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방과 자라는 아이들

글쓰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by 한시영


매주 토요일 오후 두 시, 줌에 접속한다. 화면 속 열명 남짓한 푸석푸석한 얼굴들. 지난 밤 늦도록 글을 쓰고 지웠을, 알람 소리에 겨우 일어나 간신히 마감을 맞춘 이들이다. 매주 한 편의 글을 쓴 뒤 다른 동료들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글방 생활이 올해로 만 4년 째다.


엄마 글은 다 썼어?


열두 살 첫째의 관심사는 늘 엄마의 마감이다. 엄마의 말투와 태도가 마감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아이. 그래서 이 집에 살고 있는 그 누구 보다 나서서 내 글쓰기를 재촉한다.


엄마 빨리 써. 얼른 써야 나랑 놀지. 이제 그만 누워. 얼른 일어나.


방금까지 글을 쓰다 바닥에 누운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나를 노트북 앞에 앉힌다. 엄마의 까칠함을 덜어내는 것은 마감 뿐이라는 것을 지난 4년간 터득한 이의 모습이다.


토요일 오후에 줌 화면이 켜지고, ‘안녕하세요’ 라는 음성이 들리면 또 다른 아이가 쏜살같이 달려온다. 이 집에 사는 둘째다. 올해 여덟살인 둘째가 네 살 때부터 글방을 시작했으니, 이 아이는 인생의 반을 글방과 보낸 셈이다. 노트북 앞에 선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출석 체크를 시작한다.


오늘 출석은 일곱명. 다들 늦나보네. 근데 조개가 안 보여.

보래는 또 출장 갔나.

어? 남자다! 언니! 글방에 남자가 왔어!


동생 소리에 첫째가 부리나케 달려와 닉네임을 읽는다. 비.건.탕.수.육? 이 사람 비건인가봐. 비건 남자들은 글을 쓰나보지?


아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논리로 화면 속 격자무늬 세상을 해석하고 평가를 덧붙인다. 오늘은 사람이 적은 걸 보니까 해 지기 전엔 끝나겠네. 오늘 보래 화면이 까매서 고양이 보기엔 틀렸네.


글은 혼자 쓰는 것이지만 글을 쓰는 생활은 늘 주변으로 번진다. 글 한 편을 마감하기 위해 주 초반에 기억을 샅샅이 뒤지거나 관련 책들을 뒤적인다. 글의 내용을 수집하고 뼈대를 잡은 뒤 수요일 즈음 초안을 쓰고, 이후에는 거듭 고치는 일에 돌입한다. 이 루틴에 맞춰 아이들과의 일상도 함께 조정된다. 월화수에는 여유가 있어 직접 만든 음식으로 아이들과 식사를 하고, 금요일 즈음에는 마감을 앞두고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어 종종 배달음식을 시킨다. 주 초반, 아직 마감과 거리가 먼 엄마는 착한 엄마가 되고 마감이 코앞인 금요일에는 아이들 표현으로 사나운 엄마가 된다.


길면 세 시간이 훌쩍 넘는 글방은 꽤 높은 집중도가 요구된다. 내 글에 대한 합평도 합평이지만, 다른 동료들이 쓴 글을 읽고 말을 건네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시간이 쌓인다고 요령이나 노하우가 쉽게 생기는 일도 아니다. 동료의 글을 읽으며 지난 글과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먼저 본다. 처음 읽었을 때와 두 번 읽은 뒤의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도 살핀다. 글을 읽고 떠오른 작품들을 찾느라 독서 목록을 뒤지기도 한다. 동료들이 각기 다른 글들로 가져온 세상과 글 속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좋은 의미로 진이 절로 빠진다. 하지만 아이들이 이걸 알 리 없다. 저 화면 속에 무엇이 있길래, 별다른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얼굴들에 엄마가 그토록 깊이 빠져있는지 그것이 궁금할 뿐이다.


글방 시작 십분 전, 서랍에서 캬라멜 하나를 꺼내 둘째 아이에게로 간다.


현이야. 엄마가 글방 시작하면 언니랑 아빠는 수영가잖아. 그럼 엄마랑 너랑 둘만 남고. 엄마 글방 시작하면 한 시간은 혼자 놀아보는 거야. 알았지? 엄마 옆에 앉아서 현이도 멋있게. 그림도 그리고 가위질도 하고. 만다라 색칠도 하고. 한 시간 동안 혼자 잘 놀면 엄마가 영상 보여줄게. 자 아 해봐, 현이 좋아하는 캬라멜.


딱딱한 캬라멜에서 흘러나오는 단물에 기분이 좋아진 아이가 입을 오물거리며 나와 새끼손가락을 걸고 복사에 도장까지 꾹 찍는다. 엄마 걱정마, 나 얌전히 있을 거야. 나 여덟 살이잖아. 그리고 삼십 분 쯤 흘렀을까. 얌전히 있겠다던 아이가 내게 와 말을 건다. 엄마, 글방 언제 끝나는 건데.


차라리 밖이라면 모르겠지만, 집에서 글방을 할 때면 아이들은 더 안달이 난다. 엄마가 옆에 있는데 왜 가면 안 되는지, 왜 지금은 말을 걸 수 없는지. 머리로는 이해해도 몸이 먼저 엄마 쪽으로 절로 기울어진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양육자로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늘 이런 식이다.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음을 인정하는 타협 위에서,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약속 위에 작은 바람들을 간신히 올려놓는.


아이가 다섯 살 때만 하더라도 아이와 한 공간에서 글방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남편이 토요일에 다른 일정이 있는 날이면 아이를 돌봐줄 선생님을 구했다. ‘째깍악어’나 ‘자란다’같은 앱에 토요일 오후 한 시 삼십 분 부터 다섯 시 삼십 분까지의 시간을 설정해놓고 돌봄 매칭을 기다렸다. 시간에 맞춰 집에 온 선생님에게 아이와 함께 먹을 간식과 주의 사항 몇 개를 건넨 후, 스터디카페로 뛰어가 서둘러 글방에 접속했다. 지금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좀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글방에 등록 인원이 많은 달이면 읽어야 할 글도, 합평할 글도 많아진다. 겨울이라는 계절을 지날 때라면 밖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글방이 이어진다. 글방이 후반부에 접어들 즈음, 수영을 다녀와 머리에 물기를 머금은 첫째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온다. 아이의 눈에는 매주 보는 장면이어도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진지하게 떠들고 있는지가 궁금한 모양이다. 본인이 말할 차례가 아닐 때에도 다른 이의 말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곰곰히 살핀다. 그래도 열두 살이 되고 얼추 체면이란 것이 장착된 아이는 집중하는 엄마를 놔둔 채 자리를 뜬다. 토요일 저녁, 글방이 끝나고 노트북 화면이 닫히면 우리집에는 온전한 의미의 주말이 시작된다.


어느날 수업이 시작되고 도안 위에 색칠을 하던 아이가 색연필을 내려놓더니 큰일났다는 듯 묻는다.


엄마. 그거 알아? 조개가 안 나온지 몇 주가 지났어. 조개는 어디로 간 걸까.


주말에 공부, 아니면 일을 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아이가 내게 다시 묻는다. 그럼 글은 언제 쓴대? 대충 보는 것 같아도 줌 화면 속에 늘 보이던 이가 없는 것이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다. 아이는 부재 너머에 있을 시간들, 화면 바깥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시간들. 글을 쓰고 고치며 살아가는 또 다른 시간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저녁을 준비하는데 저 멀리서 두 아이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현아 오늘 엄마 기분 좋네. 나 수영 갈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엄마 오늘 글방에서 칭찬들어서 그래. 근데 언니, 살보 알지? 살보는 구급차야?

아니, 구급대원.

근데 오늘 보니까 두루주가 한국말을 잘 하더라. 미국에 사는데 어떻게 그렇지?


일요일 밤에는 아이들과 함께 기도를 한다. 교회에서 기도를 배워온 아이들은, 기도를 하며 불안을 낮추고 자기 마음을 달랜다.


나는 수영 잘하고 싶은데 평영 발차기가 너무 어려워. 이거 기도해줘.

나는 이제 초등학교 가는데 걱정돼. 내가 책상 의자에 잘 앉아 있을 수 있을까?

엄마는 글을 쓰면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재밌고 씩씩하게 해내면 좋겠어. 엄마를 위해선 이걸 기도해줘.


가만히 듣고 있던 둘째가 갑자기 손을 번쩍든다.


내가 엄마를 위해 기도해볼게.


우리 엄마 글을 써서 글방에서 칭찬 많이 받게 해주시고, 건비 탕수육. 조개. 어딘. 보래. 본본. 해보미 언니. 목원. 아씨. 두루주. 엄마 또 누구있더라. 아, 칠석. 스라. 다영이. 모두 다 글 잘 쓰게 해주세요. 우리 엄마가 이 사람들이랑 글 잘 쓰고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글방할 때 제가 얌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앞의 젖니가 빠진 아이는 바람이 세는 듯한 발음으로 글방 동료들의 안위를 빈다. 마음만은 이미 글방 명예 회원인 아이들. 그 아이들과 여전히 만만치 않은 글쓰기를 영차 영차 이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