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셰어하우스
공용냉장고에 분명 넣어 둔 잼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반이나 사라져 있다. 어제 마트에서 산 새 제품이고, 심지어 아직 한 번도 맛을 보지 못했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따로 없다. 이것이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사는 셰어하우스의 아침인 걸까.
오사카에 발을 들인 지도 어느덧 2주. 아직도 이 생활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잼을 훔쳐간 사람은 누굴까. 추측하건대 엊그제 새로 들어온 프랑스 친구일 가능성이 높다. 합리적 의심이다. 하지만 따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난 프랑스어는커녕 영어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입술만 툭 내밀고 뾰로통한 얼굴로 냉장고 앞에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잼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셰어하우스는 한 건물에, 자그마한 각자의 방만 존재할 뿐 샤워실도, 화장실도, 부엌도, 거실도 모든 것이 공용이다. 그리고 이곳의 암묵적인 공용어는 일본어다. 그렇다고 딱히 유창한 사람은 없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부족한 일본어를 경쟁하듯 내민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일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게 된 이유는 단순히 언어의 장벽 때문만은 아니다. 일본에 온 후 처음으로 느낀 것은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라는 생각이었다. 여기서는 어디서 왔는지, 왜 일본에 왔는지, 앞으로 뭘 할 건지 서로에게 아무도 묻지 않았다. 마치 군대처럼 말이다. 다만 훨씬 느슨하고, 훨씬 덜 긴장된 군대. 그냥 사사로운 설명이 필요 없는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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