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8.
"여보, 새벽에 눈뜨면 내 얼굴을 먼저 쓰다듬어 주겠어?"
아내의 황당하고 집요한 부탁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지, 남편은 매일같이 내 얼굴을 다소 거칠게 쓰다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아침, 역시나 얼굴을 쓱쓱 문지르고 나가는 남편의 손길에 내심 흐뭇해하며 다시 잠을 이어 보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문 틈으로 계란이 보드랍게 익는 냄새가 참기름 냄새와 섞여 들어온다. 달게 자고 있는 아가를 확인하고는 문을 열고 나가보니 냄비에 다글다글 계란 북엇국이 끓고 있다. 카펜터스의 Close to you가 조용히 흐르는 토요일 아침의 거실, 커피머신에는 나의 갈색 애착 머그컵을 올려놓고 커피 내릴 준비까지 완료. 와이프가 좋아하는 음악을 아침에 틀어주고, 맛있게 먹었던 음식을 기억했다가 주말 아침 메뉴로 요리해주는 감 좋은 나의 남편. 여기까지의 장면 묘사는 전부 오늘 아침에 일어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아, 훈훈하고 아름다워라.
그러나 세 살배기 아기를 키우며 시시각각 처리해야 할 잔업이 산재해 있는 가정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만 존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침부터 쌓인 육수 냄비, 볶음 주걱, 계란 내린 체 등의 뒷설거지, 주말인데 어째서인지 내 옷자락만 쥐고 졸졸 따라다니는 우리 아가, 빨래를 개킨 후 뒷정리하다 말고 일어서는 남편의 쿨 내음, 여기에 더해 애기 손수건과 양말을 섞어 대충 넣어두는 어설픈 마무리. 빨래 갠 자리를 청소기로 밀며 육성으로 아! 소리가 터져 나온다.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는 손에 힘이 실린다. 이백 퍼센트 농담으로 던지는 말인 게 뻔한데도 나는 복어처럼 예민해진 신경을 잔뜩 부풀린다.
아이러니하게 몸이 편안해지는 주말일수록 감정에 날이 서는 일이 빈번해진다. 아마도 나에게 익숙한 집안 풍경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어설픈 결벽,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이지만 조금도 손해보고 싶지 않은 나의 옹졸함이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한 주 내내 직장에서 씨름한 남편이 이렇게 노력하는데? 그렇지만 공동생활에 있어 아들 같은 면모를 보인다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바로 잡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내면의 갈등 끝에 나는 꼭 적어도 두어 번 심술을 흘려놓고 만다.
휴직 삼 년 차, 나의 하루는 나날이 더 바빠진다. 살림이 익숙해지면서 시간 단위, 하루 단위, 계절 단위로 해야 할 일들은 한 가지가 해결되기도 전에 두세 가지가 더 추가된다. 집안 곳곳의 냄새, 먼지 상태를 봐 두었다가 쓸고 닦고 문질러야 한다. 또한 산발적으로 떨어져 주문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하는 아기용품, 아기 먹거리, 세제, 어른 먹거리, 그 외 기타 생활용품들의 재고 파악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이다. 그럭저럭 집안이 깔끔하고 당장 사야 할 것도 없다면? 이사 이후 줄곧 방치된 집안의 판도라 상자 몇 군데가 씻지 않은 몸 한구석처럼 근지럽게 머릿속을 헤집는다.
나의 주무는 아가를 돌보는 일이다. 아기 밥을 만들어 먹이고 우유에 영양제 챙겨 먹이기, 여기서 생기는 설거짓거리 해결, 머리 묶어주기, 옷 갈아입히기, 석션, 기저귀, 산책 나가기, 책 읽어주고 놀아주기, 다치지 않게 케어하는 등의 주무를 수행 하면서 위에 적힌 것들을 짬짬이 - 어떤 때는 아기를 텔레비전 앞에 방치한 채로 - 해결하는 것이다. 이 틈새에 세수하기, 한가할 때는 얼굴에 선크림과 립밤 바르기, 내 식사를 끼워 넣게 되니 바빠도 너무 바쁘다. 이렇게 내가 매일 같이 하고 있는 일들을 남편이 어쩌다 맡게 되었을 때, 나는 몸의 편안함보다도 두 번 손이 가야 하는 어설픔을 지켜보느라 한 번, 이걸 말할까 말까 고민할 때 또 한 번 쌓이는 마음의 피로가 못내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여기까지 카페에서 녹차라떼를 호록거리며 쓰다가, 또 언니에게 이 뭔지 모를 짜증의 출처가 어드메냐며 성토대회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저녁. 평소에 먹고 싶은 음식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 남편이 삼겹살을 먹고 싶어 해서 어디 한번 멋지게 구워보자며 옷을 서둘러 갈아입는데, 갑자기 현타가 온다. 그야말로 바쁘고 피곤한 애기 엄마가 책을 읽고, 카페에서 잡글이나마 끼적일 수 있는 것은 월화수목금 빡세게 일한 남편이 토요일마다 바람 쏘이고 오라며 등을 떠밀어주는 덕분이었다. 육아시간을 쓰고 일찍 퇴근해 청소와 아기 목욕을 함께 해주는 남편이 있어 플라잉 요가와 수영으로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떨궈낼 수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직장일에 관해 징징거리지도, 나의 도움을 요구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좀팽이처럼 마음을 좁게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기에 생각이 미쳤을 때, 뜨거워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고마워요. 내가 차 마시면서 기분 전환하고 오는 거, 당신이 주말인데도 따로 쉬는 시간 가지려고 하지 않고 애기 봐주는 덕분이야. 진짜 고마워."
삼겹살에 먹을 김장무를 씻어 썰고 있던 남편은 등을 돌린 채 하던 일을 계속하며 대답했다.
"고마워. 그렇게 알아주니 정말 고맙다, 여보."
딸내미는 땀냄새 폴폴 풍기며 핑크퐁 동물 체조를 따라 하고, 그 모습이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고슴도치 엄마 아빠의 저녁시간을 지나, 로봇처럼 청소하고 저녁을 먹인 후 씻겨 재우는 여느 때와 같이 지치는 밤. 아기는 보송한 머리카락에 비누냄새를 풍기며 잠이 들었고, 남편과 나는 맥주와 까까를 벗 삼아 얼마 전 보다만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를 마저 볼 참이다. 솔직한 마음을 주고받음으로써 (나 혼자) 쉽게 예민해지는 주말의 우리 집은 다시 포근하고 든든한 홈홈 스위트홈이 되었다는, 사실은 남편한테만 유독 까탈스러운 내가 문제였다는, 아니 아니 자유시간이 사람을 관대하게 만드는 데 이렇게나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 별 것 없어 잊히겠지만 어쩐지 어른스럽게 굴었던 나에게 취해 꽤나 기분 좋은 오월 어느 주말 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