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숨은 버튼이 눌려 소리를 내

<나의 작은 시인에게>

by 이메리



전염병이 퍼진 사월의 낮은 조금 추울 때도 있지만 일 년의 어느 때보다 날씨가 좋다. 차가운 바람과 미지근한 햇빛이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삼 년 동안 방에 붙박여있으며 요즘처럼 나가고 싶던 적이 없다. 자유인데도 하지 않는 것이 비자유로 규정되는 순간부터 정말 하고 싶은 것으로 바뀌는 걸 보면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병 때문에 일상이 멈췄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지금이 제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남들이 뛰어가 버리는 동안 꿈지럭거릴 엄두도 못 내던 몸이 모두가 일상 일시 정지 디버프 아이템에 공격당한 지금에서야 움직인다.



새해 첫날부터 일주일 동안은 매일 영화 한 편을 보고 자격증 공부와 운동을 했다. 그러나 계획에는 언제나 차질이 생기고 상황에는 언제나 변수가 생기는 법이다. 게임 경기로 일정이 모두 어그러진 날부터 나는 할 일을 내일로 미루기 시작했고 그 ‘내일’은 영영 오지 않았다. 오늘은 우울해서, 어제는 피곤해서, 그저께는 아파서, 일월은 추워서, 이월은 놀고 싶어서, 삼월은 코로나 때문에, 사월도... 이렇게 내가 정한 할일조차 미루는 핑계가 갖가지다. 어제도 마찬가지로 빈둥대다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집에서 하는 사업이 위기라 했다. 위기인 적은 여태까지도 많았으나 이번에는 정말로 느낌이 안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근래의 우리 집은 온갖 악운이 씐 듯했으니까. 일그전이 상승 구간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 개개인의 인간관계나 건강이 꼭 롤러코스터의 하강 지점처럼 급속도로 나빠졌다. 게다가 나는 건강하지 못한 백수이고 동생은 자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집은 꼭 만화에 나오는 구멍 모양이 잔뜩 나 있는 치즈케이크처럼 돈 들어올 구석은 없는데 나갈 구멍이 많다. 그런 이유로 우리 집은 전에 없던 대위기를 맞은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종합한 끝에 쓸모없어 보이더라도 뭐든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고 지금 내가 가진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최적의 일이 그것이므로 어디에든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띈 플랫폼이 브런치였고, 작가 신청을 하고 합격하기까지 마음 졸이던 중 빅데이터의 추천으로 보게 된 영화가 <나의 작은 시인에게>다.



영화는 예술에 대해 못다 이룬 꿈과 열망을 가진 유치원 교사 리사와 리사가 염원하는 재능을 가진 유치원생 지미의 이야기다. 낮에는 유치원에서 알파벳을 가르치고 밤에는 글쓰기 수업에서 시 쓰는 법을 배우는 리사는 우연히 원생 중 한 명인 지미가 가끔 신들린 것처럼 멋진 자작시를 중얼거린다는 걸 알게 된다. 그 뒤로 꼭 시를 읊고 싶어질 땐 자신이 받아 적을 수 있게 연락해 달라 지미에게 부탁하고 자투리 낮잠 시간을 빌려 지미의 영감과 재능의 양분이 될 만한 얘기를 해준다. 리사는 지미에게 본인의 예술적 자아를 투영하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본인이 다니는 글쓰기 수업에서 지미의 시를 자신이 쓴 것처럼 발표한다.



그리고 그런 도둑질 발표가 여러 차례 칭찬받을 무렵, 리사는 출판 업계 사람들이 참석하는 시 낭송회에 참가해 시를 읊을 기회를 얻게 되고, 지미를 데려가 낭송시키기 위해 지미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한다. 그렇지만, 리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지미의 재능에 관심이 없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온 재능에 대해 무관심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질려, 리사는 모든 현실적인 타협을 버리고 지미를 납치해 멀리 떠나기로 한다.



리사의 이상 그 자체였던 지미는 매우 현실적이게도, 리사가 씻는 틈에 화장실 문을 잠그고 경찰에 납치 신고 전화를 한다. 리사는 화장실 문틈 너머로 지미에게 문을 열어 달라 빌다가 체념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너도 나 같은 그림자가 될 거라며 절규하듯 흐느껴 운다. 쾅쾅, 이어지는 경찰의 노크 소리. 마지막 장면에 지미는 늘 받아 적어주고 본인이 특별하다고 말해준 리사에게 길들은 듯 시가 떠올랐다고 말하지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그런 보통 아이들을 대하듯 아이스크림을 갖다 주겠다는 경찰의 발걸음, 경찰차 창문을 넘지 못하고 부서지는 지미의 목소리. 영화는 끝난다.



예술가를 꿈꿨으나 좌절하고 남의 예술과 재능을 좇고 좀먹기도 하는 대다수의 그림자와 속세에 꺾이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재능을 보존하는 극소수의 빛들, 난 빛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무엇에도 확신이 없다. 이 짓도 여태 내가 살며 태산처럼 쌓아온 헛수고 더미의 일부가 되는 것 아닐까? 이런다고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까? 올해가 가기 전에 글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애초에 나 같은 사람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까? 같은 생각이 무리 지어 뇌수를 헤엄친다. 그렇지만, 틀린 선택이었다고 배움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나는 이제까지 내가 틀린 판단을 했다고 후회한 적이 없고 이번 또한 그럴 것이다. 운명이 내가 글을 쓰고 싶어지는 쪽으로 입김을 불고 있으므로, 나는 기꺼이 그 미지근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시류와 함께 흐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