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적 의문 네 번째
< People in the Sun , 1960, Edward Hopper >
몇해 전에 가까운 글씨가 뭉그러져 잘 보이지를 않아 돋보기, 안경점의 표현대로 독서 안경을 맞추게 되었다.
돋보기를 끼니 나름 선명했다고 여겼던 휴대폰 화면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선명함의 극치였고, 뭉글뭉글하던 책의 활자는 모서리의 날카로움까지 쨍하게 전해졌다.
내 수정체와 사물 사이에서 렌즈가 왜곡을 일으켜줘서 비로소 선명한 세상이 보인 것이다.
부정적 단어였던 “왜곡”의 장점을 제대로 경험한 순간이다.
그제서야 주변에 온갖 모양과 두께의 안경을 쓴 사람들이 새롭게 보였다. 그들 모두는 자신에게 맞게 왜곡하여 세상을 보고 있는 것 아닌가?
모두 왜곡된 시선들이다.
제각각 다른 왜곡은 [선명하게 보기 위함]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지향한다.
속된 말로 색안경을 쓰고 보지 말라고 하는데, 어떠한 것을 온전하고 동일하게 보려면 제 각각 다르게 왜곡을 해서 보아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서로다른 시력과 시선, 시각, 시야로 살아간다.
왜곡되지 않은 맨눈으로 보면 누군가는 뿌옇고, 누군가는 굴곡지고, 누군가는 흐리멍텅한 형태를 보고, 누군가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볼 것이다.
의학적 교정을 통한 의도된 왜곡이라할지라도 완벽한 수준에는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체를 있는 그대로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진실일까?
교육, 미디어, 종교,이념, 환경 등으로 각자 [조정된 왜곡], 혹은 [의도된 왜곡]을 통해 보는 것이 진실일까?
이런 행동들이 공통의 진실(선명함)을 지향하는 결과물을 낼 수 있을까?
특정된 시야와 관점을 목표하여 왜곡되지는 않는가?
이것을 왜곡이라 표현해도 되는 것일까?
어떤 왜곡들이 눈치도 채지 못하게 진실이라는 허상을 빚어내고 있을까?
가장 궁금한 것은, 각자 스스로 자신이 왜곡된 것을 인정할까?
좌파나 우파, 나아가 극좌 극우로 갈라 치기를 하는데 문득 정확한 중앙, 중립은 어디쯤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선명함처럼 존재하는가도 싶다.
세대와 성별, 지역과 계층, 시대와 사회 분위기 등등의 원시, 근시, 난시, 노안, 색약, 색맹 등등 더구나 서로 다른 양쪽 눈까지를 정확히 왜곡(교정) 하기는 참으로 쉽지 않을 듯하다.