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un Nov 11. 2024

그렇지만 어쩔 수 있나요. 우리는 어른이잖아요.

이상한 남자의 요상한 취향이 담긴 공간, 슬로보트 아뜰리에

©슬로보트 아뜰리에

서울에서 20년 가까운 시간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상업 광고 전문 사진가로 치열하게 활동한 김한준 사진가. 타인을 위해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온 그는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공간과 시간을 찾아 떠나 제주 애월읍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작업실을 만든다. 제주를 닮은, 그리고 사진가 자신을 닮은 돌담 위에 얹힌 먹색 건물에 그는 슬로보트 아뜰리에(이하 슬로보트)라고 이름 붙인다. 사진가의 취향과 삶을 대하는 철학이 온전히 느껴지는 이곳에서 방문객들은 그가 기록한 사진과 창문에 맺힌 풍경을 즐기며 커피를 음미하고 영감을 마주한다. 유난히 거친 제주의 북쪽 바다가 낭만적인 순간으로 다가오는 슬로보트에서 김한준 사진가는 공간에 담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Interview with 김한준

사진가, 슬로보트 운영


지난 2018년 슬로보트가 완공되었어요. 사진가님의 개인 작업실로 사용되던 이곳이 지난 2020년에는 퍼블릭 오픈을 하며 갤러리, 도서관, 그리고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고요.

슬로보트는 제주 애월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자리 잡은 고요한 공간입니다. 관광객들이 흔치 않은 하귀리라는 동네에요. 전깃줄이 걸리지 않는, 온전한 바다를 액자처럼 담을 수 있는 땅을 삼사 년에 걸쳐 찾았었고 마침 사랑처럼 우연히 만난 곳이 지금 슬로보트가 얹힌 그 땅이죠. 원래 제 개인 작업실 용도로 기획, 설계, 건축됐고 실제 3년간 작업실의 용도로 사용을 했어요. 그러던 와중에 제가 이 공간에서 얻은 위로와 영감을 타인에게 경험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퍼블릭 오픈을 하게 됐죠. 슬로보트는 흔히 카페라고 불리지만, 사실 저는 음료나 디저트를 즐기는 것보다 사진 전시와 서적 그리고 무엇보다 ‘온전한 바다’를 담은 액자를, 그것도 쉬지 않고 변화하는 액자를 감상하는 공간이 되길 원해요.

good morning, 8시 32분 am ©슬로보트 아뜰리에
예민한 고양이도 마음을 놓는 곳 ©슬로보트 아뜰리에

1층의 돌담 위에 먹색 건물이 얹혀 있는 듯한 외관이 인상 깊어요. 슬로보트는 동네의 풍경, 하귀리 바다의 검은 현무암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데요.

건축을 한번 하면 십 년은 늙는다고 말하곤 해요. 사실 토지 구매부터 건축가, 시공사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생각을 맞추는 게 마음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모퉁이를 돌자 쿵 하고 부딪혀 사랑처럼 만난 못난 땅, 그리고 웹툰 속 억지 시나리오처럼 극적으로 만난 에이루트 건축사무소의 품성 좋고 솜씨 좋은 건축가 부부 덕분에 십 년은 늙지 않았네요. 건축가분들께 요청한 사안은 세 가지였어요.


첫째는 ‘제주다울 것’, ‘헤이리나 판교의 근사한 단독주택과 다른 제주의 기운을 품을 것’이었어요. 다행히 건축사무소의 이창규 소장은 제주 토박이 출신이어서 제 말뜻을 잘 이해해 주셨죠. 슬로보트의 외관이 검은 이유는 제주도 현무암의 검정을 모티프로 삼았기 때문이고요.


둘째는 ‘폐쇄적일 것’을 요청했어요. 사람들을 의식하며 평생을 살아온,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는 치열한 서울에서 평생을 살아온 서울 남자에게, 그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소심한 고양이라도 큰 대자로 낮잠을 잘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원했어요. 일단 정문의 철문을 닫으면 아무도 저를 볼 수 없어요. 잠수함의 해치를 내리고 꽁꽁 닫는 식이죠.

사진집을 본다는 것은 한 작가의 머리와 마음속을 관통하는 여행 같은 일 ©슬로보트 아뜰리에

마지막 세 번째는 ‘사진기를 모티프로 삼을 것’을 제안했어요. 건축가 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있네요.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라고 아세요 소장님? 어두운 방이라는 뜻인데 카메라가 발명된 초기에는 들고 다니는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어두운 방에 작은 구멍이 뚫린 형태의 공간을 만들고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 ‘상’을 방에 비춰 보는 형태의 장치, 그게 바로 카메라였죠. 바다를 향한 건물의 메인 창은 렌즈이고 반대편에 앉은 제 망막이 필름이 되도록... 그렇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좁고 긴 형태의 공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카메라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된 슬로보트의 모든 창문은 카메라 필름의 비율을 하고 있어요. 제가 애정하는 카메라 포맷인 35mm, 6X6, 핫셀블라드hasselblad X-pan의 필름 사이즈를 건축가에게 일러줘 그 비율로 창호를 설계했죠.

엄마의 바다, 3층 침실 ©슬로보트 아뜰리에

내부 구조도 참 독특해요. 바깥에서는 돌담 위에 전혀 다른 질감의 건물이 얹혀 있어 각층이 서로 구분되어 보이지만 실제 내부는 1층부터 3층까지 물리적인 분리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더라고요.

슬로보트는 제가 지은 두 번째 건물인데요. 저는 층고에 집착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겠으나 저는 공간에 지배되는 기질을 타고난 것 같아요. ‘사람은 물이고 공간은 물주머니다’라고 생각하죠. 고로 내가 추구하는 삶, 작업 등을 위해 맞춤복 같은 공간이 있어야 하는 가성비 낮은 사람이에요. (웃음) 1층은 낮은 층고, 2층은 높은 층고, 그리고 3층은 좁은 침실 구조입니다. 높은 층고는 창의력을, 낮은 층고는 집중력을 극대화한다고 하죠. 그리고 좁은 침실은 어머니의 자궁 같은 안온함을 느끼게 한다는 말을 믿어요.


저만의 슬로보트 사용법을 소개할게요. 우선, 2층에서 상상과 공상 그리고 감상을 합니다. 파도를 보며 빌 에반스Bill Evans나 최백호의 음악을 듣곤 하죠. 그리곤 1층으로 내려와 2층에서 영감받은 것들을 사진으로 표현하거나 글로 적어요. 별로 표현할 것이 없다면 무료한 고양이와 놀아 주고요. 마지막엔 3층에 올라 안전하고 포근한 잠을 잡니다.

한치배가 뜨는 초여름 저녁 ©슬로보트 아뜰리에
수국이 피면 장마가 시작된다고 했다. 채플린과 수국 ©슬로보트 아뜰리에

1층부터 3층, 그리고 공간 뒤쪽의 마당까지. 각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시간과 풍경이 서로 다르고 동시에 모두가 매력적이네요. 특히 애정하는 공간이 있다면요?

2층 창밖의 바다는 언제나 옳아요. 나무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속도로 서서히 변하고 물은 지속해서 대놓고 변하는데요. 저는 한 번도 같은 바다와 파도의 운율을 보지 못했어요. 질릴 겨를이 없죠. 한치 잡이 배가 뜨는 5월부터 7월까지의 애월의 밤, 슬로보트의 밤은 말해 무엇합니까.


1층 뒷마당에 수국을 가득 심어 놓았어요. 작약과 수국 이 두 꽃은 사진가로서 저의 영원한 모티브이기에 조경 사장님에게 수국을 가득 심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수국은 평소 정말 못생긴 나무인데요. 마치 젓가락을 땅에 심어 놓은 형국이죠. 수국을 심고 실망한 저를 눈치채셨는지 조경 사장님이 한마디 하시고 가더군요. “수국이 피면 장마가 오는 거예요.” 7월의 뒤뜰을 바라보는 1층은 탱고 같습니다. 빗방울을 연신 맞는 수국의 잎사귀는 춤을 멈출 겨를이 없어요.


(좌)reflection 전시 포스터 (우)제주에서의 흔한 바다, 파도 ©슬로보트 아뜰리에

1층에서는 사진가님의 개인전 <reflection>이 함께 열리고 있죠.

제가 슬로보트를 오픈한 후 지난 1년간 제주에서 만난 풍경과 인연을 이번 전시에 담아내고자 했어요. 큐레이터님이 적어 주신 서문을 옮겨 볼게요.

아침 물안개 사이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나무와 안온하거나 거칠게 나타나는 바다의 모습에서는대자연의 숭고미sublime가 전해지며, 슬로보트 곳곳을 오가며 뒷마당을 바라보거나 사람과 눈 맞추는 고양이에게서는 무장해제시키는 귀여움과 삶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이러한 대상들을 통해 그가 담아내고자 한 것은 ‘성찰’이다. 홀로 머무는 섬 제주는 외롭지만 그를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줬다. 자연스럽게 주위의 산만함을 버리고 눈앞의 장면과 생명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그렇게 한참 보는 일에 집중하며 결국 마지막에 마주한 건 거기에 비친 작가 자신이었다. (중략) 그리고 그 장면을 지금, 당신과 나누며 전시된 사진과 그 안의 장면에 말 걸어보라고 권한다. 여기는 제주니까.
엄마를 잃은 아기 고양이 심바. 씩씩하고 용맹하라고 심바라고 작명. 우리의 초상 2021 ©슬로보트 아뜰리에

20년 가까운 시간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상업 광고 전문 사진가로 활동하셨죠. 특별히 제주로 작업실을 옮긴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제 좌우명은 “젊어서 고생해. 늙어서는 낭만적으로 살아야 않겠어? 짧잖아 사는 거.”입니다. 사진가를 포함한 모든 창작자는 자기 작업을 하고 싶어 해요. 타인의 주문이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서 표현하고 싶은 창작을 갈망하는 거죠. 저의 30대는 타인을 위해 표현하는 시간이었어요. 커머셜, 패션, 그리고 뷰티 사진을 촬영했어요. 유명해지기도 하고 돈도 많이 벌었죠. 하지만 타인의 만족을 위한 창작은 사실 매우 피곤한 일이에요. 그렇지만 어쩔 수 있나요. 우리는 어른이잖아요. 어른은 피곤함을 참을 줄 알아야 않겠습니까. 그렇게 열심히 일했고 돈을 벌었어요. 그리고 ‘이제 나를 위한 작업을 할 시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2018년에 커머셜 사진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이곳, 슬로보트를 만들었어요.

거칠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적당한 결을 가진 책상 ©슬로보트 아뜰리에

제주에 터전을 마련한 이후, 사진가로서 철학과 활동에 변화가 있을까요? 

서울에서는 입금되면 찍고 입금되지 않으면 찍지 않았습니다. (웃음) 제주에서는 찍고 싶으면 찍고 그렇지 않으면 카메라를 들지 않습니다. 심플하지만 매우 큰 변화죠!

낮은 층고가 주는 안온함 속의 집중 ©슬로보트 아뜰리에

슬로보트를 찾는 이들에게 이곳이 어떤 공간으로 기억되길 바라세요?

슬로보트의 커피는 맛있어요. 제가 커피 덕후여서 제주에서 가장 훌륭한 로스터인 ‘제레미 커피’에게서 원두를 수급하고 있어요. 하지만 제주에는 정말 많은 카페가 있고 먹거리를 즐기자면 다른 곳에 가는 게 맞아요. 슬로보트에서는 ‘영감’을 얻는 시간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입이 아닌 마음을 달래는 그런 공간, 이상한 남자의 요상한 취향을 경험하는 공간, 짧은 에세이 한 권 읽고 싶어지는 그런 공간이면 충분해요.

오늘의 바다 ©슬로보트 아뜰리에

슬로보트를 통해 펼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슬로보트에서 열 번의 전시를 하고 공간을 닫을 생각이에요. 처음부터 가졌던 계획이죠. 저는 제주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바다, 바다가 좋은 사람이어서 고성과 양양, 주문진도 좋아해요. 첫 번째 전시 <absorption>에 이어 두 번째 전시 <reflection>이 진행 중입니다. 올해 첫눈이 내리기 전 세 번째 전시를 열 계획이고요. 그리고 내년에는 조금 더 부지런히 전시할 예정이에요. 너무 늦지 않게 슬로보트를 찾으셔야 하는 이유가 되겠네요. (웃음)


슬로보트 아뜰리에 slowboat atelier

주소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 2길 46-16

운영시간 | 11am~19pm / 월, 화 휴무

문의 |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부산을 대표하는 건축가와 제과 명장의 만남, 칠암사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