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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억중 May 24. 2021

집에 대한 경의 (3)

어사재 [於斯齋], 2007

어사재기(於斯齋記)




어사재 공간구조



서측전경
남측 대청마루
동측전경


집을 짓는다는 것. 그것은 결국 지금, 여기의 뜻을 찾아 천국으로 만드는 일이요, 세상과 우주의 중심을 자처하는 일이 아닌가. 딱히 이은을 구현한 집이라 할 수는 없겠으나 내게도 지금, 여기의 뜻을 잘 좇아 지은 집이 한 채 있으니 의당 어사재를 당호로 삼았다. 참으로 귀한 인연으로 집주인과 만나 숱한 이야기를 나누며 설계를 하고 준공을 마치기까지 이 집이 지녀야할 가치와 의미는 무엇이며 설계과정에서 특별히 염두에 두었던 개념을 몇 가지 언급하면서 집주인이 이러저러한 마음으로 사셨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 기문을 적어드렸다.


 옛날 같으면 응당 집주인의 절친한 친구나 당대 문호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내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으니 게면 적기가 이를 데 없다. 이른바 기문 문학이 사라진 요즘 집을 짓고 후기를 남겼던 훌륭한 전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천한 재주를 무릅쓰고 감행했던 것.


어린 시절 집성촌에서 컸던 집주인은 50세에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한동안 소원했던 일가친척들과 더불어 아옹다옹 새로운 삶을 염원하였다. 나는 경사진 땅의 형세를 이용해 맨 아래층에 동네 분들이 오고가다 막걸리로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넉넉한 대청마루를 배치했다. 마루 옆에 내키기만 하면 언제든 국수라도 한 그릇 말아 드릴 수 있도록 부엌을 두었다.


 마루 한 쪽 끝에 벽난로를 두어 고구마나 감자도 구워먹으며 고단한 세상사 담론을 즐길 수도 있으며, 다른 한 쪽에는 족이든 탕이든 실컷 고아낼 수 있는 주물 솥까지 걸어 두어 마을 사람들을 위한 잔치도 벌일 수 있게 했다. 게다가 구조체로 윤곽 지워진 틀 안에 들어오는 풍경 또한 일품이어서 동네 정자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마루 주변을 따라 하루 종일 움직이는 빛과 그림자 효과만으로도 한동안 서먹서먹했던 이웃들의 말문을 열어 주기에 모자람이 없을 법하다. 


이쯤 되면 집을 지어 동네 친척들에게 뭔가를 베풀고자 하는 집주인의 뜻이 백 마디 입 바른 말보다, 구체적인 공간 보시로 확인되는 셈이 아닌가. 안과 밖, 그 넉넉한 틈새에 스며드는 안온한 빛으로 한 동안 응달졌던 마음을 비추고 녹여서 모두가 끈끈한 인연으로 거듭날 수 있겠다는 바램이 어사재의 벽이요, 기둥이요 골조였다. 마실길로 이어지는 그 안/밖의 접속 공간이 집주인, 동네 사람들과 얽히고설켜 집도 사람도 모두가 숨다운 숨을 쉬게 할 것이라는 믿음의 진원지였다. 



집주인 내외의 호젓한 삶을 위해서도 2층에 마당과 테라스를 두어 바깥세상을 진드근히 관조할 수 있도록 트인 시야를 확보하였고, 게서 잘 읽은 포도주 한 잔에 세월의 진한 향내를 음미하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졌다. 행여나 외지에 나간 자녀들이나 친구, 친척들이 찾아와 서로 방해하지 않고 기거할 수 있는 별채를 거실 옆에 두어 더불어 지낼 수 있는 보시 공간을 또 하나 마련하였다. 당장은 매일 쓰지 않으니 쓸모없는 공간이라 할 지 모르겠으나, 소박한 살림살이나마 ‘마음으로 쓰는 방’을 두었으니, 집주인 내외의 각박하지 않은 심성의 가치를 어찌 섣부른 계산으로 그 시비를 논할 수 있겠는가. 



집 안팎은 투명하게 열리고 닫히며, 마당의 영역들이 저마다 성격을 달리하며 미세하게 분화되어 있고 처마 속 깊은 잉여공간의 의미가 곳곳에 배어 있으니, 비록 외형은 그렇게 보이지 않겠으나 공간구조로 치자면 한옥의 정신이 여지없이 녹아있는 집이 되었다. 살다보면 사소한 일상도 소중하지만 무릇 나이가 들수록 홀로 즐길 줄 아는 훈련이 각별하거니와, 영혼의 깊은 우물을 비쳐보고자 하는 내심이 일면 3층 다실로 향하여 속세와 절연에 들 수도 있으며, 화초 가꾸기를 벗 삼아 심성을 온유하게 보살필 만한 온실을 두어 자주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니 그 뜻을 담은 어사재를 당호로 삼는 것이 여러모로 합당하다 여겨진다. 주인께서는 치성을 드려 보약을 음복하듯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다스리고 집주변의 미추를 감싸 안은 온갖 풍광을 심친(心親)으로 즐기며 집과 더불어 오래오래 해로하시길 기원하는 바이다. 



그저 집보다 

더 좋은 보약은 없노라


깎아지른 한 말씀에

숨이 멎다


그 좋은 약 좀 지으러 

예까지 왔노라


화안한 웃음에

가슴 뛰다


짓는 이들이 모여 

집 한 채 다 졌노라 


일렁이는 바람결에

약내 번지다


김 억중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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