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학부생 저널에 기고했던 글이다. 내가 쓴 거니까 몰래 브런치에 올려야지. 이 글을 작성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넘었다. 학부생 저널인 만큼 글을 애써 써서 기고한다고 별로 인생에 득될 것은 없다. 부끄러운 주장을 학교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있다는 것? 장점인 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교수님들이 몇 분 읽어봐주시는 것 같기는 한데, 한국에서 인류학과 철학이 받아들여지는 방식과는 조금 결이 다른 글이라 크게 호응 받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국내 사회과학은 '사회자유주의'를 '보수적으로' 추구하는 경향에 머물러 있는 듯하여, 자유주의자가 어디까지 내달을 수 있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실상은 자유주의적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면서, 체면을 생각하는 것인지, 전통을 생각하는 것인지. 유행을 좇는 것은 아닐까.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경향성에 대한 비판을 차후에 좀 더 다루어보겠다.
(각주를 첨부할 수 없어서 원래 위치시키고 싶었던 부분에 괄호로 집어넣었다.)
1.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
세기의 철학자이자 인류학에서 유독 많이 인용되는 미셸 푸코(1926~1984)는 기념비적인 전기(前期) 저작 『말과 사물』의 마지막 문장에서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라고 예견했다(미셸 푸코, 이규현 역,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p. 526.). 대뜸 인간의 멸망을 예고한 것이 아니라 물론 조건이 붙어 있긴 했다. 길고 긴 책 내내 구체적이면서도 분절적으로 언급되는 것처럼 근대 이래 가능하게 된 ‘인간의 형상에의 발견’이 비록 그 정밀한 가능조건과 논리를 명시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바로 그것들이 무너진다면 인간의 형상이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라는 말이다. 맥락과 함께 보면 예언이라기보단 경고에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관점을 일관하면 어느 시대에 살건 간에 그 자신의 ‘에피스테메(episteme)’를 명료히 파악하려는 노력은 인간 조건의 존속 여부를 파악할지 모를 중대한 것이 된다. 심지어 그 중요성은 인간 조건의 와해와 파괴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중대한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분명 인간 조건의 파괴는 어떤 면에서 과장된 면이 있다. 인간조차 ‘발명’된 것이라는 사회구성주의자에게도 어떤 구성의 가역적인 변화는 탐탁지 않은 것이다. 설사 어떤 조건이 사상누각처럼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그 형태가 결코 그 이전과 같은 것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모든 조건은 끈끈이처럼 붙어서 인간의 형태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이다(혹자는 돌이킬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문화와 자연의 경계로 이해하곤 한다. 그러나 자연은 정의상 ‘원래 그런 것’이다. ‘원래 그럴 수 없는 것’은 애초 자연이 아니다.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어떤 것이라도 일단 벌어진 이상, 자연을 벗어나지는 않은 것이다. 이런 이해에서 문명이나 문화는 자연보다 좁은 개념이다.).
본 글은 인간에 대한 푸코와 마르크스, 라투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의 새로운 조건을 이해하는 시도에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조건의 바탕을 인간의 몸에서 찾는다. 그곳에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몸의 육체화는 한 시대를 호령한 에피스테메였고, 그것을 불가역적인 밑바탕에 두고 우리 시대는 ‘탈육체화’로 전향되고 있음을 보이려 한다. 우선은 사소한 것이라도 탈육체화된 인간의 가능성을 탐색해보자.
2. 몸은 왜 중요해졌는가?
인간이 그 자신의 육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인간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보다 시간적으로 뒤쳐질 것이다. 만성적인 생산 부족으로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길고 긴 시절에, 인간의 몸은 그야말로 ‘몸뚱아리’였다. 일종의 짐덩어리처럼 여겨진 몸은 단지 사소한 불평불만이 아니라 체계적인 철학 속에서 인간의 정신까지 지배하였다. 몸의 가능성에 대한 절약 정신은 물질의 부족에서 꽃폈다. 몸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삶에 긍정성을 가져다준 경험은 간헐적으로, 인간 중에서도 물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지하게 믿은 비현실적 존재자나 미치광이에게서나 이루어졌다. 그러나 ‘혁명’이라고 불리는 근대 이후 생산성의 향상과 물질 조건의 발달은 몸을 가졌다는 사실의 초월을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오게 했다.
몸에 대한 초월적인 인식은 물질에서 시작하여 그것들의 경계를 허무는 것과 함께 이루어진 듯하다. 인문사회계열에서 종종 정확한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주의력 없이 사용하는 기계론과 ‘사이보그’ 등의 용어는 육체가 물질의 발달의 흐름에 맡겨 혼합되어 버리는 사태를 뭉뚱그리곤 했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가 피부 바깥의 물건과 문자 그대로 ‘결합’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기껏해야 ‘장착’이 흔하다. 피부 안팎이냐는 결코 사소한 사실이 아니며, 물질을 장착한 인간 존재는 기타 동물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 물질을 ‘도구’의 지위로 승격시켜 이해할 것인지 여부 역시 사소한 사실은 아니지만, 몸의 경계로 그것이 침투한다는 사실에 비할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인간이 인간 바깥 사물을 동원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냉엄한 분석대로 ‘생산수단의 생산’과 동반되며 전통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고, 자신의 몸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일이었다. 생산성의 향상으로 몸은 절대적인 제약에서 잘만 활용하면 피안(彼岸)으로 데려다줄지도 모를 관리 대상이 되었다. 21세기에서도 노동의 윤리는 몸을 잘 부리는 것으로 시작하며, 도구의 신속·적절한 활용을 기반으로 한다. 생산수단의 생산을 몸소 실행하는 자와 생산수단의 단순한 활용을 반복하는 자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지만 말이다.
한켠에서는 몸을 통해 물질 조건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벌써 ‘초월’로 성급하게 이해했다. 노동윤리의 신성화는 일종의 종교가 되어버리고, 생산수단을 넘어 몸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믿는 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관념론에 대한 식상한 비판과 다른 점은 이들은 몸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지만, 조금의 제약 조건으로라도 남아 있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진지한 관념론자는 몸의 존재를 간단히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몸의 중요성’은 그것이 정신의 반대급부이기 때문이거나 우리 삶에 있어 만성적인 제약조건이기 때문, 혹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연적 생산수단이기 때문에 있지 않다. 앞서 언급한 것들 모두 사소한 것은 아니기에 함께 중요시될 수 있으나,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우리 몸과 닮은 어떤 것을 우리 몸보다 더 소중히 하고 있는 레플리카의 미메시스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상’의 시대는 ‘현실’에 경종을 울린다.
3. 우리의 몸은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
우리의 몸은 영문도 모른 채, 각종 물질과 체화, 탈-체화를 반복하고 있다.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광활한 자연과 협소한 문화를 가진 비인간 동물마저 신체 바깥 물질과의 교합, 그것도 종이 다르고 생물 여부가 다른 것들을 이룬다. 그러나 인간의 문화는 더 넓은 가능성을 가졌다. 기술과 도구와 과학이 인간에게 탈착한다. 그것들이 항상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인식은 극단적인 물질론자 역시 동의하는 듯하다(신유물론 등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물질론자들 중 다수는 ‘주-객’의 이분법을 부정하고 과학 역시 인간과 사물의 협동 내지 협력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렇다고 인간의 범주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다.).
이제는 신발만큼이나 생활 도구가 되어버린 스마트폰 등의 기기(devices)는 이른바 Extended Mind라 칭해지며, 본래 인간 신체에 귀속되어 있는 마음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이해된다고 주장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에서조차 ‘보다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는 허물어지지 않았으며, 육체는 여전히 단단하다. 물질의 체화는 실제로 인간 몸에 투여되거나 내부에 장착되는 것으로써 ‘체화’의 물리화학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다소 은유적으로 인간과 더불어 존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신체의 심리적 의존 현상을 칭하는 것 같다. 필자는 일관되게 전자의 경우가 더 심각한 사태라고 생각하나, 아직 인간학적 분석의 대상이 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고, 후자의 경우를 전자의 경우와 혼동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경우는 결코 물질이 인간 내부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신체적 기능이 외부 물질로 투영되는 것이다. 이는 ‘체화’라기보다는 ‘탈-체화’이며, ‘탈-육화’라고도 부를 수 있다. 우리 몸 바깥에 몸과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이 현상은, 가상성(virtuality)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는 이해되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가장 현실성 있는 몸의 변형이라고 생각한다.
4. ‘가상’의 현실과 전망
기술의 발전은 탈육화된 현실에 대한 필요조건이다. 신체 바깥의 존재에 대해 인간의 신체를 은유하는 것은 상징의 영역에서 충실히 이루어진 역사가 있으나(가령, 기독교의 성체와 성혈), 단지 은유적 상징이 아니라 실제에 비견되는 구체적 현실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21세기는 가상을 현실로 만들 기술을 이모저모 가지고 있는 시대이며, 증강현실(AR)과 가상현실(VR) 등 특정 기술의 장르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초기 목소리 샘플을 제외하고는 실제 인간의 신체의 어떤 부분도 가지지 않은 디지털 미디어 그 자체인 하츠네 미쿠(Lam, 2016)의 사례를 살펴보라. 이보다 더 ‘인간다운’ 것을 원한다면, 실시간으로 인간의 신체와 연동시켜 구현하는 모션캡처 영화의 현장이나, 이른바 ‘얼굴 없는 방송인’으로 유명세를 타는 ‘V-tuber’들의 세계를 탐색해보라. 이들이 형성하는 담론의 장은 인간을 닮았으나 바로 그 인간은 아닌 듯한 가상에 대하여 ‘불쾌한 골짜기’와 ‘대유쾌 마운틴(‘불쾌한 골짜기’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인터넷 신조어로, 인간을 닮은 무엇들이 결국 인간에게 쾌감을 주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쓰는 것 같다. 당연히 학술적인 용어는 아니다.)’의 사이를 오가고 있다. 자연스레 그것들에 대한 윤리를 고민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직 기성 공동체에는 ‘가상 인간’을 위한 자리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의 문제를 공동체의 문제로 끌어오는 것은 아무리 탐탁지 않더라도 필연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이 사회적 중요성을 가지는 만큼 그것을 사물에 비교하는 것은 조심스러워져야 할 것이다. ‘가상현실’이라는 말이 엄밀히 말해 형용모순인 것처럼(현실이면 가상이 아니다. 눈앞에 펼쳐진 가상은 엄밀히 말해 ‘가상성을 가진 현실’, 즉 ‘가상 같은 현실’이지, 가상은 아닌 것이다. 실제로 그것이 가상이라면, 오류 내지 착각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가상성을 가진 존재자가 인간의 신체와 완전히 무관한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그것을 사물로 이해하는 것은 사물을 몸으로 이해하는 페티시즘만큼이나 곤란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를 사물과 대등하게 이해하는 이론은 실재한다.
5. 인간과 사물의 불온한 관계
브뤼노 라투르의 핵심적인 이론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는 인간과 사물의 동맹을 개념틀로 한다. 이는 내적으로 안타까운 한계를 가지는데, 그것은 사물이 잘 쳐줘야 인간과 동등한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물을 인간에 비해 어떠한 주체성도 가지지 않았다는 전통적인 이해에 비하면 어떤 혁신적인 인식론일 수는 있으나, 사물의 주체성은 확인 불가능한 것이라는 난점을 가진다(인간들 사이에서마저 타인의 주체성이 당연하거나 분명한 것은 아니라는 주의 깊은 철학들(가령, 현상학과 ‘철학적 좀비’ 논쟁)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주체성과 어떤 식으로든 깊은 차이를 가진다는 한계는 이 거대한 혁신을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영역으로 한정시킨다. 추정적이고 이론적인 구성물로써의 사물의 주체성, 그리고 그에 기댄 비인간중심주의는 인간중심주의보다도 이론적 선명도가 낮다. 그래서 인간과 사물의 대등한 정치적 지위는 이내 실용적 활용에서도 한계를 맞는 것이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을 탈인간중심주의의 선구자 격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나, 이는 인간중심주의와 ANT 모두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그 활용에 있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탈인간중심주의가 타당하더라도, 어떠한 존재자에 대한 ‘중심주의’가 공평하게 매겨져야 한다면, 비인간중심주의는 인간중심주의와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에도 굳이 인간중심주의를 ‘탈(脫)’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무엇보다 사물에 대하여 노동함으로써 인간(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을 위해 노동한다는 전통적인 이해가 라투르적 사물 이해에서 극복되기 어렵다. 사물의 수동성은 단지 추상적 철학의 지위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에서 경험된다. 이는 적어도 일상적인 실천·수행의 장에서는 타당한 일이며, 이는 일상성이 뉴턴적인 유클리드 공간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인터넷 등 사이버스페이스를 매개로 벌어지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미디어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때에도 매체는 여전히 사물이며, 협력은 인간의 조작으로 발생한다. 사물의 물성이 전면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른바 ‘오류’가 발생한 경우로 예측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당혹감을 수반할 뿐, 그것에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이다. 신체의 파생적 존재자를 사물로 받아들이는 것, 그 파생된 사물을 인간과 대등하게 이해하는 것에 있어 행위자성에 대한 진지한 분석은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물까지 포함하여 갱신하려 한 사회계약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갑(甲)’임을 드러낸다.
6. 나가며: 탈육체화된 세계로의 초대
인간이 가상의 신체에 푹 빠져 인간의 범주를 흩으러 버리고 인간성마저 잃어버린다는 것은 기우일 수 있다. 인간들은 여전히 가상 아래 숨겨진 인간의 살결을 그리워한다. 그런 만큼이나 탈육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일대일 대응되는 인간의 형상에조차도 관대하지 못하거나 그것을 ‘비인간’으로 착각하는 사물화의 징조는 탈육화 기조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이해에서 비롯한다. 분명 사물을 장착 내지 결합하는 것으로부터 구현되고 있는 것일지라도, 그것의 본바탕에는 인간이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인간 자체인 경우 역시 있다.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가려진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 괄시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 인간이 아니라는’ 이해에 맞물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굴을 볼 수 없어도 인간으로 이해하는 경험을 흔히 겪으며, 심지어는 실존 여부가 불분명한 것에 과한 인간성을 부여하는 역사적 사례 역시 넘쳐난다. 필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의 인간에 하나의 인간만큼의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그로부터 파생된 것들에 대해서도 꼭 그에 어울리는 인간성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몸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그에 연동되는 것들은 몸 바깥에서도 인간성을 창출해내고 있다. 이는 사물이 스스로 인간성을 갖추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현상이며, 인간의 사물화가 아니라 사물의 인간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화된 사물은 인간을 위하여 육체의 피로를 덜어주고 있다.
《참고문헌》
미셸 푸코, 이규현 역,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브뤼노 라투르, 황희숙 역, 『젊은 과학의 전선』, 아카넷, 2016.
김환석 외 21인,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이성과감성, 2020.
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휴머니스트, 2011.
박선희, “탈육화 담론의 비판으로서 육화 이론”, 언론정보연구 47(1), 2010, pp. 204-234.
Lam, Ka Yan, “The Hatsune Miku Phenomenon: More Than a Virtual J-Pop Diva”, The Journal of Popular Culture, Vol. 49, No. 5, 2016, pp. 1107-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