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
1월 말부터 예상치 못하게 바쁜 일이 겹쳤다. 일주일에 한 편씩은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계속 늦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에 재미있게 공부하며 썼던 글이 있어 이를 조금 편집해 보았다.
사실 시사적인 이야기는 블로그로서의 캐주얼함을 해칠까 봐 조심스럽다. 또 아직 공부가 부족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도 두려운 일이다. 다만, 이런저런 주제를 다 피하기만 해서는 어떤 글도 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솔직한 생각들도 정리해 보고 싶다.
갑작스럽게 황해 또는 서해라니,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다. 이제 시간이 좀 지났지만 올해 초 조선일보 단독으로 '한국 혼란 틈타 서해 노리는 중국... 대규모 구조물 무단 설치'라는 기사가 떴다 (기사 링크). 이 기사를 독일의 도이치벨레(DW)가 받아 '중국이 한국의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고 있는가?'라는 내용이 서구 언론에도 제법 크게 보도되었다 (기사 링크).
한국과 중국 사이의 바다는 좁다. 이 분야의 국제 규범이라고 할 수 있는 'UN 해양법협약'에 따르면 바다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영해, 즉 국가가 '주권'을 행사하는 수역은 기준선에서 24해리지만, 제한적 '권한'을 행사하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은 200해리다. 다만, 서해는 폭이 비교적 넓은 곳에서도 약 700km에 불과해 두 나라가 모두 각각 200해리(=약 370km)의 EEZ를 선포할 만큼 넓지 않다.
때문에 한중 양국은 관계가 정점에 달했던 2015년 한중정상회담에서 EEZ 설정은 후속 실무 협상을 통해 계속해 나가기로 하고, 200해리씩 그었을 때 발생하는 중간 수역을 '잠정수역'으로 남겨 놓기로 하였다. 이후 사드 문제나 코로나 팬더믹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매년 개최되어 왔지만, 아직까지 결착이 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중간선 원칙, 즉 쉽게 말하자면 반반을 기준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반해 중국은 자국의 인구나 영토 크기, 그리고 서해와 맞닿은 해안선의 길이가 우리 서해안보다 길다는 점, 그리고 황해는 황하로부터 흘러온 퇴적물이 대륙붕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자국이 더 큰 EEZ를 차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2025.1월, 중국이 잠정수역에 직경 50m가 넘는 미상의 구조물을 설치했다고 우리 정보당국이 밝혔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것이었다.
중국의 구조물 설치가 처음은 아니다. 위 기사에도 나와 있지만 이미 몇 번 발생했던 일이다.
이에 대해 예전의 기사들을 찾아보면 '국제법상 경계 획정에 유효한 행위는 아니다'라는 말도 나오고,
또 가장 최근 건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대로 '국내정치 혼란을 틈타'라는 말도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두 가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법적 효력과 실제 정치적. 군사적 실력 행사는 별개의 문제로, 아무리 중간 수역이라고 하더라도 저런 구조물들이 하나둘씩 설치되면 나중에 경계 협상에서 저 물건들을 치우려는 것만으로도 협상력을 소비하게 될 수 있다. 법적으로 무효니 치워달라고 하면 아무런 대가 없이 순순히 치워주겠는가?
또 국내정치 혼란을 틈탔다는 게 설령 사실이라 가정하더라도, 일회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 사안을 당장의 정치 상황과 연계하기보다는 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황해는 미국의 지정학자 니콜라스 스파이크먼(NJ Spykman)이 유라시아와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핵심지역으로 정의한 ‘림랜드(Rimland)’의 일부다. 특히 발해만과 보다 넓게는 황해 자체가 중국의 ‘제1도련선’(First Island Chain)에 포함되며, 중국의 전략적 중심부인 발해만과 직접 연결된다. 이 지역은 중국의 지정학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동중국해 및 더 넓은 외해로 나아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
개인적으로 중국 전략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점진주의(Gradualism)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거의 한국어가 되어버린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러한 사고가 관찰된다. 근대 중국의 아버지인 쑨원도 3단계 혁명론을 주장했다. 즉, 새로운 중국은 군정(military government), 훈정(tutelage government)을 거친 후에야 헌정(constitutional government) 공화국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오늘날의 중국도 개혁개방 이후 소강사회, 대동사회 달성 등 단계적 목표를 추구해 오고 있다.
군사전략에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의 대양 해군 건설을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대양 해군이라는 말에 걸맞게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 중국의 항공모함 건조, 제1도련선 너머로의 진출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다만, 상술한 점진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대양 해군의 기반은 굳건한 연안 방어 체제 확립에 있다.
자주 간과되지만, 실제 19세기 이후 동북아에서 벌어진 주요 전쟁은 황해 인근에서 치러졌고, 이 전쟁들의 전후 처리 역시 황해의 전략적 균형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애로우호 사건(1856) 이후 제2차 아편전쟁, 청일전쟁(1894-1895), 러일전쟁(1904-1905) 등의 전개와 전후 처리가 모두 그러하다. 이러한 점에서 황해는 19세기 유럽 외교에서 전략적 균형을 결정했던 터키 해협(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해당 지점으로의 접근과 통제가 중요한 전략적 경쟁 요소로 작용하며, 이는 지역 내 힘의 균형을 크게 좌우한다.
황해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중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파트너들에게도 중요한 전략적 가치가 있다. 서울은 한강을 통해 황해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국 해군 3개 작전사령부 중 2개가 황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평택 미군 기지도 황해 해안에서 약 20km 내에 위치해 있다. 약 600km 건너편에는 중국 인민해방군(PLA) 북해 함대 사령부가 위치해 있다.
2013년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한국과의 해상 작전 경계를 동경 124도선으로 설정하려고 시도해 왔다. 한국은 이에 동의하지 않지만, 중국의 군사 활동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중국은 대함 순항미사일 배치, 구조물 및 부표 설치 등의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사건이 좋은 예인 이러한 활동들은 중국이 근해를 확보하고 경쟁 수역에서 더 큰 통제력을 발휘하려는 보다 광범위한 전략의 일부로 기능할 것이다.
최근 사건이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과 연관이 있는지, 또는 인공 구조물이 향후 한중 해상 경계 획정에 법적 영향을 미칠 것인지 여부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도가 계속되고, 또 성공을 거둔다면 먼저 서해안의 우리 주요 군사 자산에 대한 방어가 약화되고, 이는 점진적으로는 역내 전략적 균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단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실체가 비록 아직 불분명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황해의 지속적인 지정학적 중요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2025.3.18. 기록용 추가 : 유사한 사건이 발생해서 우리 해경이 출동했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