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Daniel Blake
2015년 10월 23일 런던, 듣던 대로 코를 통해 들어오는 텁텁한 느낌의 공기는 서울의 그것과는 달랐다. 흐리멍텅한 회색빛 하늘 탓인지 도시 전체가 우중충해 보인다. 구빈법으로 유명한 영국은 수많은 사회학자들과 복지 관련 종사자들에게 한번 즘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하고 한국에선 이미 견학 단골 국가다. 나 또한 그 행렬들 중 하나였다. 처음 만난 런던은 영화속에 자주 등장하는 시계탑 빅벤을 중심으로 템스강의 상징인 타워브릿지, 런던아이, 버킹검 궁전, 새로운 랜드마크 더 샤드를 비롯해 밤이 되면 더 반짝였다. 그야말로 이 도시의 야경은 연인들의 사랑과 낭만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이면에 대도시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들여다 보기 전 까지 적어도 나는 이 도시에 대한 알 수 없는 로망으로 가득했다. 그도 잠시, 런던 중심부를 벗어나기 시작하니 달라지는 지역적 특색과 사람들의 분위기는 그냥 사람이 사는 도시의 날 것 그대로다. 도심을 연결하는 지하철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 보다 불청결 아니 더러웠고, 걷는 동안 콧속은 이름 모를 검은 가루로 가득차 올랐다. 도시 외곽의 소도시는 다양한 인종과 흑인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어쩌면 그 옛날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살았던 노예와 가난한 서민들의 후손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간다.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비싼 물가와 사회보장제도를 자랑했던 나라 영국, 그 나라의 해는 아직 저물지 않았을까?
2016년 12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당시 라라랜드의 흥행 열풍이 연말까지 이어지면서 160만 관객을 달성했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9.9만 이라는 국내 관객으로 적지 않은 흥행을 기록했다. 물론 라라랜드의 흥행에 비하면 말도 안돼게 적은 숫자지만, 사회비판을 다룬 영화를 이 정도 관객이 보았다는 것은 가히 놀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관객수가 의미하는 것은 아직 이 사회를 정면에 맞서 정직하게 보고자 하는 시민들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본다. 영화는 댄의 마지막을 암시하듯 아무 배경도 없는 캄캄한 스크린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통화 내용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댄이 살고 있는 도시 뉴케슬(Newcastle upon Tyne)은 영국 북동 지방에서도 인구가 가장 많은 대도시 중 하나다. 14세기 양모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이후 영국의 중요 탄광지역이었다.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정치.사회를 반영하기로 유명한 영화감독 캔 로치가 은퇴를 선언하고도 이 영화를 제작하며 뉴캐슬을 주인공의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2014년 런던통신에 의하면 런던의 평균 집값은 49만2000파운드(7억3800만원)로 지금의 서울 집값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에 비해 영국인 평균 임금은 4,085만원에 불과했으니 실로 노동 시간에 제한을 받는 싱글맘 케이티가 더이상 런던에 살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방 한칸에 세식구가 살던 런던의 삶을 청산하고 댄이 살고 있는 뉴캐슬로 이사를 오게 된다.
대도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대신, 값싼 노동력을 요구하고 적지 않은 희생을 강요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희생은 평생의 노동이 내 집 한칸 마련할 기회를 주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며 머무르는 'house'는 단지 물리적인 형태만이 아닌 'home' 즉, 가정이 기반이 되는 곳이다. 케이티의 아들 딜런이 가진 강박적 행동의 변화는 집의 변화와 더불어 댄을 비롯한 가족의 상호작용에 기인하다. 인간의 심리.정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정환경이라는 것에 동의 하지 않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국가는 국민의 심리.정서의 기반이 되는 안정된 주거공간을 확보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국과 유럽의 국가들이 지방정부나 공공기관 투자 사회주택(Social Housing) 보급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런던과 같은 대도시를 돌아가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댄은 시대가 만든 사회적 약자다. 정보화사회에서 인터넷은 도시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지만, 정보 소외계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아온 노인들에게 정보화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댄은 구직수당을 신청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아가지만, 한번도 접해보지 않은 컴퓨터와 씨름을 하다 정해진 인터넷 사용 시간을 놓치고 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19년 인터넷 이용실태 조사'에 의하면 70세 이상 노인의 인터넷 사용율은 38.9%에 불과하다. 2020년 코로나19 전염병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더 멀어졌고, 기계로 소통하는 시간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작년 1차 재난지원금 지원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 복지관은 일주일 동안 50세 이상 중장년층들의 재난지원금 핸드폰 신청을 도와야 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사랑 카드가 발급되어 전화로 신청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마저도 어려운 지역주민들이 복지관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핸드폰으로 신청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더 나이든 어르신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바이러스 감염 위험에도 불구하고 행정복지센터까지 직접 찾아가 카드를 발급 받았다.
평생을 목수로 살다 심장이 언제 멈출지 모르는 댄에게 정보화 시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싱글맘 케이티는 어떠한가? 노동을 하지 않고는 먹고 살 수 없는 사회구조 안에서 두 아이의 양육을 위해 정부 생계수당에 의존해야 만 하는 그녀에게 지방행정당국은 상담 시간에 조금 늦었다는 이유로 수당신청 상담을 받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의 전학을 위해 전기요금 마저 포기한 그녀는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약자임에 틀림 없다.
영화 속 댄의 이웃은 모두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다.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부 수당이나 혜택에 의존하기도 한다. 일할 능력이라도 생기면 구직활동을 해야 관련된 수당을 받을 수 있다. 가난은 무엇이며 가난하게 산 다는 것은 무엇일까? 댄은 심장질환으로 일할 수 없다는 의사(General Practitioner)의 소견에도 불구하고 PCA(개인능력평가)에 의해 질병수당에 거절 된다. 댄의 질병수당 신청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다 영국의 철저한 관료주의 사고 방식에 불편함을 느꼈다. 국민의 삶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와 시스템에는 인간에 대한 본질이 사라지고 없었다.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댄의 assessment는 전문가의 견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단순 조사 수준에 불과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관료주의적 태도는 인간에 대한 존엄과 가치를 조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난'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사람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해야 가난도 이해할 수 있다.
댄이 이력서 작성 교육을 받는 장면은 짧막한 코미디였다. 할 수 없는 것을 하라는 강의를 집어치우고 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러나 사회는 댄의 방법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 결국 댄은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거다"라는 말을 남기고 더 이상 구직신청 수당을 받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사람의 자존심 까지도 내어달라는 '가난'은 누군가에게는 질병보다 더 무서운 그 무언가의 존재일 수도 있다. 2017년 6월
빈민들이 모여사는 런던의 고층 아파트(그렌펠 타워 Grenfell Tower)에서 17명이 사망한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단열을 위해 부착한 알루미늄 합성 피복과 패널이 30분 만에 24층 까지 타올라 갔다. 주민들이 여러차례 화재 위험성을 호소했지만 끝내 무시한 관료들이 자초한 예측된 참사다.
가난은 끝까지 싸워 이겨낼 수 있는 상대도 아니며, 벗어나지 못한다 해서 비난 받아야 할 무엇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함께 잘 살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가 관료주의에 매몰되어 그 본질마저 훼손 당하지 않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