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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Dec 15. 2020

집, 감각의 제국 (1)

고수들의 면면

일러스트 김억중



‘감각의 제국’하니까, 타이틀이 좀 섹시해 보일지 모른다. 포르노에 버금가는 파격적 신으로 유명했던 바로 그 비디오 제목과 똑같으니 말이다. 아, 그런데 이 제목 앞에 ‘집’ 한 자를 턱 붙여보니,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여간 의미심장한 게 아니다. 허긴 오관의 감각을 활짝 열고 집주변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아닌 게 아니라, 집보다 더 매력적인 ‘감각의 제국’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각의 제국을 누리고 살았던 고수들의 면면을 만나보도록 하자.



생성과 소멸의 신비 앞에서

“봄의 숲 속에는 산나물이 지천이었다.... 밋밋하게 웅덩이가 진 골짜기는 은방울꽃의 군생지였다. 넓고 건강해 보이는 잎 사이에 숨다시피 고개를 숙이고... 강렬한 향기의 꿀샘이 있는 지, 그 한가운데 들면 공포와 절망에 가까운 황홀경에 빠지곤 했다... 여름이 되면 숲의 푸르름엔 독이 올랐고 한낮의 햇볕이 무수한 잎의 독기와 예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작열할 때 낭자한 매미소리를 듣는다는 건 허무의 극치였다.”(박완서, “저문 날의 삽화”)


그가 사는 정남향 집 앞에는 울타리 너머로 길과 나란히 개울물이 흐르고, 건너편으로 하천부지라 불리는 공터와 숲이 있다. 모두들 집터가 시세에 비해 비싸다고들 하지만, 그 나름으로는 숲과 공터를 덤으로 얻어 횡재하였다고 생각한다. 숲이란 바라보고 즐기고 수시로 드나들며 좋은 공기를 마시는 사람이 임자지, 문서 가진 임자가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며... 그런 그는 공터와 숲 속 사계의 절묘한 변화에 감탄하며 살아간다. 봄에는 푸릇푸릇 살아나는 산나물과 이름 모를 꽃들의 향기에 취하고, 여름이면 섬뜩하리 만치 짙은 숲 색깔과 매미소리에 시름을 던다.


“활엽(闊葉)이 비를 맞는 소리에 어느 날 청승이 섞이면 걷잡을 수 없는 가을이다.” 나뭇잎들은 자신의 쇠락을 위장하려는 듯 온갖 색깔로 옷을 갈아입는다. 하지만 한 밤중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이미 여리어진 잎새를 우수수 떨구고야 만다. “숲의 정직한 탄식”이다. 그 소리에 잠을 설치며 시든 아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래도록 온기를 탐한다. 어느 새 눈발이 내리면 숲은 마지막 잎을 떨구고, 차디찬 바람은 창문을 뒤흔든다.


“나무에 따라 엉성하기도 하고 혹은 조밀하기도 하고, 하늘 향해 쭉쭉 뻗기도 하고 혹은 자유롭게 휘기도 한 벌거벗은 가장귀들이 망사처럼 숲 속의 밋밋한 등성이와 골짜기의 땅 모습을 훤히 드러낸다.” 잎은 한 때 다채로웠던 영화를 뒤로 한 채, 갈색 몸체는 서서히 녹아들어 땅 속으로 침잠한다. 나무들은 힘겨운 날씨를 견디어 내기 위해 스스로 다이어트를 끝낸 시간이다. 


소설 속 그는 시시각각, 계절에 따라 거듭나는 숲의 변화를 바라다보며 그 또한 인생의 숲을 바라다본다. 그는 숲을 단지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감각적인 사유를 더해, 자연이 가르쳐주는 생성과 소멸의 신비를 깨닫는다. 꿈과 낭만으로 가득 찬 청춘은 사이어 들어 어느덧 노년이 다가오듯, 자연의 맹위를 거스를 수 없는 자신과 삶을... 



봄비, 대지를 적시고 나면

내가 사는 시골집에도 간밤에 소리 없이 봄비가 대지를 적시고 나면 어린 아기 이빨처럼 대밭에는 여지없이 죽순이 불쑥 솟아올라 있다. 정교한 무늬로 겹겹이 쌓은 듯한 세모난 봉우리도 어느덧 얇은 댓가지로 바뀐다. 하나가 소멸되면 다른 하나가 생성된다. 꽃나무들도 부드럽고 연한 잎새가 짙고 두터워질 때쯤이면 서서히 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한다. 멀찌감치 물러 나있던 산등성이 나무들도 푸른 잎새로 철갑을 두르기 시작하면 산은 하루가 다르게 마당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선다. 장마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검푸른 칡넝쿨이 온 산을 뒤덮어 놓는다.


하지만 낙엽이 다 지도록 그토록 기승을 부리던 넝쿨도 밤새 첫서리가 내린 날 아침이면 일제히 스러진 모습으로 바뀐다. 아! 만일 소멸은 없고 생성 과정만 있다면 온 세상을 다 휘감아버리고도 남을만한 저 무소불위(無所不爲) 넝쿨을 어찌하랴 싶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다. 소멸은 그 자체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과정이니 참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서릿발이 내린 풍경 앞에서 나 역시 억지로 오래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때늦은 소멸은 또 다른 생성을 늦추게 할 것이므로...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감각을 되돌려 주는 집이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따뜻함과 서늘함, 그 절묘한 조화

“입구의 오솔길을 따라서 대봉대를 지나 좀 더 올라가면 애양단(愛陽壇) 마당에 닿는다... 이 북쪽 변방이 양지발라서 겨울에 계곡수가 꽁꽁 얼어붙을 때도 이 마당에는 햇볕이 자글자글 끓고 있다고 해서 애양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서늘함, 깨끗함, 헐거움, 성김, 그리고 성긴 숲 속의 어둑시근한 빛들의 풀어짐, 그런 느슨한 공간으로부터 양명하게 드러나는 빛들이 그리울 때 그 정원의 사내들은 이 애양단 마당을 찾았을 터이다.”(김훈, 풍경과 상처)


조선 중종 때 처사 양산보가 심혈을 기울여 이루어 놓은 소쇄원 애양단을 보면, 태양 운행에 대응하려는 혜안이 돋보인다. 하루 중에도 아침 햇살은 한기가 느껴지고 오후로 갈수록 점차 온기가 더해지듯이, 계절마다 햇살 기운도 제각각 달라 그 정감이 다른 법이다. ㄱ자로 둘러쳐진 애양단 토담장은 주변과 경계를 이루는 요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사광선을 받아내어 온기를 반사해내는 장치의 기능이 더 크다. 햇빛이 잘 들도록 뒤뜰을 돋우어서 장독대를 놓아둔다든지, 붉은 색 계통 꽃나무를 심어 북쪽 한기를 보완하려 하는 것처럼... 만일 태양 고도에 따라 계산된 적당한 높이의 토담장이 없었다면, 햇살 기운과 빛깔은 흔적 없이 땅으로 흡수되어버렸을 터. 태양은 소쇄원 정경과는 무관한 존재였을 것이다. 애양단은 햇살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소쇄원 배치도/우측 상단 애양단


여름 날 울창한 대나무 숲을 지나 입구에 다다르면, 울창한 나뭇잎으로 가려진 그늘 속이 서늘하다. 다다르는 시선 끝으로 토담장의 온기가 느껴져 마음은 이내 푸근해진다. 겨울이면 스산한 나뭇가지 사이로 애양단은 자신의 몸체를 온전히 드러내어 온기를 뿜어낸다. 마음 속 한기는 사라지고 장소의 고귀함에 탄복한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鳞厚, 1510~1560)의 소쇄원 48영 처럼, 중심에 놓인 광풍각에서 느끼는 정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壇前溪尙凍   애양단 앞 시냇물 아직 얼어 있지만

壇上雪全消   애양단 위의 눈은 모두 녹았네.

枕臂延陽景   팔 베고 따뜻한 볕 맞이하다 보면

鷄聲到午橋   한낮 닭울음소리가 타고 갈 가마에 들려 오네

 

(하서 김인후, 소쇄원 48영 중)


여름에는 애양단이 있어 서늘한 대청에서 따뜻한 양지를 멀리 두고 바라다 볼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지만, 겨울에는 마음과 발길을 그곳으로 향하게 하는 응집력 있는 공간으로 뒤바뀐다. 한기와 온기가 상생하여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느끼게 하는 절묘한 조화인 셈이다. 그 발광(發光)의 신비는 의외로 소박한 토담에 있었으니, 정작 값비싼 것은 재료가 아니라, 자연 이치에 대한 이해와 응용의 지혜였던 것이다. 그렇게 몸은 감각의 주인이 되어 집속의 미학을 맘껏 누렸던 셈이 아닌가.  



온돌과 마루, 그 촉감에 젖다

예전 사람들은 한기와 온기의 조화를 보고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촉각을 중시하는 온돌과 마루문화를 꽃피웠다. 이규태의 “재미있는 우리의 집 이야기“에 의하면 해외 동포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사진 중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인 외딴 오두막집 풍경이 으뜸이라고 한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오두막집의 낭만적인 풍경보다는 온돌의 따스함이나 아늑함에 대한 촉각적인 그리움을 누구나 정서적으로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몸살에 시달리다가도 따뜻한 온돌방에서 등을 지지고 나면 온몸이 가뿐해지던 기억들. 따뜻한 아랫목에 밥을 묻어두었다가 꺼내 먹으며 어머니 손길을 느꼈던 기억들. 장을 뜨기 위해 콩을 한 소쿠리 쪄서 이불을 덮어 묻어두면 그 속에서 나던 형용할 수 없는 냄새에 대한 기억들. 어른과 함께 있을 때는 늘 서늘한 윗목에서 무릎 꿇고 말씀을 들어야 했던 추억들. 한 여름철인데도 불을 때고 나면 눅눅했던 방안이 뽀송뽀송해져 윗목에 몸을 뉘어 낮잠을 늘어지게 잤던 기억들....


이처럼 온돌은 방 하나에 아랫목과 윗목이 구분되어 따뜻함과 서늘함이 공존하는 난방구조다. 서늘한 윗목에 머리를 두고 잠자리에 들거나 음식 온도를 체내 온도와 등온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몸의 생리에 순응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한기, 냉기가 지배하는 겨울철에는 주로 온돌방에 기거하고 온기, 열기가 지배하는 여름철에는 마룻방에 산다. 온돌 구들 아래는 방고래를 두어 열이 잘 통하도록 하였듯이 마룻방 아래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앞뒤를 트여 놓았다. 마루 위의 공기가 더워지면 시원한 마루 아랫바람이 마루 틈을 타고 올라오는 대류현상을 일으킨다. 부잣집 대청마루에는 우물 정(井)자 나무틀로 들어 올려 아랫바람이 솟구쳐 오르도록 해놓은 경우를 볼 수 있다. 그 정자틀 위에 풀을 먹인 삼베옷을 입고 누워 있으면 그 서늘함의 축복 속에 어찌 여름이 길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곳이 곧 감각의 제국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 강변살자

어찌 그뿐일까? 집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자연은 모두가 견성정(見性情)의 대상이다. 많은 시들은 집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의 감각적인 대상들을 즐겨 노래한다. "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소월은 ‘강변에 살자’고 노래하지 않고 아예 문법을 던져버린 채 ‘강변살자’고 한다. 강변에 있는 집에 살자는 것이 아니라, 강변을 살자는 것이다.


그에게 집은 필요하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닌 듯하다. 강변을 보고, 느끼며 누릴 수 있는 가치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 때문일 게다. 뜰과 뒷문 밖이 어떤 모습으로 구성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 집은 물리적으로는 왜소할지 모르나, 정서적으로는 해와 바람에 닿을 만큼 넓고 높기만 하다. 여기서 집은 천상 자연과 우주를 향해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는 감각의 제국이 아니고 무엇인가.


도심을 떠나 전원생활을 꿈꾸며 지은 집이 이러한 감각적인 대상을 앞에 두고도 그 가치를 모른 채,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전원에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전원주택일 수는 없다. 자연의 은총을 더 소중하고 고맙게 생각할 수 있는 집. 전기불도 TV도 모두 끄고 촛불을 밝혀, 몸이 이끄는 대로 그냥 있어보라. 잠자고 있던 오관의 감각이 부스스 깨어나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면, 명색이 감각의 제국인데 왜 벗는 장면이 하나도 안나오느냐는 분이 계실 줄 안다. 하지만 안 벗고도 얼마든지 짜릿한 쾌락을 맛볼만한 장면들이 집 주변 곳곳에 널려있는 줄도 모르시고 하는 말씀. 그런 마음부터 벗어야 진짜 감각의 제국에 들 수 있는 법. 집에서 노는 게 뭐가 그리 재밌느냐고? 일단 놀아보겠다는 마음부터 챙겨보시길...


즐거움이라는 게 어디 그냥 생기는가? 꽃 피는 걸 보려면 화분에 물 주어 가꾸어야 하듯, 집구석 구석 무언가 누릴만한 것을 찾아서, 보고 또 보고 자꾸만 애정을 주어야지. 숨겨 놓은 보석이 따로 없다. 집과 하나가 되면 바로 당신의 몸이 감각의 제국이니 말이다. 이제 모임이다, 파티다 자꾸만 밖으로만 나돌지 말고 집안에 들어와 정 좀 부쳐보면 어떠실는지?

 

혹자는 그럴지 모르겠다. 자연을 향유한다는 것이 도시 속의 집에서 가당키나 한 이야기냐고. 물론 쉬운 일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도심 속이라도 숨쉴만한 틈이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자연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든 그 정경을 취하려 한다면, 감각을 일깨울만한 은총이 바로 그 자리에 펼쳐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자연이 차지하는 규모나 크기가 아니라 어떻게든 감각의 제국을 이루려는 의지가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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