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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홍 Jan 08. 2023

스물아홉, 디즈니랜드에서 울다

웃다 울다 디즈니랜드 첫 방문기

이런 미친…

 물품보관함은 2만 원이 넘는 돈을 집어삼키고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획대로라면 벌써 짐을 맡기고 퍼레이드를 보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주변에 있던 경비원에게 도움을 청해 봤지만 별수 없었다. 급한 대로 일단 다른 보관함에 맡기고 억울하게 삼켜버린 돈을 돌려받기 위해 본부로 향했다. 놀이공원에 오기 위해 들인 돈과 입장권, 물품보관소에서 날려버린 시간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본은 일찍 해가 진다는데,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에 고작 만 얼마를 환불받으러 가야 한다니. 욕이 절로 나왔다.

친절하지만 손이 느린 직원은 환불 금액을 몇 차례나 확인하고는 지폐와 동전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액수를 확인시켰다. 맞아요, 맞아. 1천600엔. 저 이제 가봐도 될까요. 말은 못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다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본부를 뛰쳐나왔다. 친구야, 우린 낭비할 시간이 없다. 결연한 다짐을 나누고 입구에 들어섰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놀이공원에 가면 동심으로 돌아간다고 했던가. 나는 새벽부터 굶주린 사실도 잊은 채 동네방네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몰려오는 허기에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핫도그 세트를 시켰는데.. 비주얼이 충격적이었다. 이걸 어떻게 치킨값을 받고 파는 거지? 식당 내부에 자리도 없어 야외에서 비둘기와 함께 핫도그를 먹으며 웅얼거렸다.

코스트O 핫도그가 더 맛있을 거 같다..

 놀이기구까지 타고나니 하늘은 벌써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점심에 놓친 퍼레이드 공연이 몇 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돗자리를 깔기 시작했다. 급하게 가방에 있던 아무 종이나 꺼내 깔고 앉았다. "완전 노숙자네." 깔깔거렸지만 시간도 끼니도 여러모로 가난한 날이었다. 나는 또다시 놀이공원에 오기 위해 들인 돈과 입장권, 물품보관소에서 날려버린 시간과 냉동식품 같은 핫도그에 대해 생각했다.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가성비를 따지는 마음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퍼레이드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공연이 시작됐다. 퍼레이드카의 불빛에 어두운 놀이공원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넋을 놓고 보던 와중에 퍼레이드의 시작점에서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유년시절, 늘 내 품에 있던 모습 그대로 미키마우스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미키마우스를 보자 인형을 품에 안고 가족들과 함께 나가곤 했던 꽃놀이, 단풍놀이 같은 계절 소풍과 엄마에게 혼나 울면서도 인형을 붙들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꼭 잊고 살던 유년시절의 친구가 내가 여기 이렇게 잘 살아 있었노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주책맞게 눈물이 나왔다. 디즈니랜드에 가서 우는 사람도 있대, 웬일이니. 남의 얘긴 줄 알고 떠들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 주책맞은 사람이 나라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나는 공연을 즐기는 인파 속에서 혼자 눈물 콧물을 쏟고 있었다.

울면서 찍은 미키마우스

공연이 끝나고 날은 완전히 저물었지만 나는 그제서야 낮에 있었던 일들을 잊게 되었다. 놀이공원에 처음 온 여섯 살이라도 된 것 마냥 모든 게 새롭게 느껴졌다. 미녀와 야수처럼 알고 있던 동화 내용에도 새삼스레 감동하더니 어느샌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정확히는 아이들)과 범퍼카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우스운 꼬라지로 정체불명의 춤을 추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하겠구나.

누가 보면 큰일 날 광란의 범퍼카 댄스파티가 끝나자 폐장 시간이 다가왔다. 다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괜스레 몇 번이나 다녀온 기념품 가게에서 늑장을 부리다 놀이공원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이 되어서야 꾸물거리며 출구로 향했다. 출구로 나가는 길목에 놓인 트리 앞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 장소가 으레 그렇듯이 몇 번 붙잡혀 사진을 찍어주다 이 시간까지 함께 남아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담은 눈들이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반짝였다.

 세례를 받고도 연례행사처럼 교회에 가는 나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름도 모르는 이들의 앞날에 오늘과 같은 행복이 함께 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짧은 기도 후 나는 다짐인지 전언인지 모를 말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언젠가는 또 잊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없을 테지만 너무 아쉬워하지 않을게. 앨범처럼 열어볼 유년 시절이 여기 도쿄에도, 상해에도, 저 멀리 파리와 LA에도 있다고 생각할게.’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을 옮기자 맞은편 호텔 창가에서 연인인지 가족인지 모를 이들이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할 것처럼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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