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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우 Jan 05. 2021

<테넷>, 놀란의 허무주의

<테넷>이 감추는 것들

놀란의 영화에서 시간을 체험하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도덕과 결부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놀란이 영화에서 여러 층의 시간을 다루기 시작한 시점부터, 인물의 도덕적 선택과 몰락하는 공동체가 부각된 것은 순전히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배트맨 비긴스>에서부터 놀란의 영화는 세계를 구하는 히어로물이었다. 세계(혹은 공동체)가 무너질 위기에서 영웅(들)이 임무를 부여받고, 딜레마에 교착되다가 이를 극복해내서 세계를 구한다는 플롯 구조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란은 이 파국의 순간에 영웅, 혹은 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듯하다. <배트맨 비긴즈>는 그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놀란은 <정의란 무엇인가> 속 트롤리의 열차 딜레마를 변용한 이 영화에서 놀란은 개인을 구하냐, 공동체를 구하냐는 공리주의의 딜레마를 그린다. <다크나이트>에서도 마찬가지로 레이첼(연인)이냐, 투페이스(공동체)냐라고 질문한다. 놀란의 영화는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질문에서 후자가 더 중요하다고 답하는 듯한 뉘앙스를 보인다. 배트맨이 투페이스를 택하지 않은 죄로 고담은 한 명의 악당을 더하게 되었다. 배트맨의 이러한 실패는 배트맨이 희생양이 되기를 택함으로써 무마된다(<다크나이트 라이즈>). 놀란의 영화는 이같은 딜레마를 시간과 결합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놀란이 구해야 하는 대상의 중요성에 비례해 늘어나는 듯하다. <다크나이트>에서는 레이첼을 구하는 시간과 투페이스를 구하는 시간을 평행으로 배치된다. 고든과 배트맨의 시간은 동시에 진행되기에 이 둘의 중요성은 비슷하게 느껴진다. 반면 <인셉션>의 시간은 현실에서의 몇 시간, 꿈에서의 일주일, 꿈 속 꿈에서의 6달, 림보까지 네 개의 시간을 배치해서 이 넷이 구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 것으로 느껴지게끔 한다. 현실에서의 몇 시간은 에너지 독점으로부터 인류를 구해내는 시간이며, 꿈에서의 일주일은 팀을 구해야 하는 시간이며, 꿈 속 꿈에서의 6달은 피셔 부자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림보에서의 영겁은 멜로부터 속박당한 나, 그리고 사이토를 구해내는 개인을 구원하는 시간이다. 인류-팀-가족-개인의 구원은 다른 시간으로 체험되고, 코브(디카프리오)가 눈을 깼을 때의 카타르시스로 다가온다. <덩케르크>는 이를 극대화해 1달, 1시간, 1분이라는 세 층위의 시간을 하나의 편집으로 묶어 세 시간대에 있는 개인이 제각기 다른 공간에 있더라도 이 셋이 서로에게 반응하고 있다는 연대의 감흥을 쌓는다. 놀란은 개인과 공동체, 가족이 제각기 중요하며, 이 셋이 딜레마를 넘어서 구원되는 과정을 비춘다. <인터스텔라>도 마찬가지로 나와 가족, 세계의 구원을 한 곳에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놀란은 <인셉션>에서부터 개인이냐 공동체냐라는 딜레마를 마주하지 않으려, 시간을 쪼개서 모든 것이 구원되는 체험을 중축해낸다. 그리고 이 시간체험이 시작되는 장소는 언제나 개인의 사소한 선택으로부터 온다. 놀란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지구가 구원되고 있으며, 누군가의 고군분투가 일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듯한 관점을 관철한다. 이는 매 순간이 소중하다는 소박한 감상주의로 빠진다. <덩케르크> 이후로 놀란이 현재 시점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세 개의 시간의 연결 아니라 미래-현재-과거의 연결을 이루어낼 것이라 생각했다. <테넷>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엔트로피의 역행이 가능해진다는 인버젼이라는 설정으로 미래에서 과거로 인간이 침투하는 것이 가능한 세팅을 마련해두었다. 할아버지의 역설이라는 제한을 두어서 시간이 뒤엉키면서 생기는 모순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문제는 이번 영화에서는 놀란이 무엇을 지키려는 지가 없다. 공허한 구원의 퍼포먼스만 있을 뿐이다. 공동체가 무엇이며, 무엇을 지켜야만 하는가, 무엇이 공동체를 이루는가?가 부재하기에 인물들이 이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진다. <테넷>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해하지 말고, 느끼려고 해봐라”라는 대사는 이 영화가 아무런 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쩌면 놀란이 쓸 수 있는 가장 기만적인 대사라고도 생각된다. 놀란의 영화에서 체험은 언제나 스펙터클로 작동한다. <다크나이트>에서부터 그는 IMAX포맷과 방대한 자본력으로 화면 너머로 물성을 지닌 것들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은연 중에 전시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찍을 때나 썼을 법한 아날로그 촬영방식을 고수하는 그의 아집은 관객에게 압도감을 주는 데에 목적이 있다. 세계가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재현할수록 관객은 무너짐에 압도당하고, 그 체험은 영웅의 행보가 더 간절하게 보이게끔 만든다. 놀란의 인물들이 단순히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동기만을 가지고 움직이고 복잡한 드라마가 부연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그들의 심정을 간절히 느낄 수 있는 이유를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압도감은 시간체험과 연결되어서 간절함을 만든다. 놀란의 설정을 관객이 모두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것이 각자가 파국에서 자신의 삶을 구하는 체험이라고는 이해되었다. <테넷>은 그러한 시간체험의 본질에 무엇이 있는가에 의문이 들게끔 한다. “물리학 석사라서 이해할 수 있다”는 과학적 지식을 나열하면서 놀란은 세계의 견고함만을 자랑하려 든다. 시간을 구성하는 데 있어 <인터스텔라>의 구조를 가져왔지만 경험되는 것은 없다. 놀란은 <덩케르크>에서처럼 이름 없는 어떤 용사를 앞세운다. 그는 주도자라고만 불리는 초점인물(존 데이비드 워싱턴)은 급작스레 등장해 고문당하는 테스트에 통과한다. 곧장 위로부터 “생존의 문제가 걸린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지령을 받는다. 그는 소중히 여겨야할 것이 없는 존재처럼 보인다. 가족도 없는 데다가, 세계를  지킬만한 이유가 “생존”밖에 없기에 관객은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기가 힘들다. 더불어 닉(로버트 패틴슨)이 등장하지만 닉은 모든 것을 다 아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지만 어정쩡한 보조자로만 남아있다. 캣이라 불리는 여성(알렉산드르 데비키)은 사토르(케네스 브레너)로부터 학대당하고, 아들을 지키려 벗어나겠다는 1차원적인 문장만을 구사한다. 가족 혹은 공동체의 몰락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왜 그곳에 살아가야 하는지를 다루는 도덕적 성찰이 없다보니 <테넷>에는 구멍이 생긴다. 인물이 단순한 동기로만 움직이는 데 비해, 설정은 그 동기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테넷>은 말 그대로 설정만 있는 요란스러운 빈껍데기가 되어버린 듯하다.  더군다나 설정을 만드려고 개개인을 희생시키는 놀란의 세팅은 앞서 말한 공리주의 딜레마의 최악의 면모를 보여준다. 놀란은 구하고 만들어야 할 세계가 있을 때, 개개인을 버릴 수 있는 잔인한 감독이다. 물론 <테넷>의 스펙터클은 지금껏 놀란의 영화 중에서 최고라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 스펙터클은 왜 그 스펙터클이 존재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스펙터클이 영화를 집어삼키고 만다. 장르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플롯에 007의 포즈들, 하이스트 영화의 쾌감을 결합한 이 영화는 이 셋을 표면으로만 구현한다. 하이스트 영화의 쾌감은 제각기 동기를 지닌 인물들이 하나로 집결되면서 주는 카타르시스에 방점이 있는 장르인데, <테넷>은 하이스트 영화처럼 인물들이 하나로 뭉치지만 저마다의 사연이 없이 개인들의 나열에 불과해지며다. 에스피오나지라고 분류하기에도 주도자는 어색하다. 영화는 장르적인 요소들을 나열하지만 그것이 뒤섞이기보다 파편으로 흩어져있을 뿐이다.  빠른 숏 전환을 기반에 둔 엉성한 편집은 첩보물이 주는 서스펜스를 증발시키고, 시간이 연결된다는 느낌을 제거한다.  과거-현재-시간을 연결하면서 만드려고 했던 체험을 왜 놀란은 선택했을까.


시간을 제 아무리 다룬다고 한들 놀란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다. 가장 비슷한 시간을 다룬 <인터스텔라>도 실은 현재의 체험라고 할 수 있다. <인터스텔라>는 우주를 계속 여행하고 있는 쿠퍼(매튜 맥커너히)를 초점인물로 하고 그의 시간을 따라가기에 시간관에 혼동이 생기지 않는다. 시간을 거스르던, 혼동이 생기던 관객은 쿠퍼가 행동을 지속하는 지금을 따라가면 그만이기에 <인터스텔라>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이 순환되는 체험을 다루더라도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체험을 하는 듯한 착시를 준다. <테넷>은 그 대신 할아버지의 역설을 들고와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로 엮으려고 한다. 할아버지의 역설은 “나가 과거로 가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나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담는다. 놀란은 타임 패러독스를 다루는 대신 손자가 할아버지인 나를 죽이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이는 과거, 지금, 미래 세대간의 갈등을 암시하면서 미래의 나가 지금의 나를 죽이지 않게끔 하려면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놀란은 지금껏 역사를 다룬 적 없다. 지금의 사람들이 지금의 공동체를 지키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더니 급작스레 과거-현재-미래가 하나가 되어서 인류를 구원하자고 던지는 놀란의 메시지는 얄팍하기 그지없다. 이 영화의 안타고니스트들은 “지금의 세대는 지금의 문제”, “무지가 우리를 구한다”라면서 미래를 부정하는 악당을 앞세운다.  할아버지의 역설로 “기후 위기가 전 세대의 탓이기에 전 세대를 죽여야 한다”라는 악당이 동시에 등장하면서 주도자는 과거와 미래 둘 다를 부정하는 악당과 맞서게 된다.  이 둘을 처단하고 난 뒤에 영화는 닐을 앞세워 공허한 나레이션을 깔고 만다. “지금의 나가 세계를 구했다”라는 말은 더없이 공허하다. 현재가 어떻게 과거와 미래를 구원하는가?에 대한 질문 없이 놀란은 이 셋을 하나의 시간대로 엮어서 체험을 만들려고 한다. 왜 체험하는가 질문이 없으니 그 체험의 형식마저 실패하고 만다. 인버젼 설정을 중심으로 회전문을 통한 거울이미지를 앞세우는데, 과거으로부터 앞으로 나아가는 세계와 미래로부터 뒤로 퇴행하는 세계가 만나면서 생기는 시너지가 없다. 처음부터 나 자신과 싸우는 나 자신의 이미지는 거울 이미지가 등장하자마자 예측되면서 서스펜스가 증발한다. 놀란은 미래로부터 오는 습격에 대해서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이라는 허무주의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과거를 믿지도, 미래를 믿지도 않는 놀란의 허무주의는 공허한 퍼포먼스로 보인다. 캣이라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한 여자를 구하자는 (어쩌면 사랑이 깃든) 포즈로만 남은 놀란의 낭만주의는 구원이 되지 못한다. 캣은 남편에게 복수해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가정을 구하지만 이를 편집할 때, 놀란은 그것이 미래를 구하는 행위로 직결되지는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저 그것은 한 가족을 구하는 일로 끝날 뿐이다. 주도자와 캣, 닉 사이에는 어떠한 연대의 순간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지막에 주도자가 캣을 구할 때, 캣은 지금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미래의 주도자가 와 캣을 구하고야 마는 결말로 끝난다. 시간을 넘나든 끝에 <테넷>은 내가 지금-현재에 한 행동이 다시금 자신의 미래를 구원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한치도 달라지지 않고 더 게을러졌다. 놀란이 <두들버그>에서 구현한 내 행동의 결과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실존의 문제를 다시 건드린 듯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두들버그>에서 남자가 그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죽지만 <테넷>은 이를 엔딩에서 무작위의 문제에 맡긴다. 놀란은 <테넷>에서 인류를 구원하려고도 들지 않는다. 기후 문제에 있어서 함구한 채 그저 지금의 행동이 지속되기만을 바란다. 미래가 발전한다는 믿음, 과거에 대한 반성도 없이 흘러가는 놀란의 시간은 지극히 옹졸한 것으로 바뀌었다. 시간의 허무에 인간을 영영 버려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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