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이들을 스치는 곳
통일로를 따라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가다 보면 벽제천이 가늘게 흐르는 곳이 있어. 벽제천을 옆에 두고 위치한 ‘벽제 추모공원’. 그곳이 오늘 너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야. 이름에서부터 이미 눈치챘겠지만 여기는 누군가를 추모하는 공간이야. 그래 맞아. 죽음들이 모여있는 곳. 아직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떠난 그들을 만나러 오는 곳. 그들을 위한 추모인지 그들의 기억을 지닌 살아있는 이들 자신을 위한 것인지 모를 그 어디쯤의 추모.
이 공원에는 유별나게 고양이들이 많아. 까만색 노란색 회색. 고양이들은 볕이 드는 입구에 누워 차분하게 일광욕을 해. 그러다 잠든 아이들을 볼 때면 그 아이가 느끼는 평온함이 고스란히 전해질 때가 있어.
내가 이곳에 오기 시작한 것은 8년 전이야. 첫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막 바닥에 발을 떼고 걷기 시작할 때 묽게 흐르는 유동식이 아닌 씹히는 밥을 먹기 시작할 때 멈마가 아니라 ‘엄마’라는 소리를 제법 정확하게 할 때 나의 엄마를 떠나보냈어. 지금은 10월도 제법 따뜻한 바람이 불지만 그 당시의 10월은 어찌나 공기가 차가운지 코가 맵고 귀가 시렸지. 검은색 한복 위에 집에서 가장 두꺼운 카키색 패딩을 골라 입고 이곳에 올라왔던 그때.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기분. 비현실 속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어. 엄마의 납골함은 아래서부터 일곱 번째 칸에 놓였고 그 아래와 위, 오른쪽와 왼쪽엔 엄마의 것과 비슷한 모양과 질감을 가진 납골함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어. 그렇게 수많은 죽음들을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던 것 같아. 그때 비로소 내가 겪은 엄마의 죽음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어.
엄마를 보러 가는 곳이지만 갈 때마다 늘 더 많은 이들을 만나. 이 납골당에 놓인 이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 이곳에는 납골함만이 놓인 경우는 거의 없어. 그들의 가족 또는 연인 혹은 친구들. 그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와서 생에 가장 행복했던 날들의 사진, 혹은 죽은 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반려동물의 사진 혹은 작은 물건 같은 것들을 놓고 가. 하얀 국화가 연상되는 조화 꽃 한 줌을 달아놓기도 하고 만약이라도 먼길을 떠난 이들이 느낄 허기 걱정에 갖다 놓은 미니어처로 만들어진 제사상도 있어. 우리 딸아이는 그것을 보고 ‘냠냠’ 이라며 먹는 시늉을 하기도 했어.
납골함에는 죽은 이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에 발을 디딘 날과 떠난 날의 숫자 여덟 자리가 적혀있어. 요즘은 생년월일도 개인 정보지만 이미 죽은 이들의 번호는 보호해야 할 어떤 정보에 속하지 않나봐. 그 여덟 자리 숫자를 통해 그들의 나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어. 그 나이로 누군가의 자녀 혹은 누군가의 보호자 혹은 친구라는 뭉뚱그린 정보를 대략 떠올려. 내 시선이 오래 머무는 곳은 나와 비슷한 출생연도를 가진 이들 앞에서야. 혹은 이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이른 이들 앞. 너무 이르거나 늦다는 것은 누가 정하는 것인지 사실 오고 가는 것에 순서는 없다지만 생전 모르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뭉클해질 때면 남아있는 나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돼. 그리고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죽음에 대해서도 그제서야 느끼게 돼.
엄마를 그곳에 모시고 작년까지 내가 흘렸던 눈물은 억울함의 눈물이었어. 살아있을 때도 술을 마시는 엄마 때문에 적잖이 고생했었거든. 그러다 갑작스럽게 용서할 혹은 미워할 혹은 이해할 시간을 주지 않고 떠나 버린 엄마에 대한 감정을 무엇으로 정의하기 힘들었어. 딸을 키우며 엄마의 입장이 되어 엄마가 이해될 때는 한없이 그립다가 딸을 두고 나가 술을 마시고 방황하던 엄마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면 그를 그리워한 내가 미웠어. 엄마가 죽고 49일이 지나고 매 년 엄마의 기일 마다 찾은 납골함 앞에서의 눈물은 억울함과 분함.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두고 슬픔과 그리움이 아닌 억울함과 분함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에 대한 눈물이었어.
시간이 지나면 어떤 명확한 하나의 감정으로 좁혀지고 명쾌해질 것 같았는데 8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엄마를 떠올리면 어떤 이유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지 어떤 마음으로 엄마를 추모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일년에 한번 있는 엄마의 기일과 마음이 허할 때 찾는 이 납골당에 들어서서 드는 감정은 여전히 분함이고 안타까움이고 그리움이고 슬픔이야. 모든 감정을 합쳐놓은 듯한 기분. 부옇고 어중간해.
늘 이곳에 갈 때면 남편과 나의 두 아이들을 데리고 갔어. 혼자 운전해서 올 엄두가 나지 않았기도 했고 나 혼자서 엄마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어. 아이들과 남편이 옆에 있어서 마음껏 울 수 없다는 게 오히려 안전장치처럼 느껴졌어.
그치만 이번 봄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노오란 후리지아 꽃을 사서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나의 가족 말고 너말이야. 왠지 너와 함께라면 좀더 마음 껏 그곳에서 엄마를 미워하고 되는대로 슬퍼하고 그리워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의미,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의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어.
그곳에 간지 8년이나 됐는데 나 혼자로서 그곳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어. ‘나랑 같이 그곳에 갈래’ 라던 글이 예기치 않게 그곳에 혼자 가지 못했던 내 모습을 보게 해줬어. 다 쓰기 직전까지는 무엇을 쓸 수 있을지 모르는 게 글인 것 같아. 그래서 글이 좋아.
볕이 내리쬐는 마당에서 꾸벅 꾸벅 조는 고양이들을 만나러 수많은 이들과 스치러 가보자. 그곳의 봄은 따뜻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