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단 독후감 대회에 제출했던 감상문인데, 작년 4월에 쓴 거라 시간차가 좀 있다. 그 사이에 여러모로 성장한 것 같기도 하고... 인트라넷에 올렸던 거라 출력물을 가져와 일일이 베끼면서 한 번 더 읽어봤는데, 왜 이렇게밖에 못 썼는지 의문이 든다. 이걸로 어떻게 최우수를 했었는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포상휴가 이틀은 좋았다. 오늘 4차 백신 맞아서 집에서 노는 김에 브런치가 생각나서 올린다.
바야흐로 감염병의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만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바이러스와 방역을 위한 우리의 사투는 우리의 습관과 상식을 넘나들어 알게 모르게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놓았다. 4월 18일부로 ‘사회적 거리두기’, 5월 2일부로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등 방역수칙들이 해제되고 있지만, 시민들은 거리에서 마스크를 벗는 행위가 일종의 독단적인 일탈이 아닌가 의문을 갖는 듯 선뜻 벗어던지지 못한다. 왁자지껄 모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먹고 마시는 것도 아직까진 뭔가 어색하다. 지난 2년의 기간 동안 실시한 방역지침은 어느새 ‘체화’되어 몸에 밴 습관의 하나가 되었지만, 적으로서의 바이러스는 싸우던 흔적들을 곳곳에 남겨두고는 승패를 알리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나버리려 하고 있다. 방역과 대응의 정도가 적절한 것이었는가 아닌가에 대한 정치적 논의는 뒤로하고, 우리는 여전히 버려진 마스크, 기침 소리와 남겨진 삶을 돌봐야 한다. 혹은 돌아봐야 한다.
여기 감염병 시대에 읽기 좋은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이다. 『페스트』는 1940년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중소도시 ‘오랑’에서 페스트(흑사병)가 발병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장편소설이다. 책의 도입부는 다음과 유사하다. ‘어느 날, 평범하고 지루한 도시 오랑에서 쥐들이 피를 토하며 떼를 지어 죽어 나가는데….’ 흡사 좀비 스릴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 속에서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다. 한두 마리로 시작한 쥐의 죽음은 점점 불어나 며칠 내 시내 전체에서 8천 건에 이른다. 리유가 근무하는 병원의 수위가 앓기 시작한 지 이삼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사태의 심각성이 커지자 리유는 동료 의사들과 협력해 도청에 협조한다. 도 당국은 의사들의 진단대로 페스트 사태임을 부정하진 않지만, 사태의 안정을 우선한다. 페스트라는 용어 사용을 자제하고 신고의무와 특별격리의 조치를 한다. 자진 신고자와 사망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소극적인 조치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임계점이 다다른다. 비행기로 공수해 온 혈청을 통해 사태를 진정해보려 한다. 며칠 감소한 사망자 수가 다시 급상승한 날, 리유는 도지사로부터 ‘페스트 사태를 공표하라. 도시를 봉쇄하라.’라는 전보를 받는다.
여기까지가 1부의 주된 내용이다. 의사 리유를 중심으로 서술되지만, 이외에도 랑베르, 그랑, 코타르, 타루, 파눌루 신부 등의 중심인물이 등장한다. 외지 출신 기자 랑베르는 리유의 조언으로 ‘쥐의 떼죽음’에 관심을 두게 된다. 페스트가 퍼진 첫날 코타르는 자살 소동을 일으켜 리유가 현장에 가본다. 의사의 처방은 원하지만, 경찰의 신고는 원하지 않는 경우였다. 그의 요청대로 신고하지 않고 리유는 자리를 뜬다. 장 타루는 일어나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쓰려고 노력하는 기록자이다. 사건들의 중요성에 차등을 부여함으로써 특정 정보가 차후에 가전 수도 있을 잠재력을 없애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간간이 그의 메모 수첩이 언급되며 상황을 조망하는 제삼자의 시선을 더한다.
2부의 시작은 도시봉쇄로 인한 생이별이다. 파리에 아내를 두고 온 랑베르로 대표할 수 있다. 그는 리유에게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부탁하지만 거절당한다. 랑베르는 코타르에게 부탁하여 비합법적으로라도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만 실패한다. 파눌루 신부는 감염병 사태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 알기 어렵지만 종교적 믿음을 통한 속죄와 구원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성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상황을 지켜보던 타루는 리유에게 보건위생대를 조직할 것을 요청한다. 3부와 4부에서 감염병은 절정을 이룬다. 온 도시는 페스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시민들은 폐쇄된 도시와 빼앗긴 자유에 불안과 불만을 키워간다. 시청 서기로 일하는 그랑은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고, 랑베르는 안절부절못하며, 리유는 페스트 발병 직전 도시 바깥으로 요양 보낸 아내를 걱정한다. 파눌루 신부는 병원에 오래 머물며 방역 전선을 지켰으나 원인 미상의 병에 걸리고 치료를 거부하다 세상을 떠난다. 이윽고 겨울이 온다. 페스트는 끈질기지만, 새해를 넘기자 자취를 감쳤던 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병세가 약화되었다.
5부에 이르러, 감염병 유행의 말기가 되었다. 그러나 페스트는 그 끝자락에서도 불행의 가능성을 낮추지는 않았다. 리유는 밤새 곁을 지키며 타루의 투병을 함께한다. 아침햇살을 보며 타루는 숨을 거둔다. 이내 리유는 아내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아 든다. 밤새 죽음의 경계에 머물던 리유는 아내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이윽고 마침내 페스트 유행이 끝나고, 폐쇄된 관문들이 열린다. 코타르는 봉쇄의 막이 내리자 극심한 불안을 느끼며 주변인과 불화를 겪더니, 자기네 집 창문에서 거리로 총을 난사하다 경찰과 총격전이 붙어, 저지당한다. 랑베르는 고대하던 아내를 만나는 극적 순간을 얻는다.
카뮈는 5부에 달하는 장편 내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취하며 시간순으로 연대기를 서술해 간다. 마치 현장에 있던 모든 일을 겪은 사람이 쓴 회고록과 같은 방식이다. 덕분에 사태의 객관성이 담보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인물에 있어서는 그러하지 아니한데, 카뮈가 제시하는 각 중심인물은 감염병 사태 속에서 취할 수 있는 각색의 태도를 대표하며, 여러 부사, 형용사, 흑은 서술상의 주목을 통해 담담하게도 은근한 태도의 위계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카뮈는 전염병 앞의 인간을 완전히 평등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렇다면 카뮈가 제시하기에 봉쇄, 격리, 수용(收容), 이별, 철망의 반복을 마주할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는 무엇일까?
카뮈는 리유의 태도를 높게 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관료사회의 형식적 절차와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한 좌절 속에서도 꿋꿋이 자기 한 일을 한다. 그는 정말로 ‘의사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특별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그는 투병 중이던 아내의 부고를 접하고도 슬픈 내색 한 번 하지 않는다. 이는 중반부까지 아내를 만나기 위해 도시를 벗어나려 애쓰던 랑베르의 태도와 단적으로 대비된다. 그 역시 후반부에서 “자신만 행복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말하며 혼자서의 도시 탈출을 단념하고 리유와 유사한 태도로 돌아서지만, 리유만큼의 소명의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페스트와의 사투에 의구심, 혹은 희망을 품고 있다. 그에겐 여전히 사태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다른 인물과의 대비되는 리유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서술자(흑은 작가)’ 자신이 결국 리유의 시선과 다름 아니었음을 밟히는 것으로 정리된다.
매사 의미심장하고 미스터리하기까지 한 타루의 태도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작품 중에 비록 범죄자이나 타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검사 출신 아버지에 대한 충격으로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을 전개했었던 이력이 소개되는 등 그는 거대 담론과 대의를 향한 열망을 지녔음을 꾸준히 암시한다. 설사 상대가 죄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무엇이든 반대하고 맞서겠다는 그의 반폭력주의적 철학은 페스트 사태에서 객관적 기록을 위한 노력과 죽음의 감염병과의 사투의 계기가 된다.
페스트 사태에서 은근히 안심하고 여러 탈법적인 행위로 이익을 추구하기도 하는 코타르의 태도를 미루어보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코타르는 “혼자서 죄수가 되느니보다는 모든 사람과 함께 포위당해 있는 편을 더 좋아한다.” 감염병 사태로 인해 정상성을 잃어버린 사태 속에서, 혹은 매우 정상적인 상황에서조차, 사람은 자신의 소외감을 타인의 불행으로 해소해 보려 은근히 상황의 악화를 기대할 수도 있다. 이는 비단 코타르만의 자기애적인 태도가 아니었음을 배경설명들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방역 조치의 수위가 낮은 지역 사람들이 더 높은 지역을 자기들보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상상하면서 위안으로 삼는 모습이나, 자원이 제한된 환경에서 외려 심한 사치를 부리는 젊은이들의 아집 어린 낙관에 대한 묘사 등이 있다.
재난 앞에서의 인간군상은 하나의 '전형'을 가질 만큼 일견 단순한 반복 같은 것이지만, 대상의 반복 가능함이야말로 카뮈의 의도대로 특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통해 긍정되는 인물상과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는 카뮈의 다른 작품들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는 부조리의 고발을 다룬 소설 『이방인』, 부조리의 극복을 위한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 그리고 부조리에 대항하는 인간을 정식화한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등이 있다. 민음사 출판의 역자인 김화영 교수에 따르면, 카뮈의 일련의 저작들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 부정과 긍정의 대비를 통한 부조리와 반항의 철학이 끝내 자동차 사고로 급사한 터에 '합(合)'으로서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카뮈의 ‘긍정’의 테마로서의 『시지프 신화』와 『페스트』가 같은 계열에 속한 작품임은 알 수 있다. 여기서 카뮈가 왜 리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는 추론할 수 있다. 올려놓으면 떨어지길 반복하는 돌을 끝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프는 불행할까?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던지는 주된 화두 중 하나이다. 이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리유는 불행할까? 카뮈가 주목하는 시지프의 모습은 힘겹게 올린 돌이 다시 굴러 떨어졌을 때, 산 아래로 내려가는 가벼운 발걸음이다. 이어 리유에게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사투와 사투, 죽음과 죽음 사이의 침착한 시선이다.
카뮈는 사태의 ‘까닭 없음’의 부조리함을 『이방인』에서부터 일관되게 폭로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인간의 일을 ‘인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함을 강조한다. 종교적 숙명론이나 기회주의, 영웅주의, 역사적 사명 등은 여러 장치를 통해 자제되는 태도이다. 얼핏 중심인물들이 페스트라는 절대악과 싸우는 듯하지만, 카뮈는 랑베르를 통해 “영웅주의에는 부차적이라는 본래의 지위, 즉 행복에 대한 강한 욕구 바로 다음에 놓이되 결코 앞에 놓일 수 없는 그의 지위”가 있다고 전하며 영웅주의적 서사로 읽히는 것을 지양한다. 리유는 역사적 영웅도, 종교적 성자도 아니지만, 바로 그렇기에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지 인간의 행복을 위해 성실하게 저항한 것이다.
오랑 시에서의 페스트 확산 과정은 여느 사회의 감염병 사태와 겹쳐볼 수 있다. 한편으로 ‘페스트’를 2차 세계대전이나 나치즘 등에 빗대며 '정신의 질병'을 묘사한 것이라 평하기도 하지만, 도시 단위의 봉쇄와 종교 차원의 구원론 등장, 혈청(백신) 개발에 노력하는 과학계와 현장에서 사투하는 보건의료계, 일상의 제약을 두고 씨름하는 방역 전선… 의 이야기에서 소설의 외연이 실제가 되어버린 현실을 엿볼 수 있다. 페스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코로나바이러스와 마주해 본 이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불행했는가? 많은 사람이 바이러스로 소중한 것을 잃었을 것이다. 그 대상이 특정 시공간일 수도, 각종 재물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수 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고 이겨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설사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시련에 맞서는 여정을 마무리할 수 있는 건 ‘우리’ 말곤 없다는 실존적 사실에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감염병의 시대의 끝자락에서, 행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사회연대의 의의와 인간다움의 성찰을 역설한 카뮈의 『페스트』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