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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A Oct 11. 2021

[환각]

KUA CONTE # 14 : 쿠사마 야요이 이야기 

“ 너 여기서 뭐 하고 있니?


나는 화들짝 놀라 그림을 그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엄마는 뱀이 나올 수 있으니 이 꽃밭에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었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 나야 나! 여기!!


다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는데 땅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너 나 안 보여?


그 소리가 들린 곳은 땅속이 아니라 땅에 심겨 있는 제비꽃밭 사이인 것 같아 꽃들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 여기! 나 여기 있잖아! 여기 보라색으로 휘황찬란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거니?


제비꽃 한 송이가 나를 쳐다보며 말을 하고 있다. ‘말도 안 돼. 꽃이 말을 한다고..?’ 혼자 속으로 생각한 순간 제비꽃이 다시 소리쳤다.


“ 그럼! 지금 너한테 말 걸고 있잖아!!


내 머릿속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나 생각하며 제비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비꽃은 꽃술 사이 열린 작은 입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 너 지금 날 그리고 있었지? 어디 좀 봐봐. 날 이쁘게 그리고 있긴 한 거야?


자세히 보니 제비꽃은 사람처럼 눈, 코, 입의 얼굴을 갖췄고, 그 동그란 눈으로 내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 너 꽤 잘 그리는구나? 이름이 뭐야?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꽃의 물음에 나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 쿠사마야. 쿠사마 야요이….


“ 쿠, 뭐라구? 크게 말해!


제비꽃의 다그침은 흡사 엄마가 나를 혼낼 때 말투 같았다.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다시 대답했다.


“ 내 이름은 쿠…쿠사마 야요이야!


“ 너 여긴 어떻게 왔어? 왜 온 거니? 날 보러 온 거 맞지?


어떻게 왔냐고 추궁을 당하니, 불현듯 나를 쏘아보는 엄마의 무서운 얼굴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며 당황스러웠다.


“ 아… 나…. 나는.. 꽃을 그리러 왔어.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거든. 엄마가 여기 들어오지 말랬는데… 꽃밭이 너무 예뻐서... 그만 들어와 버렸어.


“ 당연히 내가 있는 이곳은 너무 아름답지! 근데 엄마가 왜 여길 오지 말라고 한 거야?


“ 뱀이 나올 수 있대서.. 위험하대…


다시 엄마의 화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 들어온 것을 알면 크게 혼날 것이 분명해지면서 빨리 이 꽃밭을 나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급히 그리던 그림과 색연필을 정리했다.


“ 여기가 위험하다고? 크큭. 내가 태어나서 들어본 말 중에 제일 웃기는 말이다! 어? 근데 너 어디 가려고? 내 모습은 끝까지 그리고 가야지!


“ 아… 아니야,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


“ 야요이! 더 있다가 가!! 여긴 심심하단 말이야!!


풀어놨던 짐들을 재빨리 싸고, 자리를 나서니 제비꽃이 다시 소리쳤다.


“ 야!!!!!!!!!! 야!요!이!!!!! 어디가!!!


제비꽃의 부름은 엄마가 화날 때 나를 부르는 목소리 같아 무서움은 더 커졌다. 나는 도망치듯 꽃밭을 뛰쳐나와 집까지 전력 질주를 했다.  저 멀리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왱왱 떠다니는 듯 두려워 집 2층 끝에 있는 다락방으로 곧장 향했다.


‘여기면 제비꽃이 소리치는 것이 들리지 않겠지.’


야요이의 어린시절 


나는 무서움에 그림을 껴안고 다락방 끝 구석진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가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진짜'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에 눈이 떠졌다.


“ 야요이! 야요이!!!  너 어디에 있는 거야!


다락방에서 나와 1층으로 가니, 엄마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서 있다.


“ 너!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야지, 또 어디를 가서 그림을 그린 거야? 또 다락방에 있었어?


나는 자주 방과 후에 그림을 그리러 동네를 헤매다 해가 질 무렵 집에 들어가곤 했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못마땅해했다. 엄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인생에 중요한 일이 될 수 없다 했다. 나중에 좋은 집에 시집가 아이를 낳고 잘 사는 것이 삶의 행복이라고, 엄마는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만, 좋은 집에 시집와 언니 오빠들과 나를 낳고 가정주부로 사는 엄마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꽃밭에서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말할까 고민했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가지 말란 곳에 가서 겪은 일이라 말을 하면 호되게 혼날 것이 분명하다. 와중 엄마는 또 내게 아빠가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 같다며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오늘 본 말하던 제비꽃이, 그리고 요즘 겪은 일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요즘은 갑자기 내 눈앞에 섬광이 튈 때도 있고, 바라보는 물체나 사람에 오로라 같은 빛이 뒤덮일 때도 있다. 지금도 그렇다. 내게 말하는 엄마의 모습 뒤로 푸른  빛이 퍼지면서, 엄마 얼굴에 작은 점들이 가득해지는 느낌이 든다. 꼭 바다 물거품이 엄마 얼굴로 튄 것 같다. ‘아… 엄마가 그냥 이렇게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으면..’

내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단 것을 눈치챈 엄마가 소리쳤다.

쿠사마 야요이가 열 살 때 그린 엄마 


“ 야요이! 너 또 무슨 생각하는 거야???


엄마는 본인의 생각대로 내가 행동을 하지 않을 때나, 엄마의 최대 고민인 ‘아빠의 여자'를 찾기 위해 내가 탐정 놀이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고 딴 생각을 하면 내게 크게 화를 냈다. 심지어 화를 내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어떤 날은 때리기까지 했다. 그런 엄마가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엄마가 없으면 학교도 안 가고 매일 매일 그림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내 머릿속이 조금은 덜 복잡해지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엄마는 또다시 소리쳤고, 그녀의 손은 내 머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 너! 정말 엄마 이야기 제대로 듣지 않는 거야???!


또다시 볼이 시뻘겋게 부어오르는 일 따윈 겪고 싶지 않아 내 뺨을 내리치려던 엄마의 손을 가까스로 피했다. 나는 재빠르게 몸 피할 곳을 찾다 식탁 아래로 기어들어 왔다. 그때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식탁보에 그려진 빨간 꽃들이 수십 개로 불어나 식탁 밖, 벽, 그리고 저 멀리 천장까지 팽창하는 것이 아닌가? 이리 나오라며 소리치는 엄마의 목소리에 이 빨간 꽃들이 반응하는 것인지, 꽃의 무리는 끝없이 퍼져나갔고 그렇게 퍼져나간 꽃들은 그 형태가 뭉개지면서 ‘꽃’ 으로의 형태보다는 ‘원'이나 ‘점' 에 가까운 형태가 되고 있었다.

그 점들은 촘촘히, 그러나 그 간격을 어느 정도는 유지한, 꼭 그물 같은 모양으로 식탁 아래 몸을 숨긴 나를 감싸 안았다. 그 점들은 내 팔과 다리 쪽으로도 퍼지더니 결국 온 몸을 뒤덮었다. 나는  싫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엄마의 소리침은 더 내 귓가엔 들리지 않았고, 나는 열 살의 나이에 점들로 감싸진 ‘편안함'을 맛보았다. 내일은 말하는 제비꽃과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비꽃에게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게 무엇인지 탁하고 알아채 내게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다.



⋇ 위 글은 쿠사마 야요이의 삶을 소재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 KUA about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쓰모토의 유복한 가정에서 넷째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Yayoi Kusama,1929~)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을 앓았습니다. 10살 무렵부터 심각한 착란증세를 일으켰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사업가이자 바람둥이 기질이 있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을 병이라 인식하지 못한 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당했습니다. 

 열살 무렵 쿠사마는 꽃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환청을 넘어서, 환각을 경험합니다. 집안의 빨간 꽃무늬 식탁보를 보고 그 잔상이 온 집안에 따라다니다 물방울 무늬로 변형되어 계속 그녀 자신의 신체에까지 둥둥 떠다니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 무수한 동그라미의 환영은 그녀의 작은 도화지에 옮겨졌습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물방울 무늬는 평생에 걸쳐 쿠사마 예술작업의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그녀는 1948년 엄격한 도제식 학풍을 고수하는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전통 일본화를 배우면서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23살 때 마쓰모토 시민회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에 의해 비로소 자신이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의 병명은 '강박신경증', '편집증', '불안신경증'으로 불쾌한 감정을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압박이 커져 일정한 행동을 되풀이 하는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1957년, 그녀는 미국 뉴욕으로 떠나 그곳에서 16년 동안 예술가로서 활동합니다. 그녀의 '무한 망사 Infinity Net'연작과 '물방울무늬 Polka Dot'과 같은 반복적 집적 이미지는 팝 아트의 거장인 앤디워홀에 영향을 끼쳤으며, 어린시절 가족으로부터 구속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들은 루이스 브루주아와 같은 페미니즘 예술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림 외에도 60년대 후반 들어서는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해프닝과 퍼포먼스, 독립영화 제작, 시, 수필, 작곡까지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지만 1973년 돌연 뉴욕을 떠났다. 16년 동안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높은 가격의 작품료를 받기도 했지만, 그녀의 내면은 피폐해졌다 느꼈습니다. 


    결국 그녀는 1973년 일본으로 돌아와 스스로 정신병원으로 들어갔으며, 병원 앞 작은 스튜디오를 얻어 병원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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