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갈색 오리 고깃집 앞, 다정히 대화를 주고받는 두 어른과 그 모습을 엿보던 주리가 휴대전화를 떨어뜨리고 도망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빠인 대원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딸 주리. 그리고 그 뒤를 대원의 불륜 상대인 미희의 딸 윤아가 쫓는다. 손에는 주리가 놀라 떨어뜨린 휴대전화를 주워 든 채. 서로의 보호자가 불륜 관계인 걸 빼고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두 쌍의 눈이 분명 마주쳤음에도 주리는 허겁지겁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초록 학교 옥상, 주리는 어떻게든 엄마인 영주가 알기 전에 불륜 관계를 수습해야 한다고 하지만 윤아는 어른들의 일이고 엄마인 미희가 이미 임신했다고 한다. 둘의 설전이 오가던 와중 주리의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 한 통. 발신인이 주리의 엄마인 영주임을 확인하자마자 홧김에 그를 뺏어 든 윤아는 주리가 영주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어 했던 불륜에 관해 말해버리고 만다.
하얀 병원, 주리와 윤아는 자신들의 엄마를 불행하게 만든 서로의 가족, 미희와 대원을 미워하고 미희 배 속의 아기는 두 가족이 불행하더라도 꿈틀꿈틀 태어난다. 영주의 초연한 한 마디, ‘너희들이 왜 싸워’와 태어나버리고 만 아기의 인큐베이터 앞을 같이 지켜본 날을 기점으로 주리와 윤아는 표면적으론 여전히 쌀쌀맞으나 속으로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진다.
밤에 물든 검정 버스정류장, 그 모든 불화 끝에 윤아는 엄마지만 나약한 미희 대신 아기를 맡아 기르기로 한다. 그러나 대원과 미희의 불륜과 그로 인한 임신, 출산, 그걸 영주가 알게 되는 일까지 모든 것이 윤아의 계획에 없었듯 계획은 또 어그러지고 만다. 아기가 죽은 것이다. 노산, 그리고 조산이라 뇌출혈까지 있던 탓에. 그럴 리가 없다고 현실을 부정하고 화를 내며 뛰어나간 윤아를 아기의 시신이 든 상자를 챙겨 든 주리가 쫓는다.
대원과 미희의 불륜 데이트 장소였던 낡은 폐 놀이공원, 아기를 잊지 않는 방법을 안다며 주리가 딸기우유와 초코우유를 꺼내 든다. 딸기 초코, 어느 쪽? 묻고는 우유갑을 뜯는다. 조그만 틈으로 화장된 아기의 뼛가루를 넣어 마시는 둘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다소 컬트적인 마지막 장면에 많은 관객이 거부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해당 장면에서 컬트보다는 오컬트를 느꼈다. 오컬트란 숨겨진 것, 비밀이라는 뜻의 라틴어 occultus에서 유래한 말로써, 초자연적인 힘이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이 힘든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을 뜻한다. 뼛가루에 관련된 오컬트적 믿음은 조선 시대 때부터 존재했다. 비위생적인 뼛가루를 땅에 묻는 매흉과 대상에게 먹이는 화흉으로 사람을 저주하는 용도였지만 말이다. 이는 시신을 어지럽히면 그 시신에 속한 악귀가 분노해서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해칠 거라는 믿음에서 기인했다. 비록 의도는 다르지만, 뼛가루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깃들어있다는 믿음과 죽은 이후에도 산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는 맥락이 같다.
명확한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비논리적이고 초자연적인 오컬트에 매력을 느끼고 빠지게 된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해결되지 않는 물음이 있고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영화 <검은 사제들>, <곡성>, 드라마 <도깨비>, <손 the guest>의 인기부터 나 홀로 숨바꼭질이나 분신사바 등의 강령술, 글자 스킬, 나폴리탄 괴담 등 오컬트를 즐기는 방법이 다양해지고 연령층도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나는 이 시류의 이유가 연령과 오컬트에 대한 거부감이 비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능한 것들을 덜 알수록 상상력의 몸집은 더 커진다. 어린아이가 조금의 자극에도 공포를 느끼고 우는 것은 그게 안전하고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란 확신은 없는 반면에, 해를 끼친다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는 것이 무한대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적에 겁이 정말 많아서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읽은 날 밤은 내내 뜬눈으로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지샜다. 문구점에서 파는 오백 원짜리 공포 모음집, 무서운 게 딱 좋아 같은 공포 만화책, 세상에 이렇게 쇼킹한 일이 책에 나온 목 잘리고 뛰어다니는 엽기 닭 그림, 큰 고양이가 과자 집에 갇힌 작은 고양이를 구하는 플래시 게임에서 잘못하면 튀어나오는 마녀 캐릭터도 무섭고 계속 생각이 났다. 화이트데이 같이 제대로 된 공포 게임은 할 엄두도 못 냈고 가끔 학교에서 공포 영화를 보여주면 궁금하긴 한데 보면 못 잘 게 뻔하기 때문에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힐끔거리다가 무서운 장면과 마주치고 놀라서 굳고, 그 모습을 웃으며 놀리는 담임 선생님이 밉다고도 생각했다. 그랬던 나도 이제는 스물한 살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공포 게임을 하면 길은 못 찾지만 무조건 앞장설 수 있고 공포 영화를 봐도 잘만 잔다. 공포에 대한 역치가 높아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환상이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게 불가능하단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정말 꼰대 같은 얘기라고 생각했지만, 그 나이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분명히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개인차가 있겠으나 인생의 한 시기를 지나면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여전히 어떤 날은 내가 평소보다 어른스럽기도, 다른 날은 철없기도, 또 다른 날은 바보 같기도 하지만, 이것들 모두가 아울러 지금이다. 하염없이 흐르는 1분 1초가 나를 지탱함을 깨달은 스물한 살 이메리의 열두 시 십분. 약하고 비겁했던 어른 둘보다 어른스럽게 인큐베이터 앞을 지켰지만 어른은 아니고, 뼛가루를 먹으면 잊지 않을 수 있다는 오컬트를 믿고 행하지만 아이가 아닌 미성년 둘을 만나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