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쓸 글은 일종의 자기반성문입니다. 지난주 토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아내로부터 아이를 데리고 본인이 예약한 미용실에 다녀오라는 지령을 받았습니다. 미용실이 아파트 상가에 위치해 있으니 예약 시간 전까지 아파트 안에 있는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면 된다는 팁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는 처음 경험하는 놀이터이기 때문에 예전부터 동네에 있는 다른 아파트 놀이터에 아이와 함께 방문을 하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주변에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더라고요. 편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주차를 시도한 것이지요. 지인의 집에 방문했을 때 경비실로 호출 버튼을 누르면 정확하게 확인을 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에 방문 사유에 대해 물으면 아무 동호수를 갖다 붙이려고 했죠. 지인 집에 방문 왔다고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제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경비 아저씨께서 직접 경비실을 나와 차 앞까지 오셨어요. 몇 동 몇 호에 방문했고, 방문 목적은 무엇이고, 언제 나갈 것인지에 대해 꼬치꼬치 물으시더라고요. 그리고 방문 일지까지 작성해야 했습니다. 작은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던 저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거짓말을 반복하게 되자 인지부조화로 인해 스트레스가 생기더라고요. 게다가 뒷좌석에 앉아 있는 아이 앞에서 거짓말을 반복하기에도 민망했습니다. 이제 와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미용실을 이용하려고 왔다고 솔직히 말하기에도 민망했습니다. 연속된 거짓말에 긴장한 저는 차량 번호도 잘못 작성했어요. 집에 차가 두 대 있는데 다른 차의 번호를 적은 것이지요. 경비 아저씨께서 제 차량 번호가 잘못되었다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다그쳤습니다. 황급히 집에 있는 다른 차량의 번호를 실수로 적었다며 둘러댔죠.
그 상황에서 저는 거짓말을 한 제 자신이 아닌 본인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경비 아저씨께 화가 났습니다. 다른 아파트 경비들처럼 인터폰으로 대충 확인하고 들여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죠. 어쩌면 상황이 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거짓으로 대충 둘러댄 몇 동 몇 호에 직접 전화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주차라는 작은 위기를 모면하고자 거짓말을 하는 행위를 당연하게 생각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제 자신에게 화를 쏟아낼 수 없으나 경비 아저씨께 부정적 감정을 전이한 것이지요.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파트 안에 주차를 하려니 거짓말을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하더라고요. 입장하자마자 다시 돌아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약간 흥분한 상태로 저에게 미용실 지령을 내린 아내에게 바로 전화를 했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내 탓을 하지 않고 남 탓을 하는 나쁜 버릇이 또 나와 버렸습니다. 어리석게도 아내에게 짜증을 냈죠. 다음부터 주차하기 힘든 미용실에 예약하지 말라면서 괜히 화풀이를 했습니다.
아내와 전화 통화를 마무리한 후에 주변에 있는 공영주차장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파트 밀집 지역이라 공영주차장이 없었어요. 혹시나 싶어 미용실로 전화를 해서 주차장 여부를 물어보았습니다. 허무하게도 상가 주차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그 주차장을 이용하라고 하더라고요.
상가 주차장에 무사히 주차를 한 후에 용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 아내의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제가 아이를 전담하기로 했어요. 이발을 한 이후에 아이를 데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당진도서관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한 문장이 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저를 되돌아보게 만든 책은 김보통 작가의 ‘살아 눈부시게’입니다. 독자들의 다양한 고민 사연을 듣고 저자가 답하는 방식의 만화책입니다. 신중함과 진중함이 묻어 있는 저자의 답변을 보면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질문에 대해 심사숙고했을 지가 짐작이 되더라고요. 저자 특유의 유머와 담백함이 담긴 답변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인생의 본질을 깨우치게 하는 답변을 읽으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책에는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부끄러움, 서운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떨치시나요? 저자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부끄러움보다 상대방이 느꼈을 불쾌감을 먼저 생각합니다. 아아, 오전의 상황에서 저는 경비 아저씨가 느꼈을 불쾌함보다 저의 무안하고 부끄러운 감정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아마 경비 아저씨께서는 충분히 저의 거짓말을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뒷좌석의 아이를 봐서인지 크게 따지거나 질책하지 않았음에도 저는 제 부정적 감정에만 집중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잘못을 지적받을 때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보다 상대가 느꼈을 불쾌감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 오랜 시간 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은 '나의 아픔'이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원래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동물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관대하고 남의 잘못은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약간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들어야 남들이 봤을 때 공평한 정도의 수준인 셈이지요.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수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오늘 하루 평온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저를 위해 배려와 양보를 많이 해 주셨기에 하루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집과 버릇없음을 슬며시 넘겨주는 분들의 너그러움으로 인해 제 하루가 안온하게 흘러갈 수 있었습니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상황을 살펴보아도 명백하게 제 잘못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미용실에 전화해서 오늘 예약한 사람인데 주차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면 됩니다. 당연히 주차 시설이 없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안일하게 출발부터 한 저의 게으름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다음은 나의 편의를 위해 작은 규칙 정도는 쉽게 어기고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뻔뻔함 때문이었고요. 결국 제가 잘못을 해놓고 남을 탓하는 적반하장의 부끄러운 모습을 자식 앞에서 보여주었네요.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화를 낸 것을 사과했습니다. 뜻밖의 상황 앞에서 당황한 나머지 아이의 미용실을 예약한 당신 탓을 하고 말았다고요. 아내는 저에게 방어기제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렸을 때 부모님께 맞고 자란 경험까지 하게 되었죠. 모범생이었던 동생과 달리 호기심과 장난기가 많던 저는 다양한 사건 사고로 부모님의 속을 많이 썩였습니다. 부모님께서 폭력적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부모님께서 욕을 하거나 비속어를 사용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저의 행동을 바로 잡기 위해서 사랑의 회초리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고육지책 덕분에 지금까지 제가 잘 성장할 수 있었다고 믿었습니다. 당연히 제 입장에서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적당한 체벌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체벌로 저를 올바른 방향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신 부모님께 늘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체벌은 교육적이지 못하며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로 아이를 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진 아내와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대 아이를 때려서는 안 된다는 아내의 말은 마치 제 부모님의 교육관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부모님께 맞을 때마다 무서웠습니다. 천성적으로 워낙 겁이 많던 저는 제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는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저를 때리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지만 차마 부모님을 부정하거나 미워하는 생각 자체를 가질 수는 없었죠. 어린이였던 저에게 부모님은 우주와도 같은 존재감이었으니깐요.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부모님을 공포의 대상으로 받아들였고, 작은 질책에도 일단 내 잘못이 아니라고 저를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공포심이 결국 저를 방어하게 만든 것입니다. 40대가 된 지금까지도 조금만 싫은 소리를 들어도 예민한 방어기제를 발동하며 자기 합리화를 시전하게 됩니다. 가령 오전의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한 내 잘못이 아닌 이런 상황을 만든 아내 탓을 저도 모르게 하는 것이죠.
이번 일을 통해 상대로부터 정당한 질책을 받았을 때도 나의 부정적 감정에만 주목해 상대를 공격적으로 대하는 저의 단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어릴 때 부모님의 양육 방식에 있다는 아내의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했고요. 책 속 문장과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통렬히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잘못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실수와 잘못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내 탓이 아닌 남 탓을 해버리면 나이가 들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도 나아지거나 성장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상대를 탓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남 탓부터 하고 보는 사람을 우리는 소시오패스라고 부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을 최대한 없애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의 안온한 하루를 깨뜨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사랑하고 아끼는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하루까지 지켜주고 싶습니다. 글쓰기는 저의 치부를 드러내는 행동이라 늘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읽고 쓰는 삶을 통해 제가 조금씩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경비 아저씨께 제가 빌런이었듯이 우리 역시 누군가의 고민거리입니다.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당신의 고민 중 하나라도 줄여드리고 싶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고민을 줄여주기 위해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가 조금 더 괜찮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