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4시간전

너무 쉽게 고통과 치유를 말하는 사회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고통과 슬픔에 대해 이토록 현실적인 영화가 또 있을까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실수, 실수라고 하기엔 모두의 삶을 바꿔버린 사건. 사랑하는 이들을 잃게 된, 그것도 자신의 실수로 인한 그 상실을 리는 몇 년동안이나 외면한다. 잘 살고 있지? 라는 물음에 나는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라는 말을 내뱉는 그. 자기 안에 꾹꾹 눌러담은 자신에 대한 혐오와 상실의 고통을 마주할 수 없는 리가 했던 대답. 전부 맞고 혹은 전부 틀린 그 대답 앞에 선 그를 보며 결코 극복될 수도 넘어설 수도 없는 인간의 ‘트라우마’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불안정한 양육자와 함께 살아가면서 트라우마로 남은 시간들. 어릴 적 내가 필요했던 돌봄과 사랑을 다른 누구에게 쏟아부으면서 보상 받으려 했지만 결국엔 허망함만이 남은 관계들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긍정할 수 없는 나. 나를 향해 매몰찬 나. 그것이 모두 트라우마로부터 기인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배우자를 만나 서로의 그늘에 발을 걸쳐보고, 직장을 잡아 경제적 기반을 다져가고, 두 아이를 기르며 누군가를 뼈저리게 사랑하고 양육하며, 심리 상담을 몇 년동안이나 받고서 체득한 것들. 나를 심하게 자책하지 않고 애를 쓰지 않고 그냥 나로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법을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릴적 그 시간들은 어느 순간 찾아온다. 운동화 안에 든 작은 돌멩이처럼 상처를 내며 나를 자극한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시간들이 곧 나라는 것을 그 시간들로 나는 이루어졌으며 그렇다고 그 시간들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님을. 그 시간은 나란 존재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중의 하나이며 그것들이 아니라면 지금의 나도 없음을. 그것들을 품고 다독일 자신이 없고 언제라도 내 자신의 약함과 그 어두운 시간들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것들이 나의 일부임을 알아가고 인정해가고 있다.

 

너무 쉽게 고통을 이야기하고 그것의 치유와 극복에 대해 떠드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이 여전히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 사회에 살면서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상실과 그로 인한 슬픔에 대해 쉽게 말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그의 곁을 지켜보며 앵글로서 그를 담아내는 영화가 있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이겨낼 수 없는 아픔으로 신음하는 이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바다로 둘러싸인 맨체스터. 바다처럼 늘 그렇게 존재해왔고 존재하며 그를 잠식해갈 수도 있는 리의 상처. 영화 말미에는 그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혹은 그의 삶의 향방이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자그마한 단초 조차 주지 않는다. 그저 바다를 보고 앉은 그의 모습을 비추면서,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그의 모습을 담을 뿐이다. 이런 영화 앞에서면 나는 삶과 사람에 대해 겸손해진다.


영화 중간 모두의 삶을 바꿔버린 그 사건의 전말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정말 노골적으로 비극적인 음악이 깔린다. 영화 흐름 상 이런 방식이 어색하고 기시적이라는 것을 감독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 좋았다. 슬픔은 숨겨지지도 숨겨질 수도 없는 것이니까. 이 영화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내게 완벽했다.


*영화에서 나온 음악

Adagio Per Archi E Organo In Sol Minore

London Philharmonic Orchestra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