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병원 가기: 좋은 고양이 의사는 인간에게도 이롭다
좋은 약 열 가지보다 좋은 의사 한 명이 낫다.
비전문가로서 좋은 의사를 가리는 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이것은 병원에 갈 때마다 되새기는 나의 모토이다.
그 덕에 나는 어떤 병원에 한 번 정착하고 나면 병원을 쉽사리 바꾸지 않고, 또 바꾸지 못한다. 늘 가는 이비인후과도 다닌 지 17년, 18년 정도가 되었으니, 고양이 털과 함께 한 세월만큼 나는 이비인후과 의사와도 알러지나 코의 염증 같은 인생의 일부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고양이들과 함께 살게 되면서, 병원 선택에 대한 내 신조는 더욱 확고해졌다.
왜냐하면 병원이나 의사에 대한 고양이들의 습성은 절대 불호, 병원 방문은 절대 사절하는 그들의 특성으로 인해, 무엇보다 좋은 의사를 만나야만 반려인인 내가 진단이나 처치 방식을 신뢰할 수 있고, 싫어! 라고 외치는 고양이에게 괜찮아, 더 나아질거야, 라고 하며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의 두 번째 고양이도 얼마 전까지, 그녀로서는 제법 긴 시간인 3년 동안이나 같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있어 왔다. 이런저런 이유로 의사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했던 건, 그간 충분히 많은 의사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도, 내가 그런 경험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그 전까지 나나 내 고양이가 마음을 푹 놓을 수 있는 고양이 의사를 만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를 오랜 동안 반려하고 있다 보니, 그간 만난 동물병원 의사만 해도 족히 열 명은 된다.
두 번째 고양이의 의사를 제외하고 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인상적인 의사는 둘이었다. 그들은 대개 동물을 퍽 좋아하거나 그들을 꽤나 배려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었다. 수의사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자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을 진료하는 의사만 해도 만사 제치고 환자만을 위하는 의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양이로서도 의사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잘 알기 때문에, 이는 정말이지 중요한 조건이 된다.
내 기억에 남는 첫 번째 고양이 의사는 치과 전문의로, 내가 만난 의사 중 가장 진료와 처치에 확신을 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어떤 점이 고양이를 편하게 해 주는 건지는 몰라도, 의사를 증오해 마지 않는 두 번째 고양이는 답지 않게 그에게 몸을 쉽사리 맡기기도 했다. 그 덕에 두 번째 고양이는 수술이 어려운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발치를 제법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고양이 의사는 첫 번째 고양이의 담당의였다. 이 의사는 내가 만난 의사 중 가장 동물을 좋아한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으로, 사실상 딱히 처치할 방도가 없었던, 노쇠해진 첫 번째 고양이를 최선을 다해 돌봐줬다. 그를 고양이 별로 보내고 돌아오던 길, 그 의사는 처음으로 우리 가족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고양이가 떠날 것을 직감했다고 이야기하며 의사는 진심으로 평안을 빌어 주었고, 그 말에 목이 메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의사는 얼마 뒤 개원을 위해 병원을 옮겼고, 자연스럽게 그 뒤에 만나게 된 의사(정확히는 같은 병원에 있어서 가끔 담당의가 부재중일 때 대신 진료를 봐 주곤 했지만)가 두 번째 고양이를 담당하게 되었다.
두 번째 고양이의 담당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병원에 가는 날은 고양이에게도 끔찍한 날이지만, 그들을 돌봐주어야 하는 나로서도 굉장히 힘든 날이다. 때문에 담당의가 친절해 마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덜어 준다. 그 의사가 바로 그런 사람으로, 두 번째 고양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는지, 병원에서는 겁먹어 있기 마련인데도 담당의 앞에서만큼은 조금이나마 의사표현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그 의사는 두 번째 고양이의 건강 문제로 애닳아 하는 나를 안심시켜 주었고, 세 번째 고양이가 아기 시절에 걸렸던 감기나, 그녀의 중성화 수술도 무사히 끝마치게 해 주었다. 가끔은 병원에서 돌아가는 내 손에 고양이들의 간식이나 장난감, 때때로는 영양제를 챙겨 주기도 하며 종종 말했다. 보호자님네 고양이들은 참 착해요.
그래서 한 달 남기고 의사가 일을 잠시 그만둔다는 말을 했을 때도 쉽사리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고양이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고양이들도 그렇겠지만, 묘하게 쓸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분은 5년 전쯤에, 내 병원에서 의사가 바뀌었을 때도 느껴본 익숙한 감정이었다.
3년 동안이나 매 주, 때로는 주에 2번씩이나 만났던 의사. 의지를 많이 하고 있었던 탓인지, 사정상 다른 의사로 바뀌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그 뒤에 온 의사도 때마침 익숙해 질 무렵, 일 년쯤 되었을 때 그만두게 되었고, 그 뒤로도 한 명을 거쳐 나는 지금의 의사에게 진료를 받게 되었다.
만난 지 두 해 정도 된 이 의사와는 처음에 받았던 느낌보다 꽤나 죽이 잘 맞고, 나를 배려해 준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아마도 이전 의사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의사와도 만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뻔한 말이지만, 헤어짐이 다른 만남을 불러 온 결과였다.
상사인 J와 잡담을 하다가 고양이 의사가 바뀌었는데 조금 섭섭하네요, 라고 이야기했더니, 자식이 있는 그는 자신도 아이가 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든다며 공감해 주었다. 그의 반응에 왜인지 아이를 키우는 그와 고양이와 함께 사는 내가 감정을 공유한다는 사실에 새삼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고양이를 통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나와는 꽤나 이질감이 드는 사람들과 감정이나 시간을 공유하게 해 준다는 뜻밖의 사실을, 고양이 의사를 생각하면서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만난 지 두 달 정도 된 지금의 내 두 번째 고양이의 새로운 의사가 어떠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직 나도, 나보다도 나의 고양이는 좀 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하지만 지난 번, 치료가 끝나고 이동장에 들어가는 두 번째 고양이를 보며 의사가 문득 말을 걸었을 때, 나는 조금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는 고양이가 참 좋은데, 아이들은 저를 참 싫어하더라고요. 그는 그저 건넨 말이겠지만, 고양이만큼이나 경계심이 있는 나로서는 왠지, 돌아가는 고양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마음의 경계가 조금이나마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고양이 의사들에게, 우리 고양이들은 늘 듣는 말이 있다. 일전의 고양이 의사도 종종 나에게 말해주었던 말, 보호자님네 고양이들은 다들 참 착해요, 라는 말을 나는 대부분의 의사들에게서 들어 왔다. 비록 병원에서만 그렇지, 집에서는 모두들 자기 주장이 강하기 그지없는 나의 고양이들이지만, 나도 조만간 나의 고양이 의사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제 고양이들은 항상 참 운이 좋아요, 늘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물론 내 고양이는 좋은 의사도 싫어할 게 분명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