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스튜디오 st.3713의 작업실, 카페, 그리고 취향의 공간
문래동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 자리 잡은 커피 편집숍 렁. 공간을 운영하는 주인장의 취향이 짙게 묻어나는 렁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수동커피머신으로 세심하게 압력을 조절하며 핸드프레소를 내리고, 느린 템포의 음악이 공간을 감싼다. 주문한 커피는 “Take it slooooooooooooow, it’ ok.”라는 메시지가 적힌 스티커와 함께 트레이에 놓인다. 커피를 건네 받은 이들은 천천히 시간을 곱씹으며, 느릿한 잠깐을 가지고 나간다. 그렇게 렁은 빠르고 저렴하고 편리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에 익숙해진 현대인에게 조금은 다른 가치를 전한다. 아주 빠름과 나노 단위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 렁은 조금 느리고, 조금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괜찮은 순간을 선사한다. 카페를 운영하는 브랜딩 디자인 스튜디오 st.3713의 석지운 대표는 본인 역시 남들보다 느리게 살아왔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괜찮고, 즐겁다고 말하는 그는 렁을 통해 “조금 천천히 여유롭게 가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라고 전하며 어깨를 두드린다.
― 렁은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네이밍이에요.
‘조금은 느리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느리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렁(lent)으로 이름 지었죠. 한국 사회는 빠름에 익숙하잖아요. 학업, 취업, 결혼처럼 암묵적으로 나이대별로 해야 하는 것도 있죠. 같은 템포로 다 같이 움직이며 살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어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렇다고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저는 보편적인 기준보다는 다른 스텝으로 상당히 느리게 살아왔어요. 그럼에도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큰 문제 없이 재미있게 잘 사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살아도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 렁의 공간은 본래 브랜딩 디자인 스튜디오 st.3713의 작업실이었죠. 어쩌다 작업실 안에 카페까지 열게 됐나요?
8년째 이곳 문래동1가 37-13번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스튜디오 이름의 ‘3713’은 구주소의 37-13번지를 의미하죠. 여기서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으면 대뜸 문을 열어보거나 들어오시는 분이 많았어요. 카페인 줄 아셨던 거예요. 돌려보낸 적도 있지만 이런 일이 잦아들자 그냥 내치기에도 조금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연히 작업실을 찾은 분들에게 모카포트로 커피를 내려 드리며 렁을 그리게 된 거죠.
다른 이유도 있어요. 브랜딩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카페 브랜딩도 5개 정도 했거든요. 클라이언트의 니즈와 트렌드를 반영하다 보면 제가 100% 만족하는 브랜드를 만들기 어려워요. 커피가 안 팔려도 좋으니 그간 브랜딩을 하며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하지 못했던 것을 렁에서 테스트해보고자 했습니다.
― 렁은 커피 편집숍으로 공간을 소개하죠. 커피의 뒷말에 편집숍이 더해지며 단순한 카페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카페 편집숍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에요. 이미 싱글 오리진 커피를 소개하는 카페들이 다양한 산지와 로스터리의 원두를 가져다 두고 판매하는 게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어요. 렁에선 이 시스템을 커피 편집숍으로 설명하는 거죠. 커피 편집숍으로 렁을 소개하자 찾아주시는 분들이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하고 맛있지만 거리가 멀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커피를 동네 분들과 함께 즐기고 싶은 바람으로 커피 편집숍의 형태를 취했죠.
― 디자인 스튜디오로만 쓰이던 곳에 카페의 기능을 더하며 공간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렁을 준비하며 구성에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요?
8년 전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말 그대로 벽과 바닥만 있었습니다. 바닥의 에폭시 시공부터 벽면의 페인트 작업까지 제가 하나하나 손을 댔죠. 저는 보통 브랜딩을 하며 공간 연출을 할 때 한 가지 톤의 미니멀한 무드로 작업해왔어요. 하지만 렁에서는 정해진 매뉴얼대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나의 톤앤매너가 아닌, 크게 두 가지 무드로 공간을 기획했습니다. 저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안쪽 공간은 스틸을 활용한 차가운 느낌의 공간이에요. 감각적이면서 정제되어 있고 조금의 차가움을 가진 디자이너의 직업적 이미지를 나타내죠. 입구 쪽의 공간은 우드톤의 따스한 뉘앙스로 표현했어요. 커피를 마시면서 깊은 감성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구현했습니다.
물론 고민도 있었어요. 오랜 시간 이곳을 디자인 스튜디오로 사용하다 보니 소품을 비롯한 작은 요소들이 많이 쌓여있었는데요. 이것들을 깨끗하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군요. 20년 가까이 디자인하며 복잡한 요소를 잘 어우러지게 만드는게 정말 어려운 거라는 생각이 늘 있었거든요. ‘공간에 놓인 많은 요소가 렁을 너무 복잡해 보이게 만들지는 않을까, 카페와 잘 어우러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번 보여줘 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렸죠.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모습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기존의 것들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으니 공간 내부의 큰 변화라고는 커피 제조를 위한 바 테이블을 추가했다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네요.
― 렁의 출입문은 공간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부분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문은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의 첫인상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처음 만나 눈을 마주하고 악수를 하는 것. 공간의 문손잡이를 쥐었을 때가 저는 첫만남의 악수라고 생각해서 여기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문을 직접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어요.
렁에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조금은 불편해요. 나노 단위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시대에서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남겨두었죠. ‘조금은 불편하면 어때?’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문도 마찬가지예요. 손잡이도 없고 열쇠 구멍도 하단에 하나만 있습니다. 손잡이가 없으니, 미닫이문으로 오인하는 분들도 계시죠. 일반적으로 문에 달린 도어 클로저도 없습니다. 문을 편하게 여닫을 수 있게 만드는 동력 장치가 부재한 거죠. 동력 장치가 없는 대신 문의 기울기에만 미세하게 차이를 주어 자동으로 닫히게 제작했어요. 바람이 없는 날에는 기울기의 차이만으로 느린 속도로 살짝 닫힙니다. 그리고 방화문에 사용되는 힌지를 사용해 문을 고정하기 위한 요소를 최소화 했죠. 일반적인 프레임의 문을 사용하면 바닥에 부착하는 스테인리스 판을 비롯해 여러 부가적인 작업이 필요하거든요. 반면에 방화문 힌지를 사용하면 위아래 구멍 하나씩 뚫는 것으로 고정을 끝낼 수 있어 보기에도 좋아요. 형태 자체도 일반적인 문의 비율과 달라 제작 업체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요. 제작과 사용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공간의 첫인상으로서 문이 줄 수 있는 느낌과 감각에 집중했습니다.
― 핸드프레소 수동머신으로 진득하게 커피를 내리는 모습은 렁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인 것 같습니다.
사실 머신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어느 날 중고 거래 플랫폼에 올라온 스틸케이스가 너무 예뻐서 구매했는데요. 케이스를 구매하고 보니 그 안에 지금 사용 중인 ROK라는 영국 브랜드의 수동머신이 들어 있었죠. 케이스 자체가 지금 사용 중인 머신 전용 보관함이었던 거예요. 정말 우연히도 구매한 케이스에 머신이 들어있으니 일단 사용해 봤는데요. 그 행위가 참 좋았습니다. 커피가 쪼르르 내려오는 소리, 제가 가하는 힘으로 내린 커피를 마실 때의 기분. 전반적인 경험이 어우러지며 커피가 괜히 더 맛있게 느껴졌어요. 머신에 주는 힘, 즉 압력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지는 것도 매력적이었어요. 머신을 마스터한다면 손님이 원하는 취향에 맞게 커피를 조절해서 내려드릴 수 있죠. 돌려 말하면 균일한 커피 맛을 내기가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아직 공부 중이라 점점 더 맛있는 커피를 선보일 예정이에요. (웃음)
더불어 손님들도 핸드프레소에 흥미롭게 반응해 주세요. 그리고 저는 렁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손 사진만 수집해서 기록할 만큼 손에서 손으로 전하는 감성도 참 좋아하는데요. 핸드프레소 머신은 손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렁만의 브랜드 전략이기도 합니다.
― 대표적으로 소개해주실 만한 메뉴가 있다면요?
날씨에 따라 선호하는 원두가 달라요. 무더운 날에는 멜론 향의 원두, 비 오는 날에는 피치 향의 원두를 좋아해요. 프랑스의 ‘라 빠르쉐(La Perruche)’라는 비정제 사탕수수 설탕을 첨가한 ‘렁 라떼’도 추천합니다. 원래 판매할 생각은 없던 메뉴예요. 제가 렁에 있다 보니 매일 커피를 마시잖아요. 그러면 종종 단 게 한 번씩 당기거든요. 그럴 때 제가 마음 가는 대로 만들어 마신 게 렁 라떼인데 맛이 좋아 지인들에게도 내려드렸죠. 그런데 다들 너무 맛있다고 이걸 시그니처 메뉴로 하면 딱 맞겠다고 의견을 주시더군요. 이름을 렁 라떼로 지은 것도 속도와 관련 있어요. 만드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리는 메뉴거든요. 설탕을 일일이 으깨야 해서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되게 맛있죠. (웃음)
― 카페와 디자인 스튜디오 운영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게 마냥 쉬워 보이지는 않아요. 카페와 스튜디오 운영에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신가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으시면 대충 파악이 되셨을 거예요. 저는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죠. (웃음) 디자인도 그래요. 이전에는 규모 있는 작업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프로젝트 규모보다는 디자이너로서 제 역할이 절실하게 도움 될 만한 작업을 선택합니다. 원하는 디자인 작업 위주로 느슨하게 업무를 진행하니 스케줄 조정에 어려움은 없는 편이에요.
― 지난 4월 카페 렁이 문을 열었어요. 실제로 카페를 운영하며 느낀 지금까지의 소회가 있다면요?
무엇보다 친구들이 정말 많이 생겼습니다. 저도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산다고 생각하는데 렁을 운영하며 정말 다채로운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어요. 렁에 방문해 주시는 손님들과 한두 마디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더군요. 오후에는 춤추는 중학생 친구도 올 거예요. 처음 왔을 땐 가족과 함께 등장한 사랑스러운 꼬마였죠. 어리니까 커피를 못 마실 것 같아 마침 있던 콜라를 내줬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친해졌어요. 그러다 함께 춤을 추고 싶다고 내민 손을 덥석 잡아버렸어요. 평소의 저답지 않게···. (웃음) 이제 렁은 그 친구의 아지트가 되어버렸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이야기를 담는 사진가, 한결같이 지나가시는 할머니, 잘생긴 가죽 장인, 젤라토 가게 사장님, 쉐프님, 뮤지션, 라이더까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재밌는 장면들로 공간이 채워지고 있어요.
― 렁을 찾는 분들이 어떤 기억을 안고 돌아가길 바라세요?
평일에는 지역 주민분들 그리고 주말에는 점점 외지에서 찾아주시는 분들이 늘고 있어요.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한 가지예요. Take it slow, it’s ok(천천히 해, 괜찮아). 출입문에도 시트지로 붙여 놓은 메시지죠. 대부분 옆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체크하고 비교하는 바람에 덩달아 달려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을 안고 있잖아요. 저는 제가 중요한 사람이거든요. 남이 아닌 늘 제 자신과 비교하며 살았죠. 일반적인 길로 오지 않았음에도 나름 잘 되더라고요. 렁을 찾는 모든 분에게 ‘조금 천천히 여유롭게 가도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라고 전하며 어깨 두드리며 보내고 싶어요. 제가 렁에 너무나도 담고 싶었던 메시지이자 공간을 운영하는 이유 그 자체이기도 하고요.
― 앞으로 렁에서 펼칠 계획이 있을까요?
정기적으로 공연과 전시를 열 계획이에요. 뮤지션들이나 무언가 이제 막 시작하는 루키들의 공연이요. 되게 작은 공간이고 그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박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며 제가 뒤에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달에 한 번 주기로 소모임을 기획할 예정이에요. 첫 번째 프로그램은 핸드프레소 수동머신을 체험해 보는 시간으로 꾸려볼 생각이고요.
― 디자인 스튜디오, 카페, 공연장, 커뮤니티 공간까지. 문래동 작은 공간의 역할이 막중하네요.
렁을 준비하며 건물 외벽에 ‘테이크아웃: 디자인(Take out: Design)’을 새겼어요. 디자이너가 아닌 분들이 디자인을 바라볼 때 느끼는 막연하고 높은 벽이 있다고 늘 생각했거든요. 본인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은데 무엇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는 막연함부터 디자인을 의뢰할 때 발생하는 높은 비용까지. 렁에서는 가볍게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듯이 디자인도 편하고 친근하게 접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를 위한 과정이고 렁은 그것을 뒷받침하고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거죠.
작은 시골 마을, 할머니가 운영하는 오래된 슈퍼마켓에 시트지를 붙여드린 적이 있어요. 올봄쯤, 지나가다 여전한 모습에 들렀는데 과자를 주시더라구요. 서로 감사를 나누었죠. (웃음) 디자인으로 지역 곳곳에 조금 더 예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렁은 여러분들과 소곤대는, 조금은 여유로운 이야기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