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씨와 상담을 진행하다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오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진심으로 내담자가 어떤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그렇기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회사에서 인정도 받고 있었고, 집과 차도 있었고,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었다.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즐겁게 살아가는 쪽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스트레스가 높았고 그래서인지 자꾸 어딘가가 아팠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열심히도 살았다. 회사에서 승진도 빨랐고, 열심히 모아 대출없이 집도 샀고, 몸이 아파도 꿋꿋하게 일했다. 치열하게 이뤄낸 것들이 대단해보이면서도 지금의 걸음이 너무 무거워 보였기에 내심 어딘가에 즐거움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낙이라...그런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요."
어떤 즐거움으로 살아가느냐는 질문은 상담가로서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쑥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나는 진실로 궁금하다.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낙으로 살아가는지.
이효리씨가 친정엄마와 떠난 여행기를 담은 예능프로에서 80세 여인의 삶의 낙에 대해 듣게 되었다. 평소 애정표현이 없던 엄마는 이효리와 나란히 누운 마지막날 밤에 고백한다.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엄마는 아무런 의미도, 세상사는 재미도 없었어." 라고.
지독한 가난과 여차하면 밥상을 엎는 남편을 견디며 4남매를 돌보았던 삶이었다. 그 옛날의 많은 여자들이 그러했듯 제대로 배우지도 무언가를 펼쳐볼 생각도 못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이른 나이에 대중의 인기를 얻어 슈퍼스타의 삶을 사는 막내딸을 보며 삶의 의미와 재미를 찾았던 것 같다. 현재도 아픈 남편을 간호하며 쉽지 않은 날들을 묵묵히 살아갈 수 있는 그 힘이, 해맑게 웃을 수 있는 바로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짐작해볼 수 있었다.
녹록치 않은 매일을 무탈하게 넘기기 위해서 저절로 의미와 재미를 찾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고작 하루라는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어른의 삶에 오늘을 가뿐하게 눈뜰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실로 어마어마한 축복일 것이다. 버티는 삶이 아니라 즐거운 삶. 그 차이는 자신만의 즐거움, 또는 의미에서 오리라.
# 재밌게 사는게 이토록 어려울까
'나는 어떤 기쁨으로 하루를 채워가고 있는가?' '내 삶의 낙은 무엇인가' 어쩌면 삶의 방향을 점검하며 꼭 던져보아야 할 질문이다. 이게 중요한 질문이 되는 이유는 재미를 잃고 살아가기가 더 쉬운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고 태어났으니 살아간다. 꽃이 피고지는 것처럼 우리의 태어남도 죽음도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탄생과 죽음 사이 기나긴 삶은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저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오면 젖는다. 자연스럽게 흘러갈 때에는 별 생각을 하지 않지만,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가로막혔을 때 생각이 많아진다. 일상이 원치않은 일들로 가득할 때 몸에는 힘이 들어간다. 견뎌야 하는 것이 일상이라면 재미가 있을리가 없다.
특히나 요즘의 우리 삶이 재미와 멀어진 이유는 주체성이 빠져있는 탓이 크다. 남들을 쫓아살고, 남들보기에 좋은 삶을 사느라 정작 '진짜 나'는 빠져있다. 진짜 나의 즐거움은 없고 수많은 '해야한다'로 가득채워져 있다. '가져야한다. 이뤄야 한다. 잘해야 한다...' 심리학자 카렌 호나이(Karen Horey)는 이러한 경향성에 대해 'should be 증후군'이라고 이름붙였다. 수많은 의무로 가득한 일상에, 강박적인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기 좋은 사고방식이다. 이상적인 자아상을 세워 자신에게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결국 불안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겪는다. 비현실적인 기대 혹은 기준을 설정하니 매일이 숙제다. 문제는 그 뿌리에 고유한 자신이 있는게 아니라 타인이 있다는 것이다. 화려해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을 닮으려 하거나, 타인의 시선에 그럴듯해보이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should be들을 생산해낸다. 이는 자연스럽게 목표지향적인 태도로 이어져 지금을 즐길 여유가 없게 만든다. 항상 어딘가로 가야하는 삶에 있다. 오늘을 살고 있지만 오늘에 발 붙이고 있지 않다.
# 힘든 일을 더 힘들게 만드는 방법
그러면서 나름 버텨내는 비법이 생기는데, 자신을 어떻게든 목표한 곳에 끌고가기 위해 스스로에게 보상을 내미는 것이다. 목표한 바를 이루거나 가지면, 원하는 삶이 펼쳐질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금전적인 보상 혹은 남들의 인정이나 관심같은 사회적 보상을 들이밀며 이렇게 속삭인다. '여기말고 저기에 좋은 게 있을거야. 지금에 결코 만족하지마.' 라고.
보상은 예를들면 이런 것이겠다. '월급모아서 명품백 사야지.'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해외여행 가야지.' '이 일을 해내면 승진할 수 있을거야.' '비싼 차를 내가 타고 다니면 남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겠지' 등등.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달콤해할만한 선물들이다. 물론, 동기부여를 위한 자연스런 방법이 될 수 있겠으나, 그런 패턴이 반복되었을 때 일상에 만족하며 살아가기는 어렵다. 재미와는 완전히 멀어진 지치고 버텨야하는 날들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왜 그럴까. 그 것은 보상을 줌으로써 '이 일은 힘든 일이야'하고 못박아버린 셈이 되기 때문이다. 힘든 일을 더 힘들게 만드는 길이 될 수 있다.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난이도 높은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재밌는 일이라면 누가 돈을 주지 않아도 하게 되어있다. 어린아이들은 누구나 그림을 그린다.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잘그리든 못그리든 매일 그린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그린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가 돈을 준다거나, 다른 목적이 있다면 모를까 어릴 때처럼 열심히 그리지는 않는다. 내적 동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즐거움이라는 내적동기. 이 것은 돈이나 명품, 여행, 사람들의 인정과 같은 외적보상보다 나를 저절로 움직이는 훨씬 강력한 힘이다. 그런데 외적 보상을 반복해서 주게 되면 '보상'에 포커스가 맞춰진 도파민을 자극하게 된다. 어떤 행동 또는 일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면 활동 자체로 얻는 즐거움을 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스탠포드대에서 진행한 연구가 바로 '보상이 어떻게 내재적 동기를 저하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실험에서는 그림을 좋아하는 유치원생 아이들에게 그림에 대한 보상을 주기 시작했다. 스티커와 같은 작은 보상이지만 아이들은 충분히 좋아하고 보람을 느낄만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보상을 중단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아이들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경향이 상당히 낮아졌다. 더이상 스티커를 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상을 받기 전에는 본인이 좋아서 즐겁게 하던 활동이었는데, 스티커를 받는게 반복되면서, '보상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 ' 즉, 즐겁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 버텨내야 하는 일이 아닌 그 자체로 즐거운 일
도파민은 쾌락을 느낄만한 것을 기대할 때 분비된다. 내가 하는 일 자체가 즐거운 것이라고 여긴다면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훨씬 즐거운 기분으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계속 그 일을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보상을 주게 되면 내가 하려는 활동 자체가 아닌 그 것을 완수한 후의 '보상'에 포커스가 맞춰지므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재미'에서는 멀어지고 '얼른 해치워야 하는 일' '보상을 위해 버텨내야 하는 일'이 된다.
돈도 인정도 바라지 않고,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어른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해야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최대한 즐거운 것으로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최소한, 더 힘들게 더 어렵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이왕 해야하는 일이라면,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 일을 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괴롭게 만드는 것. 그 또한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노력이다. 한달에 하루, 월급날만 기다리며 한달을 버티기엔 '한달'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너무 소중하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좀 더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좀 더 재밌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내가 하는 일에 노련해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며 이런저런 방식으로 접근해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수도 있다. '잘해야만 해' 라는 생각으로 가득 차 어렵게만 느껴졌던 일의 숨은 재미를 찾아보는 것이다. 최대한 힘을 덜 들이자는 게 아니라, 내가 들이는 에너지가 '애씀'이 아니라 기꺼이 해보고 싶은 '놀이'가 될 수 있도록 해보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결코 쉽게 소진되지 않고 오히려 없던 기운도 솟아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지치는 줄 모르고 뛰어다니며 노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즐거움이 더해지면 그 행위(혹은 일)가 향상되기 마련이고, 향상되고 성장하는 것에는 즐거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뇌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보상으로 설득하면 일을 더 힘든 것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이건 내가 선택한 일이야.' '이건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이야.' 또는 '이거 생각보다 정말 재밌는 일이야!'라고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말해주면 뇌는 훨씬 쉽고 재밌는 일이라고 착각하게 되어 긴장을 낮추게 된다. 스트레스가 낮아지고 매일 기꺼이 해볼만한 것이 된다. 일의 난이도가 낮아지면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보상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내가 하는 행위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아보자. 내가 가장 오랜시간을 보내는 '일', '활동'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삶의 만족감이 올라가는 것은 덤일테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드런트러셀은 저서 <행복의 정복> 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그 자체로 행복한 활동을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외부 보상이 아닌 내재적 동기로 활동을 한다. 자신의 관심사와 즐거움에 따라 행동하므로 이러한 방식이 자신에게 큰 만족감을 준다는 것이다.
# 고유한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삶
일 뿐만이 아니라 일상의 많은 행위들을 이러한 내재적 즐거움으로 채울 수 있다면, 단순한 재미 이상의 깊은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자신 안에서 솟아나는 즐거움, 자신을 움직이는 힘은 곧 자신의 고유한 것일 수밖에 없으므로 '진짜 나의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남들을 쫓아 살고 남들 보기에 좋은 삶을 사는 가짜 삶을 너머 고유한 기쁨과 행복으로 살아가는 삶을 향해 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 것은 보상이 주어질 때만 잠깐 누리는 행복이 아니라, 일상에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행복일 것이다. 삶은 굵직한 이벤트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매일매일에 대한 것이니까. 합격, 성공, 일확천금과 같은 상상만 해도 설레는 대단한 일이 우리 인생을 채우는 게 아니라 밥먹고 똥싸는 일상의 반복이 우리 삶의 민낯에 가까울 것이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들었던 "사는거 별거 없으니 그냥 대충 살아"라는 대사가 마음에 남아있다. 나이 지긋한 어른이, 힘들어하는 젊은이에게 너무 애쓰지 말고 살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언젠가 일흔, 여든이 된다면 20, 30대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일상의 많은 부분을 즐겁게 살아낼 수 있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사는 거 정말 재밌어. 너도 한 번 살아봐." 라고. 그럴 수 있기 위해. 나도 나에게 질문해 본다. '내 삶의 낙은 무엇이지?' '어떻게 더 재밌게 살 수 있을까?' 라고.
무언가 완성될 때만 만족감을 느끼는 숙제같은 삶이 아닌, 단 한 장면도 놓치기 싫은 영화처럼, 단 한마디도 흘려듣고 싶지않은 노래처럼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아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