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친한 선배의 부탁으로 동아리 학생들을 데리고 토론 대회에 나갔다. 타 학교 학생들과 토론을 앞둔 학생들은 처음에는 긴장했지만 이내 실력 발휘를 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나 역시 그동안 주말을 반납하며 아이들과 토론 대회 준비를 했고, 그 시간들은 나에게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토론 대회는 학교마다의 경쟁에서 그치지 않고 공동의 주제로 교사와 학생이 함께 다양한 콘텐츠를 만드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우리 학생들은 랩 가사를 써 주제를 표현했고 분위기는 뜨거워졌다. 어느덧 시상식과 폐회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내 영혼은 여기에 없고 껍데기만 남는 기분이었다. 신해철 님의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는 노래가 귓가를 맴돌았다. 분명히 교사로서 보람 있는 시간이었는데 왜 그런 불순한 생각이 들었을까?
"이번 생은 망했어."
집으로 가는 길에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던 생각이다. 이런!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았는데 너무 빨리 깨달았다. 직장 생활 7년 차가 되었을 때 내 삶에 나의 꿈과 욕망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7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욕망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기꺼이 한 조각이 되어 주었다. 나의 꿈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도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나는 꿈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꿈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두려웠다. 거창한 무언가를 기다리는 어른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대 때 꿈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데 꿈이 분명한 아이들을 보면 늘 기가 죽었다. 그나마 부모님과 공동으로 SKY 대학교에 진학해 멋진 연애를 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마저도 실패했다. 아버지의 명으로 부족했던 국어 실력을 보완해 다시 수능 시험을 치르기 위해 우리 지역에 있는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전략적으로 입학했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내가 그저 아쉬운 수능 점수를 받았다는 이유로 재수를 할 수도 없었다. 그 해 수능에서 틀린 문제의 대부분이 언어 영역이었다. 원래부터 국어가 약했기에 고등학교 3학년 1년 내내 시중에 나와 있는 언어 영역 문제집을 닥치는 대로 풀었다. 그럼에도 본 시험인 수능에서 지금껏 받아보지 못한 처참한 점수를 받게 되었다. 다시 재수를 해도 언어 영역을 잘 치를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되고자 하는 꿈이 없었기에 다시 수능 시험을 치를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새로운 도전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게 나의 길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아버지께 차마 시험공부하기 싫다고는 말 못 하고, 사범대에 와 보니 교사가 되고 싶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사범대학에 진학했기에 대학 생활을 하며 진로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지금의 후배들은 사정이 다르지만, 2천 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사범대에 진학한 학생 대부분이 당연히 스스로가 교사가 될 거라 확신했다. 나 역시 다른 길은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목표를 갖고 있던 동료들과 학교와 교육 그리고 국어 교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대학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졸업을 앞둔 그 시점까지도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국어 교과에 대한 확신은 더더욱 없었다.
운 좋게도 스물여섯의 나이에 정식 교사가 되었다. 특별히 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에 속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은 접어도 된다. 생계에 대한 걱정 대신 학교에서 만날 아이들에게 집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첫해, 첫 담임부터 실수 투성이었다. 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동료들과 멘토들에게 묻고 배우고 실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7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토론 행사에서 허무한 감정을 느끼며 서 있었다. 아이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거름이 되어 주는 교사로서의 헌신적인 삶은 참 아름답다. 그럼 나의 꿈과 욕망은 어떻게 만들어가나? 적당히 월급을 받으며 아름다운 조력자로서의 역할에 평생 의미를 찾고 만족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물론 교직에는 더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신의 결과물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능력자들이 많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열정 끝에는 '승진'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있다.
'승진'을 해 '지위'를 차지하는 것에 대해 평가절하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 하지만 지위와 관련해서 교사가 가질 수 있는 꿈은 한정적이다. 우선 관리자가 되어 자신의 교육철학을 더 많은 이들에게 펼쳐 보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재야의 고수가 되어 교단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내 앞에 있는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의 경우 승진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장학사 시험에 합격해 시 교육청에 근무하는 선배를 만나러 갔다가 늦은 시간까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시 교육청 건물을 보았다. 관리자가 될 깜냥도 안 되지만, 내 삶의 모든 것을 직장에 투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교사라는 나의 직업은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의 전부도 아니다. 게다가 모든 교사가 교장, 장학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경쟁할 필요도 없다. 학교는 교장, 교감도 필요하지만 일선에서 아이들과 만나야 할 교사들도 필요하다.
학교의 위계 구조는 단순하다. '교장-교감-교사'로 구성되어 있다. 교감으로 승진을 포기했기에 남은 학교생활을 하며 더 올라갈 곳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태해졌다.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다. 늘 적당히 하는 게 몸에 베이다 보니 삶에 열정이란 단어는 사라졌다. 게다가 같은 일을 매년 반복하다 보니 수업과 학생생활지도에 대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나의 방식만이 옳다는 어설픈 오기까지 생겼다. 퇴근 후의 생활은 더 방만해졌고 인간관계는 더 좁아졌다. 스스로에게 변화를 주기 위해 중국에 있는 한국국제학교에 지원을 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고 싶었다. 운 좋게도 합격했고, 고용 휴직원을 내고, 5년 동안 살았던 전세집을 정리했다. 새 학기를 앞두고 낯선 중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에서도 나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삶을 대했던 태도와 달라지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나는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고3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곳에서도 고난과 역경을 겪기가 쉽지 않은 안정된 직장, 보장된 정년, 퇴직 후 꼬박꼬박 나올 연금 등을 생각하며 익숙함과 편안함에 기대며 살았다. 중국 생활 후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복직을 했고, 결혼을 했고, 아빠가 되었다. 귀국과 결혼 그리고 출산까지 이 모든 것이 1년 안에 다 이루어졌다. 그 이후로는 정신없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 늘 그렇듯이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나의 몸을 맡겼고 열심히 달렸다. 돌이켜보면 나의 인생은 대체로 그러했다. 뭔가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도전 앞에서는 늘 망설였다. 조금이라도 내 능력 이상을 발휘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면 도망칠 생각부터 했다. 도전에 대한 낯섦이 두려웠다.
올해 서른아홉이 되었다. 어떤 사나운 아홉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만 그 아홉수는 나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우리나라와 전 세계를 덮쳤다. 사상 초유로 개학이 연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필 올해 처음으로 교무 전산 업무를 맡았다. 학교에서 실제 개학은 연기되었지만 재택근무와 원격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나이스(교무 전산 사이트 이름)로 모든 학교 업무를 세팅해 주어야 했다. 가족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 천안 집을 떠나 직장이 있는 대구로 가야 했다. 당시 대구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장 심하게 창궐했던 지역이었다. 이 시국에 대구로 향한다고 어른들께 얼마나 많은 잔소리를 들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대구로 간 나는 최대한 빨리 업무를 처리하고 다시 천안으로 가려 했으나, 혹시라도 나로 인해 바이러스가 전파될까 봐 두려웠다.
아내와 상의 후 1주일 동안 대구에서 자체적으로 격리 생활을 하며 머물기로 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져보는 자유 시간이었다. 그동안 육아로 인해 볼 수 없었던 드라마와 영화를 봐도 되고, 좋아하는 게임을 실컷 할 수도 있다. 때로는 가족이 보고 싶고, 집 안에만 갇혀 있어 부정적인 감정이 들 수도 있기에 내가 좋아하는 오락 행위들로 삶을 채워도 됐었다.
예전처럼 그렇게 시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답답함이 일어났다. 조그마한 자취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차를 몰고 집 근처에 있는 앞산으로 갔다.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는 몸을 굴리는 습성이 있다. 무작정 앞산 산행을 시작했다. 땀이 나고 숨이 찼다.
걸으면서 올해 들어서 더 심해진 답답한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지난 삶을 되돌아 보았다. 지금까지 매 순간 그럭저럭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 자부해왔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열심히 살았다기 보다 견뎌왔다. 학교 시절과 군 생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근무 시간, 어린 아들을 양육해야 하는 육아 시간을 열심히 견뎌왔다. 학교 다닐 때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입시와 취업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바빴다. 취업 이후에는 직장인으로서, 친구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내 역할에 충실히 하며 산다고 바빴다. 어쩌다 남는 여유 시간도 세상이 만들어 놓은 콘텐츠들을 수동적으로 즐기거나 술에 빠져 지내기에 바빴다.
어쩌면 나는 한 번도 내가 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한 적이 없다. 그러니 세상이 시키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 수밖에.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삶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 역시 나 자신이다. 여기서 생기는 괴리감이 스트레스의 원인이었다. 내가 아닌 남이 되고 싶어했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늘 부러워했다. 또한 나약하고 비겁한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다.
이 날의 산행은 내 인생에 변곡점이 되었다. 내가 나를 좋아할 수 있게 내 삶을 가꾸자고 다짐했다. 하산하는 길에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진정한 내 모습을 찾기 위해 스승이 필요했다. 코로나 시국이 아니더라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스승은 책이다. 그날을 기점으로 천안 복귀 날까지 집에 박혀 책만 읽었다. 작년에 동서께 선물 받은 '나는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부터 읽었다. 그리고 그 책에서 추천하는 또 다른 책들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읽어나갔다. 예전처럼 건성으로 읽지 않고, 변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하루 종일 책만 읽는 내 모습에 놀랐다. 나는 내가 이렇게 책 읽기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독서 없이 살아왔던 지난 삶이 아쉬울 정도였다. 그래도 80살까지 건강하게 산다고 가정했을 때 아직 나에게 40년이란 날들 또는 약 15,000일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음이 감사했다. 독서를 통해 늘 갖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철밥통이라는 교사라는 직업이 냉혹한 구조조정 앞에 놓이거나, 나의 후배들이 관리자가 되어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도 생겼다. 그리고 나도 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라는 책을 통해 앞으로 미래 사회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의 교집합을 찾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내가 찾은 가장 쉬운 교집합이 바로 독서였다. 독서를 통해 매일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는 나의 모습이 좋았다.
자기 혁명의 첫해, 나에게 삶을 바라보는 태도의 중요성을 깨우쳐 준 한 인물이 있다. '빅터 프랭클'이란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과 의사다. 그는 가족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로 불리는 아우슈비츠에 이송되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박탈당하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 상황은 본인의 의도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사람들은 절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원망한다. 하지만 그는 절망 앞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하나가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상황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다. 그는 극한의 시련 속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살아나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살리는 학문을 연구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새롭게 받아들여 미래의 꿈을 만들었다.
그의 태도와 삶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같은 수용소 생활 속에서도 누군가는 인간으로서의 기품과 도덕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반면, 누군가는 쉽게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놓아 버린다. 성자가 될 것이냐, 돼지가 될 것이냐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이냐 역시 나에게 달려있다. 타고난 나의 재능은 바꿀 수가 없다. 하지만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오늘 당장이라도.
기상 알람 소리를 여러 번에 걸쳐 끄며 마지못해 일어나는 아침을 맞이할 것인가, 오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아침을 맞이할 것인가. 하루의 시작인 아침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도 나의 태도에 달려 있다. 나에게 자기 혁명의 모티브를 주신 구본형 작가는 다음과 같이 오늘을 소중히 여겨라고 했다.
오늘이 그냥 흘러가게 하지 마라. 오늘은 영원히 내 곁을 떠나간다. 아쉬워하라.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보내버린 오늘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참으로 아프게 생각하라. 오늘은 그러므로 어제와 다르게 느끼는 날이다. 어제와 다른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날이다. 날마다 새롭다는 것은 축복받은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252쪽
갑자기 거창한 꿈이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생긴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은 것도 아니다. 자기혁명 역시 거창하지 않다. 그저 나의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가꾸는 것이다. 매일 내가 했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 습관이 된 것들, 습관으로 만들 것들, 잘한 것들, 후회되는 것들 등이 모여 나의 삶이 된다. 진정한 나로서 자신을 혁명하는 방법은 나의 하루를 다르게 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럼 우리는 언제 설렘을 느끼는가? 새로운 것을 경험할 때 설렘을 느낀다. 나의 하루를 배움의 설렘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나의 커리어와 자산에 도움이 될까 하는 계산 따위는 집어치운다. 죽을 때까지 배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교사라는 직장인으로서 학생들에게 삶으로 보여주고 싶다. 죽은 지식과 낡은 가치관으로 마지못해 교단 앞에 서서 정년까지 시간 가기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쁨을 알려주고 싶다. 내가 알고 싶은 것들을 자발적으로 탐구하고 깨우쳐 가는 과정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지 잠재적 교육과정으로 알려주고 싶다.
새삼 내 직업이 교사임이 감사하다. 내 꿈의 실현이 내가 만난 학생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에 가슴이 벅차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꿈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아직은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모른다. 나만의 콘텐츠가 어떤 것이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분명하다.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을 매일 2시간 이상 확보할 것이다. 대신 지금까지 갖고 있던 다른 일상의 욕망은 버렸고, 배움이란 아름다운 욕망을 받아들였다. 매일 책을 읽으며, 내 삶에 적용하고 싶은 구절에 밑줄을 긋고, 중요한 내용은 메모를 한다. 일상에서도 새롭게 깨달은 부분이나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부분 등을 메모한다. 이런 메모들이 모이면 글로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렇다. 나는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어쩌면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평생 배움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은 국어교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부터 일상에서 읽기, 쓰기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아이들에게 그것들을 가르친다는 말인가? 앞으로 4차 산업 혁명이 주도할 미래 사회의 변화 속도는 매우 빠를 것이다.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필수 능력이 읽기와 쓰기 능력이라 생각한다. 지극히 나 자신을 위한 마음으로 시작한 자기 혁명이 앞으로 내가 만날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사실 최고의 삶을 살아갈 거라는 확신은 아직도 없다. 하지만 학교가 내가 가장 빛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올해 나의 자기혁명 시도는 이미 성공이다.
나는 미국산 히어로 영화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와 '다크나이트'는 내가 가장 아끼는 히어로 영화들이다. 그 두 영화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는가? 망해가던 엑스맨과 배트맨 시리즈를 되살렸다는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앞의 시리즈들을 보지 않아도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다. 매튜 본 감독과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주인공과 기본적인 설정만 빼고 싹 다 바꾸었다. 그 결과 대중성과 상업성을 겸비하였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작이 탄생했다.
2020년을 기점으로 나 역시 결심했다. 리툴링에 성공한 그 영화들처럼 '나'라는 인물은 같지만 교사라는 나의 직업을 빼고 모든 것을 다 바꾸기로 했다. 거창하게 올해는 자기 혁명의 원년으로 삼았다. 스스로 나를 사랑하고 존경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모든 위대한 사람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던 시절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기로 했다.
마흔을 앞두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겼다. 진정한 나로서 남은 인생을 향유하고 싶다. 나에게는 누구보다 강한 향상심이 있음을 안다. 더 이상 도전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며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두려움의 감정이 생길 때면 지금 나는 성장의 과정으로 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것이다. 남과의 비교가 아닌 나 자신과의 비교를 통해 어제의 나보다 더 성장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늘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나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과 급훈을 정할 때 항상 내가 추천하는 문구가 있다. 바로 '현재는 나의 미래다.'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한다. 당장 고3 학생들은 내년 이맘때 자신이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현재는 나의 미래라고. 지금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가 너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이다. 훌륭한 미래는 지금 만들어지는 것이다. 곧 확인하게 될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주어진 오늘 하루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감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이 마음가짐이 자기 혁명의 시작이다. 나는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애쓰는 국어교사다.
참고문헌
익숙한 것과의 결별, 구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