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나의 것이 맞는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by 영천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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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감각은 불완전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한다. 예전에 내가 살았던 동네에서 회식을 한 적이 있다. 주최자로부터 OO 레스토랑에서 모인다고 연락을 받았다. 그 식당이 있는 골목은 매일 내가 다녔던 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길에 레스토랑은 없었다. 그 길을 떠올려보면 소방서, 카페, 석쇠구이, 공영 주차장, 참치, 설렁탕, 복어 가게가 차례대로 있던 골목이었다. 나는 동료에게 그 골목에 OO레스토랑이 없을 테니 다시 한번 알아봐라고, 혹시 예전에 있었던 가게가 망한 거 아니냐고 친절하게 참견을 했다. 하지만 그는 가게에 이미 전화까지 해 예약까지 한 상태였다. 나는 그곳에 그런 가게는 없다며 끝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모임 당일에 매일 다니던 그 길목에 레스토랑이 덩그러니 있음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곳에 레스토랑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나의 뇌가 그 정보를 저장하지 않은 것뿐이었다.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우리의 뇌는 완전하지 않다. 뇌는 신체의 5프로에 불과하지만 20프로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래서 뇌는 효율적이고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려고 한다. 그때 사용하는 것이 '프레임'이다. 우리는 각자의 프레임을 갖고 사안이나 현실을 바라본다. 문제는 나의 머리로부터 나왔다고 생각했던 프레임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생쥐인데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고양이를 언급다면 우리는 생쥐 대신 고양이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인식이 프레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은 출간 당시에도 엄청난 화제를 몰고 오며 시대의 문제작이란 소리를 들었던 고전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바로 하인리히 뵐 작가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는 소설을 소개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간 언론에 그 책임을 물었다. 그리고 넌지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악의적이고 편협한 기사를 진실로 믿고 '모든 게 노무현 탓'이라며 그를 비난했던 우리들을 꼬집었다. '청춘의 독서'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유시민 작가가 소개해 준 책을 읽을 엄두는 못 냈다. 그로부터 10년 후 나는 독서모임을 통해 다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부터 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못했을 책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소설에 담긴 내용과 나의 경험 그리고 느낀 바를 소개하겠다.



왜 그녀는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나


소설은 신문사 기자에 대한 살인 사건으로 시작한다. 요즘의 서사 트렌드처럼 소설의 도입부에서부터 범인이 누군인지를 공개했다. 범인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재테크도 잘하며 성실하고 건실하게 살아가던 20대 초반의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살인을 저지른 후 후회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 7시간이나 거리를 배회했다. 하지만 단 한순간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이제 독자는 그녀가 왜 신문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왜 살인 후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카니발 축제를 맞아 춤을 추고 싶었던 그녀는 신뢰하던 엘제의 집에서 열린 작은 댄스파티에 초대를 받게 된다. 거기서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남자와 서로 필이 맞아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하룻밤을 보냈다. 문제는 괴텐이란 자가 범죄자였던 것이다. 다음 날 오전에 중무장한 경찰관들이 그녀의 집을 덮쳤다. 경찰서로 그녀를 연행하는 도중의 모든 과정이 적나라하게 언론에 공개되었다. 그녀는 용의자에 불과했지만 언론에서는 '카타리나 블룸'에게 살인자의 정부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그녀는 매력적인 외모에 도도함까지 갖추었기 때문에 언론과 대중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었다. 언론은 대중의 알 권리라는 명목으로 도덕적이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해 그녀의 신상과 그녀 주변 사람들을 탈곡기 털 듯 털어냈다. 그렇게 털어낸 모든 팩트를 자신들의 프레임에 맞춰 임팩트 있게 가공했다. 앞뒤 맥락도 없이 편집했으며, 프레임에 맞게 단어와 문법 요소를 수정했다. '차이퉁'이란 언론의 꾸준하면서도 왜곡된 보도로 인해 성실하고 알뜰하며 사려 깊던 그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음탕한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당시는 분단 독일 시대였고, 이념 간의 대립이 심했다.)


한편 동전 하나도 아꼈을 정도로 절제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아파트를 장만했던 그녀의 특별한 취미 생활은 드라이브였다. 독일을 벗어나 네덜란드까지 갈 정도로 최대한 멀리까지 운전을 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한밤 중의 드라이브가 그녀의 취미였다. 하지만 언론과 대중은 그녀의 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절약하는 그녀의 평소 생활태도와 드라이브라는 취미가 모순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범죄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늦은 밤까지 밖에 있었다는 사실이 더욱 그럴듯하게 보였고, 대중들은 그런 매끄러운 해석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적인 면이 있다. 자신의 행동도 스스로 매끄럽게 설명하지 못할 때가 있을 만큼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는 뉴스 속 인물에 대해서는 인지부조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내가 가진 프레임에 그 정보를 맞추어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녀에게 '악녀'라는 프레임을 씌운 후에는 그녀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어떻게든 그 프레임에 맞추려고 한다.



살인이라는 그녀의 행동은 정당했나


우리들 대부분은 살면서 언론의 피해자가 될 일이 드물다. 그래서 뉴스에서 말하는 정보들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 거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가 아니면 진짜 현실은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언론이란 거대 권력 앞에서 개인은 한없이 무력하다. 검찰의 권력이 지금보다 훨씬 무서웠던 80~90년대에도 어른들이 판검사 다음으로 기자를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는 왜 '기자'라는 직함 앞에서 어른들이 꼬리를 내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도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이 사람이 쥐고 있는 펜의 힘이 자신의 생사를 흔들 만큼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가령 펜의 힘을 가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특정 프레임을 갖고 개인인 나를 몰아세웠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여론과 집단이 지속적으로 나를 공격한다. 과연 개인에 불과한 나는 버틸 수 있을까? 교실 안에서도 특정 프레임으로 인해 설자리를 잃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거나 자퇴를 하는 경우가 다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누구나 언론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거대 언론 기관에 비하면 한없이 영향력은 미비하지만, 세상에 나의 억울함을 알릴 수 있는 인터넷이란 창구는 존재하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인스타, 페이스북, 인터넷 게시판과 같은 경로를 통해 화제가 될 경우 다시 메이저 언론사를 통해 공식 보도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카타리나 블룸이 살고 있던 세상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차이퉁이란 언론에 의해 이미 정신적인 살인을 당했다. 앞으로 그녀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행위에는 제약이 따를 만큼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가십을 찾아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녀는 곧 잊히겠지만, 세상은 오랜 기간 그녀에게 새겨진 주홍 글자를 쫓아다닐 것이다. 결국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은 자신의 인격을 살해한 차이퉁의 기자를 살해하는 것뿐이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의 자연법만이 그녀가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photo-1588681664899-f142ff2dc9b1.jpg?type=w1 © thenewmalcolm, 출처 Unsplash


잘못은 언론에만 있는가


"좌파 정권, 친북 인사가 대통령이 된다면 우리나라에 큰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지난 대선 때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실제로 연설 때 자주 사용했던 말이다. 그는 상대 후보를 비방하기 위해 '좌파 정권', '친북 인사'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고, 언론은 그가 썼던 단어들을 열심히 퍼 날랐다. 언론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좌파', '친북'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들이 그런 단어가 포함된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결국 뉴스의 수준은 그 뉴스를 소비하는 대중들이 만들 수밖에 없다.


지속적인 교육과 언론의 힘으로 '김대중,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경우 대한민국을 북한의 김 씨 독재 정권에 넘겨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던 어른들이 떠올랐다. 지난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대한민국이 적화 세력에 의해 공산화가 될 거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 때 생산된 고정된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소비자들이 많기에 뉴스 역시 그 프레임에 맞춰 대량으로 생산된다.


언론에 의해 인격 살인을 받게 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선택뿐이다.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남을 파괴하는 것이다. 언론에 의해 인격 살인을 당한 많은 사람들은 자살로 생을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소설 속 주인공인 카타리나 블룸은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경찰에게 한 진술서를 꼼꼼하게 읽고 진실이 왜곡되어 있는 부분은 민감하게 받아들여 수정을 요청했다. 언론의 공격과 세상의 질타에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언론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게 퍼붓는 어리석은 짓은 범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다.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를 썼고, 대중의 알 권리를 명목으로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았으며, 인터뷰 현장에서도 섹스나 한탕하자고 성희롱을 일삼던 기자에게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앞서 누구나 뉴스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기에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교묘하게 팩트를 비틀어 다른 의도를 갖게 만들었다면, 요즘은 아예 없는 사실을 있었던 일처럼 만들어 버린다. 이런 세상에 누구나 미디어와 언론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카타리나 블룸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뉴스의 소비자인 우리들의 각성뿐이다. 아니면 말고 식의 가짜 뉴스를 비판하고, 황색 언론을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매끄럽지 않는 이야기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만약 블룸의 억울함을 공감하고 응원해 주던 이웃이 많았다면, 그리고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여론이 존재했다면 어떠했을까? 최소한 그녀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뉴스를 통해 카타리나 블룸에 대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단편적으로 그녀를 규정해버렸다. 공산당의 암캐, 성실한 남자를 버린 비정하고 탐욕스러운 창녀 등의 프레임으로 그녀와 관련된 모든 기사를 소비했다. 급기야 그들은 우편물과 전화를 통해 카타리나를 성적 대상으로 일삼았고 그녀의 인격을 모독하고 직접적으로 공격했다. 블룸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인터넷 악플 공격까지 받아야 했을 걸이다. 다들 그녀의 속 사정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녀를 공감하려는 노력도 없었다. 대중은 노골적으로 그녀를 비난했으며, 서슴없이 성희롱했고, 의도적으로 빤히 쳐다보며 모욕했다.


지금은 인터넷이란 익명성을 무기로 갖고 있기에 누군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기가 훨씬 수월한 시대이다. 아무리 상식적인 범주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말을 하고 글을 쓰기 전에 한 번 더 고민을 했으면 한다.


"과연 내가 가진 생각은 정말 나의 것일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런 주제의 소설이 이미 1970년대에 독일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놀랍고 부럽다. 같은 시기의 우리나라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언론은 국가 정보기관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정부와 기업의 나팔수 역할을 해야 했다. 198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언론의 헤드라인과 첫 뉴스는 전두환 대통령 부부에 대한 내용으로 장식되었다. 언론 취재 과정에서 개인의 사생활 따위는 당연히 무시되었을 것이다. 정권을 비호하는 가짜 뉴스를 쏟아냈고, 대중들은 서서히 매체에 의해 세뇌되어 갔다. 저자인 하인리히 뵐은 나치 정권을 경험했기에 언론의 위험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독일 시민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었기에 나치의 선동을 믿고 유태인 학살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지속적인 선동을 통해 프레임을 바꿔 버리면 이후의 모든 팩트는 그 프레임에 의해 해석된다. 마지막까지 히틀러에 충성하며 나치당의 선전장관 역을 충실하게 수행했던 괴벨스는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한 번 한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지만 천 번을 반복한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대는 블룸이 살았던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는가? 아니, 부모님이 청춘이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물론 신문, 뉴스를 보도하기 전에 안기부로부터 세세하게 검열 받았던 그때보다 지금의 우리 사회와 언론의 수준이 민주적으로 나아졌다는 점은 명명백백하다. 그럼 뉴스를 소비하는 우리는 어떠한가? 거대 플랫폼인 네이버와 다음이 걸러주는 뉴스와 거기에 달린 답글만을 보며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우리는 과연 부모님 세대보다 더 나은 의식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거대 포털 사이트가 뉴스를 독점하는 시대에 과연 나의 생각은 나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으며 김지은 씨가 쓴 책이 떠올랐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비서였던 김지은 씨는 그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세상에 고발한 후 그가 유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의 과정을 담은 '김지은입니다'라는 책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저술했다. 당시 그 사건의 여파는 엄청났다. 안희정 씨는 유력한 대선 후보였다. 지난 민주당 경선에서도 문재인 현 대통령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문재인 대통령 당선 후 축하 집회에서 문 대통령에게 기습 뽀뽀를 했을 정도로 그는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였다. 젠틀한 외모와 젊고 진보적인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인기도 좋았다. 그래서 그가 이 나라의 다음 대통령이 되어주길 바라던 대중에게 그의 성범죄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때부터 피해자 김지은 씨에게 '피해자 답지 않다'라는 프레임이 쓰여졌다. 안희정 씨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꾸민 정치 공작이란 말도 여기저기서 흘러 나왔다. 앞뒤 모든 맥락을 편집한 카카오톡 메시지의 '넹'이란 대답을 놓고 그녀가 피해자 답지 않다고 언론과 대중은 냉혹하게 평가했다. 그녀가 다른 사람과 나눈 대화도 안희정 전 지사와 나눈 대화처럼 둔갑했고, 국민의 알 권리란 명목으로 그녀의 사생활은 여지없이 공개되었다. 성폭행 피해자였던 그녀는 어느덧 유력 정치인을 끌어내리려는 꽃뱀으로 낙인찍혔다.


앞서 우리의 감각은 불완전하다고 언급했다. 사람은 누구나 인지 부조화 상태를 싫어한다. 자신의 신념이 깨지지 않기를 바란다. 대중은 안희정 전 지사가 지도자로서의 도덕성과 역량을 갖추었을 거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래서 김지은 씨를 비방하는 뉴스와 기사를 원했고, 언론은 대중의 입맛에 맞춰 그녀를 공격했다. 언론에서 김지은 씨를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난해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매도해야 대중들은 안도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언론 기사의 내용만을 믿고 그녀를 의심했으며, 그녀의 용기를 폄하했고, 그녀에 대한 험담까지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권력자 앞에서 인격을 유린당하며 남은 생을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실명으로 대중 앞에 선 그녀의 두려움을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추지 못했다. 그녀의 용기를 응원해줄 수 있는 깜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는 권력자의 프레임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미약한 개인 주제에 말이다.


재벌 회장이나 유력한 권력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언론이란 거대한 자본주의 권력 앞에서 한없이 약한 개인일 뿐이다. 앞으로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또다른 카타리나 블룸이란 희생자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될 수 있는 우리들에게는 가짜 뉴스에 대한 경각심,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상식을 다시 생각하는 자세,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이 세상에 출간된 지 어느 새 40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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