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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와 존재감

솥밥집의 기억

by 구문도

오늘 친한 친구와 함께 솥밥 전문점을 갔다. 이 곳은 내 기준에 특별하다. 첫 방문시에는 크게 인상에 남지 않았다. 그냥 밥에 반찬 아냐. 이게 특별한가? 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이 곳이 좋아서 사족을 못 쓴다. 여기선 작은 돌솥 아래에 참기름을 깔고 위에 쌀을 얹어 밥을 짓는다. 그리고 그 위에 각종 생선이나 고기, 야채를 얹고 쪄낸다. 쪄낸 돌솥은 다른 나물, 젓갈 반찬, 국물과 함께 상에 놓인다. 손님은 돌솥의 뚜껑을 여는 순간 빛깔과 향기가 고운 하나의 작품을 맞이하게 된다. 살구 빛 연어나 갈색으로 고르게 익은 소고기, 얇게 저민 전복 등이 예쁜 당근채와 해초, 잘 볶은 버섯 등과 함께 조리되어 있다. 내용물을 그릇에 옮겨 담으며 쌀알이 얼마나 윤기가 자르르 한지 느낄 수 있다. 맛도 조화롭고 삼삼하다. 나는 이 곳이 좋다.


나와 친구는 가게의 중간 즈음에 앉아있었는데, 손님 일곱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직장 동료 관계인 것으로 보였는데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소소하게 그날의 이슈를 이야기하며 자리를 잡고 메뉴를 주문했다. 이야기는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요즘 큰 이슈가 된 통신사 보안 문제, 점심시간엔 이 식당 예약 잡는 게 어렵다는 이야기, 그 외의 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들을 조금 관찰하다가 나는 내 식판을 받았고 즐겁게 밥에 집중했다. 그 때였다. 식당에 나이가 있는 여성이 들어왔다. 그 여성은 기존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일행들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위계’가 무엇인지 관찰이 가능했다. 그것은 사람을 멈추게 만드는 힘이다. 여성이 앉아서 입을 여는 순간 모두가 자신의 말을 멈추고 그녀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한 남성은 말린 어깨를 가지고 있었는데, 시종일관 ‘하하하’를 형상화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 표정 외에는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음식이 나왔을 때, 나는 특이한 광경을 보았다. 그들이 식판을 들고 여성이 유도하는 대로 자리를 다시 잡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내 과거를 보았다. 나는 과거에 내가 입을 엶으로써 다른 이의 말이 잠기었던 경험이 많다. 차이가 있다면, 아마 저 여성은 나이와 직위가 있었을 것이고, 나는 그런 것 하나 없었던 것이다. 내 위계는 ‘위계’가 본질적으로 갖는 기이함 외에 흉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는 내 위계는 존재감이 되지 못한 것의 반작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타인들보다 열등함을 알았다. 적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잘 알았다. 때문에 나는 ‘더 잘 말해서 사람들이 내 말을 듣게 끔’ 하려고 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진실로 말할 수 있음을 몰랐다. 내 존재감에는 축이 하나 빠져 있어서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이 흔들림은 내가 말하는 것을 과장되게 부풀리거나 혹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빈약해 보이게 했다. 나는 여기서 발생하는 오차를 ‘경직’으로 채워 위계를 만들었다. 이렇게 흉내 낸 위계는 위계도 존재감도 되지 못했다.


친구와 담소를 나누며 밥을 먹었고, 그 동안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저랬다. 나는 뭐 하나 가지지도 못하고 그랬다. 그래서 그들은 내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비로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응에서 자비로움이 빠졌다면 조롱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게서 위계가 빠졌는지 의심이 든다. 나는 이제 ‘들을’ 준비가 되었을까? 들음으로써 위계가 아닌 존재감을 피력할 준비가 되었을까? 이제 그들에 섞여 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과도기에 있다. 위계를 버리는 법을 아직 모른다. 다만, 말을 멈춤으로써 적어도 존재감의 흉내는 낼 수 있다. 내가 말을 멈추었을 때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조용한 내가 섞여 들어갔다. 이제 나는 존재감의 흉내는 낼 줄 안다. 대신 사교 시간에 너무 과묵한 사람으로 비치게 되었긴 하지만 흉한 반쪽짜리 위계를 내뿜고 다니는 것 보다는 낫다. 나는 하늘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하며 시간을 흘려 보낸다. 내가 존재감을 간직하고자 하는 시간이 누적되면 언젠가는 내 위계가 완전히 존재감으로 대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말을 멈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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