운영하는 개자식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경찰을 불렀고, 동상은 곧 압수됐다. 온갖 사단 끝에 시청에서는 임시적으로 동상을 설치하기로 했고, 사람들은 좋아했다.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돌진하는 황소’는 뉴욕시에 일시 대여 형태로 설치돼 있으며, 여전히 디 모디카의 소유이고, 뉴욕시의 가장 잘 알려진 상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르투로 디 모디카 (베레모를 쓴 남자)

그리고 시간은 흘러 올해 3월 7일, 국제 여성의 날의 전날이 됐다. ‘용감한 소녀’가 ‘돌진하는 황소’ 앞에 당당히 서 있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표면상으로 봤을 때는, ‘돌진하는 황소’처럼 또 다른 형태의 게릴라 예술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돌진하는 황소’와 달리, ‘용감한 소녀’는 의뢰를 받고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도 개인이 아닌 2조 4천억 달러(약 2,682조 원 - 역주)가 넘는 자금을 가진 투자 펀드인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 State Street Global Advisors’라는 곳에서 의뢰한 것이었다. 만만찮은 돈이다. 이 동상은 ‘맥칸 McCann’이라 불리는 국제 홍보대행사의 광고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고, 스테이트 스트리트 글로벌의 ‘성 다양성 인덱스 Gender Diversity Index’ 펀드가 만들어진 지 1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이 펀드가 나스닥에서 쓰는 티커 심벌(주식 시장에서 거래되는 회사를 나타내는 상징 문자. 예를 들면, 애플의 티커 심벌은 AAPL - 역주)은 ‘SHE’다. 마지막으로, ‘용감한 소녀’ 아래에 있는 동현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리더십에서 여성의 힘을 알아라. 그녀(SHE)는 변화를 일으킨다.
Know the power of women in leadership. SHE makes a difference.


자세히 보면, 그녀(She)가 아닌 SHE로 쓰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SHE는 소녀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나스닥 티커 심벌을 지칭한다. 게릴라 예술이 아닌, 매우 영리한 마케팅 전술인 것이다. 여기서 그 영리함이 드러난다. ‘용감한 소녀’는 디 모디카의 동상에서 메시지의 힘을 얻는 셈이다. ‘용감한 소녀’를 조각한 크리스틴 비스발 Kristen Visbal도 이를 일부 인정한다. 그녀는 동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녀는) 황소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당당하고, 자신의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황소도 그걸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결국 황소가 이 동상의 메시지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용감한 소녀’가 다른 곳에 배치됐다면 여전히 멋진 동상이었겠지만, ‘돌진하는 황소’가 없었다면 ‘용감한 소녀’는 용감해질 대상이 없어진다. 디 모디카의 황소가 없었더라면, 즉 그 황소가 제공하는 전후 관계가 없다면, 그냥 ‘당당한 소녀’가 될 뿐이다.



그리고, ‘용감한 소녀’는 ‘돌진하는 황소’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미국인의 힘과 능력”을 표현하려던 디 모디카의 목적과 달리, 이제는 여성과 소녀들을 억압하는 위협으로 보인다. 가부장재의 억압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용감한 소녀’는 ‘돌진하는 황소’의 힘과 능력을 이용했다. 물론 디 모디카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제적인 투자회사가 국제적인 홍보대행사를 통해 가짜 게릴라 예술작품을 만들어서 그가 만든 진짜 게릴라 예술작품의 의미를 파괴하고 바꿔버렸으니까. 어떤 아티스트였어도 분노할 만하다.


보았는가? 표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예를 들면, 나와 같이) 예술의 이용이라는 관념을 이해한다면 더더욱 복잡하다. 나도 누군가의 예술작품을 이용해본 적이 있으니까. 이용 예술은, 거의 100% 파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파괴는 (거의 100%) 권력의 전통과 질서를 통해 유지되는 사회적 구조를 허물려는 소외된 집단의 전문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용감한 소녀’의 경우에는 이 파괴가 광고 캠페인의 일환으로 국제적 자본주의자들이 행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때문에 이들을 응원하기가 힘들어진다. 정말 심각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소녀’는 서 있다. 난 소녀가 피터 팬의 포즈로 서 있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든다. 그리고 이 소녀가 마케팅 도구라는 점이 매우 싫다. 그녀가 젊은 여성과 소녀들에게 영감을 심어주려고 하는 게 정말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녀가 사기라는 점이 매우 싫다.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녀가 존재하게 된 이유가 매우 싫다.



나는 ‘용감한 소녀’를 좋아하면서도, 증오한다. 그녀는 상업화가 중요하면서 의미 있는 것(그리고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것)을 상품화해버리면서 똥을 뿌려버린 좋은 예가 된다. ‘용감한 소녀’는 아름답지만, ‘SHE’를 팔기 위해 존재한다. 그게 그녀(she)가 거기 있는 이유다.


디 모디카가 요구하는 대로 ‘용감한 소녀’를 철거해야 할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다면 슬플 거 같다. 그렇다면 반대로 디 모디카는 그냥 그의 동상을 가져가야 할까? 결국 동상은 그의 것이니까,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만약에 그런다면 그에게 잘못을 따질 수는 없다. ‘용감한 소녀’는 그가 한 것의 의미를 완전히 바꿔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런다면 정말 유감일 것이다. 난 자본주의의 팬은 아니지만, 정말 아름다운 예술작품이거든.


난 이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르투로 디 모디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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