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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오 Jul 08. 2019

고양이, 개
- 고양이파 인간, 개파 인간

관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 고양이와 개

얼마 전 점심시간에 동료들에게 내가 몹시 좋아하는 국수집을 소개했다. 그 날 점심은 평소와 달리 어쩌다 N씨와 S씨, 나,이렇게 셋만 있었는데, 결과는 대호평으로, N씨와 S씨는 매일 온다 해도 좋겠다, 다음에도 또 오자, 라고 하며 나의 식미를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S씨의 추진으로 우리는 다시 그 국수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국수 집에 가는 길, 웬일인지 예상했던 인원이 갑절 이상이 불어나 일곱이 되어 있었다. 사람 좋은 S씨가 다른 동료들에게도 권유한 결과였다. 붐비는 대로변의 사람들을 피해 제각각 바삐 이동하고 있는데, 평소 마음이 잘 맞는 N씨가 나지막히 말했다. 


이렇게 떼로 갈 필요는 없는데.

그 말에 순간, 묘한 안도감과 함께 연대감이 느껴졌다.


아, 역시 N씨도 고양이파 인간이었던 것이다.

  



떼로 국수집에 가는 것에 대해, N씨의 그러한 코멘트는 그 국수집이 누군가에게 추천할 정도가 아니기 때문도,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실로 N씨도, 나도 다른 동료들과 사이가 꽤나 좋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N씨가 다정한 사람이 아닌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N씨는 매우 상냥해서, 귀찮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을 걸고 장난을 쳐도 받아주고, 매번 살뜰히 배려를 베풀어 준다. 때문에 가끔은 직장에 월급이 아니라 N씨의 친절을 받으러 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 N씨가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인가 하면 그것도 노. 


결국, 그녀는 철저히 고양이파 인간으로서 그 상황을 해석했을 뿐이었다.


흑백논리는 좋아하지 않지만, 성격을 흑과 백으로 나누는 일은 상당히 흥미롭다.


인간은 흔히 두 분류로 나뉜다. 외향과 내향, 이성과 감정, 하다못해 이과와 문과, 인싸와 아싸에 이르기까지, 양극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두 성질로 구분되곤 하는 것이다. 여기에 고양이파와 개파 또한 흔히 볼 수 있는 기준 중 하나다. 사실 성격이란 분류라기보다는 스펙트럼의 문제에 가깝기도 하지만, 이 문제를 배제하고서라도 나는 사실 고양이파와 개파라는 분류법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보통 그 기준이 연애 관계에 빗대어 쓰이는 경우가 많은 탓이다. 연애에서 고양이파는 속내가 의뭉스럽고 차가우며 내킬 때 말고는 연락을 하지 않는 반면, 개파는 헌신적이고 따뜻하며 항상 준비된 자세라고들 이야기한다. 


연애에서 고양이파와 개파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인간과의 관계에서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태도를 그들 자체의 성질로 환원시킨 데 대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있다. 어디까지나 고양이가 차갑다, 개가 따뜻하다, 라는 말을 들으면 동물이란 마땅히 인간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읽히는 것 같아서, 쉽게 불편한 기분이 든다. 또, 구분 자체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고양이가 과연 애정 관계에서 수동적이고 보수적이기만 할까. 고양이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전혀, 그들이 얼마나 애정과 관심을 요구하는지 잘 알 것이다. 


애정 관계에서의 태도로만 따지자면, 나의 세 번째 고양이는 단연 개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양이파 인간과 개파 인간을 구분하곤 한다. 이 구분법이 나에게는 인간 관계에 있어 동류를 발견하는 데 꽤나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고양이파 인간과 개파 인간의 기준은, 그 사람이 타인과 자신의 영역을 어떻게 설정하는지에 있다.


고양이파 인간은 타인과의 경계가 명확하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 영역을 철저히 분리시킨다. 영역 내에는 자신과 가까운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있고, 영역 밖과 영역 안 관계의 구분도 명확하다. 반면, 개파 인간은 이 영역이 좀 더 느슨하거나 유연해 친밀한 관계가 아닌 타인에게도 좀 더 개방적이다. 관계의 영역도 특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인간 관계의 모든 사람인 경우가 많다. 이는 개인 내부의 문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성이나 사교의 영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말하자면 사교적인 사람도 고양이파 인간일 수 있고, 내성적이거나 독립적인 사람도 개파 인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고양이파 인간인 탓에, 나는 같은 고양이파 인간을 빨리 발견하고 빨리 가까워진다. 실제로 나의 측근들은 N씨처럼 대다수가 고양이파 인간이고, 서로가 서로를 자신의 영역 안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덕에 꽤나 의미 있는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내가 고양이파 인간인 탓인지, 개파 인간에게는 그들을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로 어딘가 저어하는 마음이 생긴다. 또, 그들이 나를 어느 정도의 친밀한 사람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감각도 좀 떨어진다. 아마 그들에게 우리, 혹시 친한 사이였어? 라고 묻는다면, 대다수가 그럼 아니었어? 또는 지금 친해지고 있잖아, 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저렇게 친한 사이라는 게 가벼웠나, 싶은 기분이 드는데도 말이다. 또, 나는 아직 그 정도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제법 가까운 거리로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남몰래 안절부절 하기도 한다.  




개파 인간을 대할 때와 비슷하게, 개를 대하는 나 또한 꽤나 어색함을 느낀다.

나의 고양이들은 - 아무래도 그들은 진짜 고양이니까 그렇겠지만 - 정말로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의 첫 번째 고양이는 아기 고양이일 때 친척 집에서 개를 잠시 만나본 적이 있지만, 성묘가 된 후로는 개 쪽에서 아무리 호감을 보여도 끔찍하게 싫어하게 됐다. 두 번째 고양이와 세 번째 고양이는 말할 것도 없다. 하긴 고양이파 인간인 나조차 같은 종인 개파 인간을 낯설어 할 때가 있으니, 종마저 다른 고양이들이야 오죽할까.


나도 고양이와 산 세월이 길어질수록 개와 만나면 아주 서먹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개를 보고 좋아하다가도 막상 가까이 와서 처음 보는 나를 반기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여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친척의 개와 둘이 방에 남겨졌을 때는 살면서 해 본 가장 어색한 공놀이를 해 보는 아주 희한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십 년도 더 전에 만났던 훗카이도의 개. 고양이를 반려하기 전의 나는, 고양이 뿐만 아니라 대형견과도 함께 살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어색함과 별개로, 사실 나는 개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이다.


십대 때 가족 여행으로 홋카이도에 간 적이 있는데, 산책했다 돌아가는 밤길을 근처 별장에 사는 큰 개가 배웅해 준 적이 있다. 사람이 그리워 풀숲에서 튀어나온 개를 내가 곧바로 쓰다듬자 동물을 좋아하는 아버지조차 놀라워했다. 무섭지 않았어? 하고 아버지는 물어봤지만, 무섭기는 커녕 나에게 엉겨붙는 개가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앞장 선 개를 따라 호텔 정원에 들어서자 신기한 구경이라도 하듯 일본인 투숙객들이 몰려들어 창문에서 우리를 지켜봤다.

 또, 일이 년 전 쯤 카페에서 키우는 중형 정도의 개와 처음으로 물건을 밀고 당기는 터그 놀이를 했을 때도 너무 신나버린 나머지 개를 데리고 집에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개랑 노는 게 이렇게 재미있었나?




고양이파 인간으로서 개파 인간과의 관계도 나와 개들의 사이와 비슷한 점이 많다.


고양이파 인간으로서 고양이파 인간을 선호해 마지않는 나지만, 나에게는 매우 친한 개파 인간들이 있다. 놀랍게도 그들은 흔치 않게 내가 모임으로 만나는 사람들인데, 사실 여느 개파 인간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모임은 나에게 에너지를 많이 요해서 나에겐 만날 때마다 벅찬 느낌이 없잖아 있다. 나는 조용한 곳, 액티비티를 해야 한다면 혼자, 누군가와의 여행은 웬만하면 당일치기를 좋아하지만, 개파 모임에서는 번화한 곳, 다 같이 하는 액티비티, 모두 함께 떠나는 1박 이상의 여행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은 모임에서 유일한 고양이파 인간인 나를 동류인 개파 인간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고양이파 모임에서는 함께 갈 리가 절대 없는 수상 스포츠도 개파와 함께 했다. 역시나 망설였는데도 꽤 재미있어서, 개파 모임에서 나를 끌고 다니는 일이 썩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들과의 세월을 돌이켜 보면, 꽤나 재미있는 일화나 경험이 많다. 만나기 전에는 - 사실 나는 그들을 매우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 몇 번이고 오늘 조금 무리하는 게 아닐까, 쉬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고 망설인다. 하지만 정작 함께 있다가 헤어지고 나면 어라, 꽤 재미있었잖아? 다음에도 또, 로 금방 생각이 바뀌어 버린다.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버렸는데도, 그래서 다음 모임에 나가기 전에 또 고민을 하는데도 말이다. 마치 개에 대한 나의 경험과 비슷하게.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일전에 어떤 동물 행동 학자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는 인간을 다른 동물처럼 자신과 분리된 종으로 볼 뿐이지만, 개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 아마도 인간을 특별하게 생각해서 - 인간과 융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고양이파 인간과 개파 인간의 구분에 완전히 들어맞는 그들의 성질이다. 고양이파 인간은 타인과의 분리를 좀 더 좋아하지만, 개파 인간은 화합을 선호하니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기준이겠지만.


모든 성격들은 특성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에, 나의 기준도 오류 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연인의 타입을 고양이파와 개파로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도, 우리 관계에 있어 고양이와 개라는 구분은 정말이지 매력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내가 분리를 좋아해 마지 않는 고양이파 인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가 뭐래도 고양이와 함께 살며, 고양이가 자신의 영역에 나를 받아들여 준 것에 기뻐 마지 않는 고양이파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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